역사, 인물 관련

‘조롱에 갇혀, 노닐던 언덕 그리워 슬퍼하네’

道雨 2016. 6. 8. 12:28

 

 

‘조롱에 갇혀, 노닐던 언덕 그리워 슬퍼하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

 

 

해어화, 말귀에 능통한 꽃이었을 뿐이다. 사대부들은 한철 노리개 삼아, 매창의 마음을 빼앗고는 떠나거나, 몸을 집적대다가 떠났다. 허균만은 예외였다. 매창과 그는 적멸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반이 되었다. 허균은 매창 앞에서 진실로 부끄러워했다.

조롱 속 새는 끝내 조롱 안에서 죽었다. 그의 울음은 억울한 여인들의 울음이 되었고, 그의 시는 그처럼 ‘천한’ 이들의 위로가 되었다. 그의 외로운 주검을 수습해 거문고와 함께 묻고, 그 앞에 비석도 세우고, 때마다 무덤에 술 한 잔 올린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매창, 부안현 관아 소유의 관기.

계축년에 태어났다고 계(癸)랑. 그러나 철들면서 본인은 계수나무 계(桂), 계랑으로 이름을 삼았다. 당시로선 기생 주제에 ‘방자하게도’ 스스로 매창을 아호로, 천향을 자로 삼았다.

 

그런 그를 당대의 문장가 권필은 ‘여반’(女伴·여자친구)으로 삼았다.

“신선과 같은 자태는 이 세상과 맞지 않아…”로 시작하는 그의 시 제목은 ‘여자친구 천향에게’였다.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은 그를 시기(詩妓) 혹은 가기(歌妓)라고 존중했다.

 

임서는 1605년 무창현감 시절 시를 보내 생일잔치에 초대했다.

“…아름다운 사람이여 안녕하신가,/ 요지 술자리에서 선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안 현감에게 한마디 부탁만 하면 될 일이었다.

 

임방은 <수촌만록>에서 ‘(문인들 가운데) 매창의 시권에 시를 지어 써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당시 문화계의 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해어화, 말귀에 능통한 꽃이었을 뿐이다. 사대부들은 한철 노리개 삼아, 그의 마음을 빼앗고는 떠나거나, 몸을 집적대다가 떠났다.

촌은 유희경과의 관계를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로 상찬하지만, 촌은도 사실은 40대 초반에, 10대 중반의 물정 모르는 매창의 몸과 마음을 가져간 이였다. 매창을 그리워하는 시 7~8편을 문집에 남기긴 했지만, 신분과 성의 ‘조롱’ 속에 갇혀 있던 그를 풀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매창과 관련한 기록은 한자로 80자 안팎의 <매창집> ‘발문’과, 그와 잠시 시간을 함께했던 이들이 두어 줄 인상 비평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그의 빛나는 사랑과 우정의 순간들은 대부분 추측이다.

 

부안현 아전이던 이탕종의 딸로 1573년 나서 관기로 살다가 1610년에 죽었다!

어머니가 관기였기에 기생의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부안의 태수가 범하고 버린 탓에 그의 부친이 기적에 올렸다고도 하고, 의지가지없는 그가 먹고살도록 부친이 죽으면서 그를 기방에 넣었다고도 하고…, 그가 기생이 된 배경마저 오리무중이다.

 

‘영원한 사랑’ 촌은 유희경과의 만남도 14살 때인지 19살 때인지 알 수 없다. <촌은집> 중 남학명의 ‘행록’에 “(촌은이)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파계를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다.

며칠 뒤 서울로 떠난 촌은은 그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그리워도 서로 볼 수 없으니/ 오동잎에 닿는 빗소리에도 애가 끊어지는구나” 탄식을 했다.

매창 역시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촌은이 그런 매창을 다시 찾은 것은 16~17년 뒤, 그의 나이 환갑 전후였다.

 

촌은과 이별 후 누군가의 기첩이 되어 3년간 서울살이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매창의 이름은 종적을 감춘다.

 

그의 삶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01년 허균이 부안에 등장하면서부터였다. 허균은 1601년 7월 세미를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감독하는 전운판관으로 전라도에 내려왔다가 매창을 만난다. 당시 매창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으니, 난봉꾼 허균에겐 ‘대단치 않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매창은 허균의 삶에서 뗄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문집에서 “성품이 고결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허균을 매료시킨 것은 매창의 시와 노래보다 그의 성품이었던 듯하다.

<조선해어화사>를 쓴 이능화는 “성정이 절개가 있고, 깨끗하여 세상 어지러움에 물들지 않았으며, 음란한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남겼다.

“일찍이 어떤 손님이 그녀의 명성을 듣고 시를 지어 꾀니, 계랑이 즉시 그 시를 차운해 이런 답시를 지었다.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차가운 매화 가지에 걸린 달을 홀로 사랑했는데….’ 선비는 머쓱해서 돌아갔다.”

 

취객의 못된 손길을 이렇게 물리치기도 했다.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를 잡으니/ 저고리가 그 손길에 찢겨졌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의 은정까지 끊어질까 두려워라.”

‘은정이라니…’, 취객은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떴다.

 

그런 그를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은 중국 최고의 여류시인이라는 설도에 비유했다. 1603년 매창과 모악산 용안대에 올랐을 때였다.

“변산의 맑은 기운 호걸을 품었더니/ 규수 천 년에 설도가 다시 있어라/….”(‘사시 매향에게’)

 

허균도 추모시에서 그렇게 비유한다.

“오묘한 시구는 비단을 펼친 듯하고/ 청아한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했네/ …부용 휘장에는 등불이 어둡게 비치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았어라/ 명년 복사꽃 필 즈음엔/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을런가.”

 

매창보다 1천년 앞서 살았던 설도도 기생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춘망사’는 시인 원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것이었다. 그 셋째 연이 우리 노래 ‘동심초’의 가사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 하는고.”

역자인 시인 김억에게 매창은 설도였고, 설도는 매창이었다.

 

매창은 나이 듦에 따라 권문세가, 문장가의 기억 속에서 잊혔지만, 허균만은 예외였다.

1608년 공주 목사 시절, 그는 퇴직 후 아예 부안 우반골에 터를 잡기로 하고, 당시 부안 현감이던 심광세에게 편의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해 여름 파직당하자, 바로 우반동의 정사암을 개축하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불행하게도 그해 말 조정에 다시 불려 올라갔지만, 우반동 시절 그는 매창과 내변산을 유람하고, 문집을 정리하는 등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가는 곳마다 기생을 끼고 살고, 그것을 자랑처럼 문집에 남기던 행태도 바뀌었다.

매창과 그는 적멸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반이 되었다.

 

1609년 3월 그는 매창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근래에도 참선을 하시는가.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네.”

6개월 뒤 다시 편지를 보낸다.

“봉래산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흥을 가눌 길 없네. 낭자는 응당 내가 구학의 맹세를 저버렸다 비웃겠지. …언제나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 수 있을지.”

 

그러나 그즈음 매창의 몸과 마음은 병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모두가 떠났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허균도, 그의 벗들도 떠났고, 심광세 현감도 고향으로 돌아간 뒤 소식 한 자 없다. 자신을 ‘여반’이라 했던 권필도 그해 여름 잠깐 들렀다가 떠나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혼자였다. 누가 마흔 다 된 퇴기를 찾을 것인가.

 

“…병에 지친 몸만 남아/ 가난과 추위 속에 40년이 흘렀네./ 인생을 살면 얼마나 산다고/ 수심에 옷깃 마를 날이 없는가.”(‘병중수사’)

이듬해 봄 그는 마지막 노래를 남긴다.

“새장에 갇혀 돌아갈 길 막혔으니/ 곤륜산 낭풍이 어디였던가/ …긴 털 병든 날개 죽음을 재촉하니/ 해마다 노닐던 언덕 그리워 슬피 우네.”

 

조롱 속 새는 끝내 조롱 안에서 죽었다. 다만 그의 울음은 억울한 여인들의 울음이 되었고, 그의 시는 그처럼 ‘천한’ 이들의 위로가 되었다. 그의 외로운 주검을 수습해 거문고와 함께 묻고, 그 앞에 비석도 세우고, 때마다 무덤에 술 한 잔 올린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아전들도 그의 시를 모아 <매창집>을 간행했다.

 

하지만 가부장들은 아직도 그를 조롱 속에 가두려 한다. <가곡원류>에 한 줄 나오는 ‘수절’ 코드로 그의 시와 삶을 읽도록 떠민다. 차별과 구속의 조롱에서 벗어나, 창살 없는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고자 했던 매창인데….

 

그보다 앞서 그런 꿈을 꾸다가 무참하게 무너져간 누이 허초희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허균은 매창 앞에서 진실로 부끄러워했다.

 

자네가 가고 나니 “…봉래섬 구름은 자취도 없어지고, 푸른 바다 속으로 달도 잠겼어라….”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