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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선봉장 '사야가',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되다. '김해 김씨' 성 내린 선조

道雨 2016. 1. 22. 12:08

 

 

 

 

일본군 선봉장,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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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국 일본을 '배신'하고 조선을 위해 싸운 '항왜'(항복한 일본군)의 대표적 인물 김충선을 기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소재 녹동서원 일원의 전경. 맨 오른쪽의 현대식 건물이 한일우호관, 그 왼쪽 옆 몸채가 붉은 집이 사당, 거대한 빗돌(신도비) 왼쪽이 녹동서원 강당, 맨 왼쪽 건물이 한일우호관 건립 이전에 쓰였던 기념관으로 현재는 행사 장소로 이용되는 충절관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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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풍이 건듯 불어 (南風有時吹)

문을 열고 방에 드니 (開戶入房內)
문득 소리는 사라지고 (焂然有聲去)
소식 전하는 이도 없네 (消息無人來)

 

이 글은 임진왜란 중 어느 장군이 쓴 '남풍유감(南風有感)'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한창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 판에 무장이 한가롭게 시나 짓고 있었단 말인가!" 하고 힐난할 일은 아니다. 이순신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도 전란의 피바람 속에서 태어났다.

 



'남풍유감'을 짓기 직전, 장군은 막사 바깥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문득 바람이 불어와 장막 안으로 들이친다. 남풍이다. 남풍이라면 남쪽, 즉 장군의 고향에서 불어온 바람이다. 장군은 그 바람소리, 남풍이 문을 열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기척을 멀리 고향에 떨어져 있는 가족 소식을 가져온 전령(傳令)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착각한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장군은 바람을 뒤쫓아 장막 안으로 달려든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아! 아무도 없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이 시조의 화자는 빗소리가 떨어지는 마루 끝에 쓸쓸히 앉아 있다. 화자는 "오마" 하고 언약한 적도 없는 그 사람이 지금 너무나 사무치게 그립다. 그가 불쑥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응시하면 대문은 홀연 '열릴 듯'도 하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없다. 그저 내 눈만 자꾸 그리로 향할 뿐이다.  

 



장군의 애잔한 심정은 최남선의 시조 '혼자 앉아서'를 연상하게 한다. 아니, '남풍유감'이 '혼자 앉아서'보다 3백여 년 앞선 작품이니 최남선이 장군의 문집에서 얻은 시흥을 현대적 언어로 형상화했다고 말해야 옳겠다. 그래서 '남풍유감'의 장군을 기려 건립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우록리 585) 소재 '달성 한일 우호관' 내부에는 '남풍유감, 술회가(述懷歌) 등을 보면 장군은 무장이었지만 문인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는 문장이 게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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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김충선이 살았던 마을) '달성 한일 우호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모하당 김충선' 게시물로, 김충선의 초상과 그의 약력을 담고 있다.
ⓒ 한일우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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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자신에게 가족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전쟁 발발 때부터 진작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부모와 아내를 조국 일본에 버려둔 채 적국 조선의 장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앞장선 무공으로 조선 정부로부터 정2품의 신분까지 부여받았다. 그런 '배신자'에게, 이 전쟁통에 바다까지 건너와, 가족 소식을 전해줄 '정신 나간' 일본인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남풍유감'의 장군은 사야가(沙也加)라는 일본명 대신 조선 이름 김충선(金忠善)을 역사에 남겼다. 명분 없는 전쟁에 온몸으로 항거한 사야가는 부산에 상륙한 즉시 조선에 귀화했고, 그 결과 사야가와 김충선은 한일 양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으로 두 나라에 차차 각인되어 왔다. 일본에서는 1972년 이래 김충선에 관한 언론 보도, 장편소설 출간 등이 줄을 이었고, 한국에는 1794년(정조 18) 김충선이 여생을 보낸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세우고, 2012년 5월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일우호관을 건립했다.

 



일본이름 대신 조선이름 '김충선'을 역사에 남긴 사람

 



김충선은 어떤 인물인가? 한일우호관 내부에 부착되어 있는 게시물 '모하당 김충선'(위의 사진)을 읽어본다. '모하당 김충선'은 김충선의 초상과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본문 중 귀화의 동기와 과정 부분에 매겨진 번호는 인용자가 풀이를 위해 임의로 배치한 것이다. 귀화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분량상 연속 기사로 다룰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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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이 일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한나라 기행>이 출간된 1972년 이후부터이다('한'은 한국을 뜻함). 시바 료타로는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에 처음 소개하였다. 그 이후 하세가와 쓰토무의 <귀화한 침략병>, 고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 등 사야가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 연이어 출간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에 투항한 왜장의 존재를 자연스레 각인하게 되었다. 방송에서는 NHK가 1992년 임진전쟁 400주년을 맞아 <역사 발견> 프로그램에서 사야가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조선 출병 400년, 히데요시에게 반역한 일본 무장'을 제작,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사야가는 누구인가, 왜 조국을 버리고 조선을 선택했는가'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다큐멘터리 이후 다른 방송과 신문들도 사야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김충선 거주지) 한일우호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본 작가들이 저술한 김충선 소재의 장편소설 원본의 표지들이다.
ⓒ 한일우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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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당(慕夏堂) 김충선(1571-1642)은 (1) 본래
일본인으로 (2) 어릴 때부터 조선의 문물과 인륜 중시 사상을 흠모하였다. 임진전쟁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조선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부산항에 (3) 도착하자마자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부하 3천 명을 이끌고 평소 예의지국으로 흠모하던 조선에 귀화했다.

 



그 후 김충선은 경주, 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조총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하였다. 또한 임진전쟁이 끝난 이후 대구 우록동에 거주하다가 자청하여 10년 동안 북쪽 변방을 지키다가 돌아왔으며,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삼란공신(三亂功臣)으로 불렸으며, 품계가 정헌대부(정2품)에 올랐다. 또한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노후에는 우록동에서 가훈과 향약을 지어 자손과 주민들에게 가르치다가 1642년(인조 20)에 별세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모하당집> 해제는 김충선을 '임진왜란 때에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거부하여 귀화한 일본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충선에 대해 소상하게 알아보기 위해 '모하당 김충선'의 내용을 낱낱이 풀어가며 읽어본다. 김충선은 '(1) 본래 일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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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원 강당 우측 뒤에 자리잡고 있는 녹동사(김충선 사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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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충선은 본인 스스로 많은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귀화하기 전 일본에서 어떤 인물로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사성(賜姓) 김해김씨 세보>에 나오는, 1571년 1월 3일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났고, 일본에 살 때 이미 결혼을 하여 부인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익(益), 할아버지는 옥국(沃國), 증조할아버지는 옥(鋈)이었다는 정도가 전해지는 내력의 전부다.

 



사야가의 일본 생활에 대한 증언이 없는 까닭은, '김충선의 유문은 가장(家藏)되어 오다가 병화(失火)로 대부분 소실되었다'는 <모하당집>의 해제처럼 관련 기록들이 전란 중에 사라져버린 때문이거나, 아니면 본인 스스로가 일본에서 살았을 때의 지난 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어느 쪽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야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까닭

 



필자는 김충선이 본래 일본군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겨났다고 추정한다. 놀랍게도, 믿을 수 없게도, 침략군 선봉장이 돌연 조선군 장군으로 변신하여 조국 일본군을 무찌르는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군공을 세웠다! 하지만 스스로 '술회가'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조선에서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친척과 형제와 아내를 다 떠나면서 슬픈 마음 서러운 뜻이 없었다면 거짓'이라고 실토한 것처럼, 사야가는 조국이자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이 자기 때문에 처형당하거나 고통받는 경우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을 터이다.

 



가족들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사야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실대로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사야가와 김충선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1761년(영조 37) 11월 12일에 이르러서야 <승정원일기>에 처음 기록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무려 164년 뒤, 본인 사망 후 120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사야가와 김충선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만큼 사야가는 조선이 보호해주어야 마땅한 국제정치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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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이 사야가라는 사실을 국가 공식 기록물 중에서 최초로 증언하는 <승정원일기> 1761년(영조 37) 11월 12일자 내용
ⓒ 한일우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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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사야가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김충선이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을 조선군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일본 와카야마현 철포 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를 사야가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즈키 마고이치가 토요도미 히데요시와 대립한 반대 세력의 인물인데 어떻게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선봉장이 될 수 있겠느냐'면서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를 사야가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중 조선에 귀화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岡本越後守)를 사야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는데, <한나라 여행>을 써서 임진왜란 참전 일본군 장군의 조선 귀화 사실을 처음으로 일본에 알린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사야가는 대마도 출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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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행장 군의 4월 13일 부산항 상륙보다 며칠 뒤인 4월 18일에 조선땅에 오른 가등청정 군의 선본장 사야가(조선명 김충선)이 조선 백성들에게 배포한 <효유서('알림'의 글)> 중 주요 내용
ⓒ 한일우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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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은 '(2) 어릴 때부터 조선의 문물과 인륜 중시 사상을 흠모하였다.' 이는 사야가가 부산 상륙 직후 조선 백성들에게 뿌린 <효유서>(曉諭書)에 명확하게 나타난다. <효유서>에서 사야가는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번 와서 보기가 소원이었고, 이 나라의 교화에 젖고 싶은 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지금 나는 비록 다른 나라(일본) 사람이고 (가등청정 군대의)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나는 너희 나라(조선)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조선인)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고 선언했다. 사야가는 어릴 때부터 조선의 문물과 인륜 중시 사상을 흠모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 전쟁 도발을 자신이 조선인으로 살 수 있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사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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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우호관에 게시되어 있는 <부산진성 전투도> 복사본.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14일 부산진성을 공격, 임진왜란 첫 전투가 벌어졌다. 첨사 정발을 위시한 3천여 조선 군, 민이 2만에 가까운데다 총까지 가진 일본군에 맞서 수성을 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4시간만에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의 백성들은 물론 개와 고양이까지 남김없이 다 죽였다. 그런데 이 전투는 소서행장의 군대가 치렀다. 사야가는 가등청정의 선봉장이었던 관계로 18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했으므로 부산진성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아마 사야가는 이 전투에서 드러난 일본군의 잔학상을 보고 더욱 조선 귀화를 결심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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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야가는 '(3)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부하 3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했다. 사야가가 조선인들을 살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보낸 <강화서>(講和書)에 잘 밝혀져 있다.

 



사야가는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하며 자신의 귀화가 목숨을 구하기 위한 투항이 아님을 당당하게 강조했다.

 



"제가 지금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 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사야가의 조선 귀화 이유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 29권을 새삼 읽어보게 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 중 왜군이 조선에 투항한 직접적 동기'를 '왜군 진영에 기근이 극심했고, 조선 정부가 항왜(降倭, 조선에 항복한 왜군)를 후대한다는 소문이 왜군 진영에 전파된 것, 일본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고 본국으로 철수했을 때에 겪어야 할 생활고에 대한 걱정'의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야가는 목숨 부지 걱정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사야가의 귀화는 세 가지 중 어느 경우와도 무관하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조선에 귀화했으니 굶주림에 시달렸을 리 없고, 사야가 본인이 최초의 귀화 인물인즉 조선이 항왜를 우대한다는 소문은 아예 생겨나기도 전이었다. 개전 초기는 일본군들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각각 몇 시간만에 가볍게 점령해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때이므로 패전 후 귀국했을 때의 생활고를 걱정할 시점도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은 아직 항왜 수용을 위한 대책이 없었고 적의 투항을 불신하여 투항자가 오면 무조건 살해하겠다는 것이 정론이었던 반면 명군은 항왜를 받아들여 후대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이 처음 투항한 곳은 조선 진영이 아니라 명군 진영이었다'는 <신편 한국사>의 증언과,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사야가가 명군도 아닌 조선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찾았다는 기록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 

 



<효유서>와 <강화서>에 이미 천명하였지만, 김충선은 자신이 지은 '술회가'에서도 '남쪽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면서 '조선의 좋은 문물 한번 보기 원했는데 하늘이 그 뜻 알고 귀신이 감동하여 가등청정이 어리고(당시 22세) 무식한 나를 선봉장 삼았네' 하고 술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충선의 글을 모아 간행된 <모하당문집>의 '녹촌지'에도 그가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조선에 귀화한 까닭이 거듭 밝혀져 있다.

 



'내가 이 나라에 귀화한 것은 잘되기를 구함도 아니요, 명예를 취함도 아니다. 대개 처음부터 두 가지 계획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요순 삼대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에 남겨서 대대로 예의의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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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한일 우호관' 뒤편 300미터 산중에 있는 김충선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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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29권은 '조선에서는 물론이며 일본의 유학자들도 풍신수길이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풍신수길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 대명무역 확대, 해외 발전 또는 봉건영주들의 세력 약화를 위한 것 등을 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또 다른 <한국사>의 12권도 '① 풍신수길의 개인적인 심리적 공명심과 영웅심 등을 근간으로 하는 것. ② 일본의 조선이나 명에 대한 무역과 결부된 해외 발전에 두는 것. ③ 풍신수길이 일본 국내의 여러 봉건영주, 특히 신흥세력인 구주의 영주(領主)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해외 원정'을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으로 적시한다.

 



그런데 '모하당 김충선'은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또 하나의 까닭을 말해준다. 그가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부하 3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사야가도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 및 일부 일본 사학들과 동일한 인식, 즉 '임진왜란은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세 가지 이유'

 



사야가의 귀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 자신이 문화국 조선에서 살 수 있기를 어릴 때부터 염원했다. 둘째, 자식들을 예의 나라에서 예를 아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셋째, 일본의 조선 침략에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생각한 평화주의 사상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전쟁 중 적국에 붙은 인물의 유례는 그리 드물지 않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던 남생은 동생들과 암투에서 밀리자 당나라에 붙어 조국 고구려의 멸망에 크게 기여(?)한 뒤 적국에서 높은 벼슬까지 한다. 따라서 남생은 일신상의 욕심을 위해 조국을 버린, 말 그대로 배신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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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을 제향하기 위해 1794년 세워진 녹동서원은 영조와 정조 때 조선 유림들이 뜻을 모아 임금에게 건의한 끝에 건립되었다. 김충선이 본래 일본인이었고 문인이라기 보다는 무장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그만큼 조선 선비들이 김충선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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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견주면 사야가는 차원이 다르다. 임진왜란은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이었다. 1592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 아메리카인디언의 99%를 학살하여 2000만 명이던 그들을 20만 명만 생존하게 만들고, 1500년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8000만 본토인들을 불과 50년 뒤인 1550년에 단 1000만 명만 남게 만든 유럽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흉폭한 야만인들이었다.

 



게르하르트 슈타군은 <전쟁과 평화>를 통해 "전쟁은 전염병처럼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이나 사회집단이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인간소외의 가장 단적인 주범 전쟁, 그것도 명분없는 전쟁은 조국이 일으키는 것일지라도 반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행동하는 양심'은 때로 조국도 배신해야 한다. 사야가는 정권 차원의 국가보다 인류 전체의 공동체를 위해 한 몸 던지는 것이 사람의 도(道)라는 가르침을 역사에 새긴 진정한 위인이다.

 



녹동서원 일원 답사 순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우록길 218(우록리 515) 일원의 김충선 장군 유적지에 도착,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맨 먼저 충절관을 보게 된다. 가장 왼쪽에 서 있는 건물로, 예전에는 기념관이었지만 지금은 강연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충절관은 대체로 문이 잠겨있기 때문에 일반 답사객은 들어갈 수가 없다.

답사객은 (1) 한일우호관(가장 오른쪽의 현대식 건물)부터 둘러본다. 실제로도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김충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다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2) 한일우호관 왼쪽의 녹동서원(강당), 녹동사(사당), 신도비 등을 둘러본다.
(3) 우호관에서 뒤로 300미터 가량 산을 오르면 김충선 장군 묘소가 있다. 본래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 산길이었는데 지금은 산책로를 닦고 손잡이와 다리까지 설치되어 있는데다 숲그늘이 좋아 걷기에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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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수에게 '김해 김씨' 성 내린 선조

[대구 녹동서원 ②] 일본군 선봉장 사야가가 조선군 장수 김충선이 되어 세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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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의 주 함선인 아타케부네의 모습. 일본 함선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의 안택선(安宅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물론 김충선도 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을 것이다. 사진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일우호관의 전시품을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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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鹿洞)서원은 대구 우록리(友鹿里)에 있다. 우록은 대구광역시의 법정리(法定里)이지만 '사슴(鹿)을 벗(友)하며 사는 마을(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면 단위의 산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우록리 585)의 녹동서원은 임진왜란 유적지를 답사할 때 결코 빠뜨리면 안 되는 중요 방문지이다.

보통의 서원은 선비를 모시지만 녹동서원은 전혀 다르다. 이곳은 일본군 선봉장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곧장 조선에 귀화하여 큰 무공을 세운 '특이한' 경력의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곳이다.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이유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 <일본군 선봉장,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된 까닭> 기사 참조)

김충선은 과연 어떤 공을 세웠기에 일본군 장수 출신이면서도 조선의 서원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녹동서원 옆 '한일 우호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모하당 김충선'의 내용을 통해 김충선의 업적을 살펴본다. (번호, 주석, 문장부호는 모두 필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1) 경주, 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2) 조총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하였다. 또한 (3) 임진전쟁이 끝난 이후 대구 우록동에 거주하다가 (4) 자청하여 10년 동안 북쪽 변방을 지키다가 돌아왔으며, (5) 이괄의 난과 (6)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삼란공신(三亂功臣, 왜란, 이괄의 난, 호란에 모두 공을 세운 공신)으로 불렸으며, 품계가 정헌대부(정2품)에 올랐다. 또한 (7)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賜姓)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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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언덕, 사적 159호인 이견대가 문무왕 설화가 전해지는 대왕암을 바라보며 서 있다. 본래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기려 세운 것이지만 없어졌고 현존 건물은 1979년 건축물이다. 사야가는 이곳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높은 벼슬과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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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은 귀화 이후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운다. 1593년 4월 경주 이견대 싸움에 참전하여 일본군 300여 급을 참살했고,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을 공격할 때에는 1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들어가 수십여 명의 적군을 참살했다. '모하당 김충선'이 '(1) 경주, 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기술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경주,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사야가

선조는 사야가를 크게 포상해야 한다는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을 받아 그를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대우하는 한편 성(姓)과 이름(名)을 하사한다. 선조는 사야가에게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 하고 기뻐하면서, '김해 김씨'를 성으로 삼으라 한다.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加)에 모래(沙)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착상한 선조의 기발한 작명이었다. 충성스럽고 착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이름은 '충선(忠善)'이라 정해졌다. 이를 '모하당 김충선'은 '(8)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김씨(賜姓金氏)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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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우록마을 마을회관에서 도랑을 건너 김충선 묘소로 오르는 임도 입구의 '차량 통제 구역' 안내판(사진 왼쪽)과, 그 앞 문중 묘소 빗돌에도 '사성 김해김씨'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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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호족들에게 사성(賜姓)을 하여 자기 세력을 확대하는 왕건의 고려 창업 과정이 말해주듯, 임금에게서 성(姓)씨를 받는(賜) 것은 엄청난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성 가문은 즉시 상류층에 편입되었고, 본인과 후손들에게는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펼쳐졌다.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김충선 역시 '술회가'를 지어 가슴 뜨거운 감회를 토로했다.

자헌계(姿憲階) 사성명(賜姓名)이 일시에 특강(特降)하니
어와 성은(聖恩)니야 깁기도 망극다.
이 몸 가리된들 이 은혜 갑플소냐!

위 '술회가' 일부의 현대석

자헌대부라는 높은 품계와 성명을 한꺼번에 특별히 하사하시니
아, 임금의 은혜는 깊고도 끝이 없도다.
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애쓴들 어찌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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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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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는 수로왕,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오랜 전통의 명문 거족이다. 즉, 사야가에게 주어진 임금의 하사품은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역사의 광영이었다.

그런데도 김충선 가문은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덧붙여 스스로를 '사성 김해 김씨'라 부른다. 그런 호칭은 임금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은 김충선의 후손이라는 영예를 당당하게 자랑하는 데 절묘하게 도움이 된다. 물론 본래의 김해김씨와 구분이 되지 않는 문제도 덩달아 해소된다.

조총 제작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한 김충선

김충선의 업적 중 한 가지는 '(2) 조총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했다'는 점이다. 본래 조선 정부는 조총의 제조와 사용법, 염초의 채취 및 화약의 제조법 등을 아는 항왜들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받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관직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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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무기였던 휴대용 화기였다. 길이 1m 전후로, 사정거리는 100-200m, 명중률이 높은 거리는 100m 이내였는데 실제 전투시에는 대체로 50m 정도에서 사격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이 조총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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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전문 능력을 갖춘 항왜의 대표적 인물 사야가는 조총과 화포 등 일본 무기 제조 기술을 전수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곽재우, 권율, 김성일, 이덕형, 이순신, 정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조총 보급 등의 현안에 관해 논의했다. 그가 이순신에게 보낸 답서에 등장하는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에 화약을 섞는 법은 (중략) 이미 각 진영에 가르쳤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를 올려 보내라는 명령이 있사오니 어찌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같은 기록도 그 사실을 증언해주는 사례의 한 가지이다.

김충선은 '(3) 임진왜란이 끝난 후 대구 우록동에 거주한다.' 그가 우록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까닭은 <모하당문집> '녹촌지'에 밝혀져 있다. 그는 1600년 '산중에 우거하는 사람은 대개 사슴(鹿)을 벗(友)하며 한가로움을 탐하는 것이다. 우록의 뜻은 내 평생토록 산중에 숨어살고자 하는 뜻에 부합한다. (중략) 그러므로 한 칸의 띠집을 세워서 자손에게 남기노니 이곳이 곧 나의 원하는 땅'이라면서 마을이름을 우록(友鹿)으로 바꾼다. 본래 우록마을의 한자 표기는 지형이 소(牛) 굴레(勒)를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우륵(牛勒)으로 내려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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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사에서 본 우록마을의 지형. 본래 소(牛) 굴레(勒)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륵(牛勒)이라 불렀으나 1600년에 김충선이 '사슴(鹿)을 벗(友)하며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우록(友鹿)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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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록동에 살던 김충선은 '(4) 자청하여 (1603년부터 1613년까지) 10년 동안 북쪽 변방을 지킨다.' 임금(광해)은 그 공을 칭찬하여 정헌대부(정2품)의 교지와 "자원하여 줄곧(仍) 지켰으니(防) 그 마음 가상하도다"(自願仍防其心加嘉)라는 여덟 글자의 어필(御筆)을 하사한다. 그가 '잉방시(仍防詩)'라는 제목의 시를 남긴 것은 이 어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잉방시'의 어휘 풀이


장성 : 국경을 이루고 있는 긴 성
만리변새 : 먼 곳의 국경 요새
봉황성 : 중국 국경의 성
산해관 : 중국 국경의 관문
십만호병마 : 10만의 오랑캐 병사와 말
천추 : 평생
황천 : 하늘
성상 : 임금

이 몸이 장성(長城) 되야
만리변새(萬里邊塞)에 칼을 베고 누엇으니
봉황성(鳳凰城) 산해관(山海關)은
말발의 티끌이요
십만호병마(十萬胡兵馬)는
칼 끝의 풀잎이라
대장부 천추(千秋) 사업
이른 때에 못 이루고
그 언제 이뤄보랴
진실로 황천(黃泉)이 내 뜻을 아신다면
우리 성상(聖上) 근심 풀까 하노라

김충선은 '(5) 이괄의 난 때에도 큰 공을 세운다.' 1623년(광해 15) 인조반정 때의 공신 이괄(李适)은 논공행상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외아들 전(栴)이 모반 누명을 쓰는 상황이 벌어지자 1624년(인조 2) 반란을 일으킨다.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있는 항왜 출신들을 선동하여 전투력을 크게 키운 이괄에 밀려 한때 인조는 공주까지 도망가는 치욕을 당한다.

이괄의 난 진압에도 크게 기여한 김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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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친 인조는 두 그루 나무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두 그루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1708년(숙종 34) 정자 쌍수정이 건립되었고(사진에 원경으로 보임) 그 아래에는 인조가 이곳에 온 사실, 6일간 머물 때 있었던 일, 공산성의 모습 등을 새긴 '쌍수정 사적비'(유형문화재 35호)도 세워졌다. 사진은 쌍수정 사적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주변의 겨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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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54세의 노장 김충선은 이괄의 부장(副將)인 항왜 서아지(徐牙之)를 김해에서 참수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조정은 김충선의 대공을 인정하여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공신에게 내린 땅)를 하사한다. 김충선은 땅을 받지 않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바친다. 수어청은 임금(御)을 지키는(守) 관청, 즉 조선의 중앙 군영이었다. 임금 인조가 김충선을 얼마나 좋아했을지는 아래의 1628년(인조 6) 4월 23일자 <승정원일기>를 읽어보지 않아도 곧장 헤아려진다.

'김충선은 용맹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 때에 도망친 항왜들을 추포하는 일을 당시 감사가 모두 이 사람에게 맡겨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도 자원군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일구었던 김충선은 '(6)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운다.' 1636년(인조 14) 호란이 일어나자 아직 왕의 출전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는데도 66세나 되는 고령의 김충선은 곧장 한성으로 출발한다. 북향 중 왕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바로 광주 쌍령(雙嶺)에 진을 친 다음 경상좌우병영 군사들과 나누어서 청군을 공격한다.150여 명으로 조직된 선봉군을 이끈 김충선은 청군을 대파한다. 전쟁이 끝난 뒤 임금은 "김충선의 자손에게는 대대로 벼슬을 주고 복호(復戶, 조세나 부역의 면제)를 하라"고 조정에 지시한다.

김충선의 공로와 마음을 진심으로 추앙한 조선 선비들

전란이 모두 끝난 뒤 김충선은 다시 우록동으로 돌아온다. 일본에 갈 수 있는 몸은 아니었으니 그가 이때 우록동으로 돌아온 것은 '영원한 귀향'이었다. 그는 향약을 제정하여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을 북돋우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산골 선비가 되어 여생을 보냈다. '우흥(寓興)'은 그의 유유자적한 우록 생활을 잘 보여준다.

'우흥'의 어휘 풀이

기약 : 약속, 마음
황학봉 : 우륵동의 산 이름
선유동 : 우록동의 골짜기 이름
일일상대 : 매일 대하는
자양 : 주자가 살던 곳으로, 우록에도 자양이 있음
백록동 : 주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역시 우록에도 있음
현송 : 음악소리와 글 읽는 소리
한천 : 현재의 냉천을 가리킴
진심 : 세상 티끌에 물든 마음

산즁의 기약 두고 우록촌에 돌아드니
황학봉(黃鶴峰) 선유동(仙遊洞)은
일일상대(日日相對) 내 벗이요
자양(紫陽)과 백록동(白鹿洞)은
도(道) 닦는 마당 되어
자손의 현송(絃誦) 소리 들리난고
한천(寒川) 말근 물의
진심(塵心)을 씻어볼까 하노라

일본군 선봉장으로서 조선군 장군이 되어 22세부터 66세까지 45년 내내 전쟁터를 누빈 무장 김충선. 시와 문장을 짓고 향약을 마련하여 향촌 살리기까지 실천한 선비 김충선. 영조(1724∼1776) 말기에 이르러 조선의 유림들은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의 필요성을 임금에게 상소한다. 1789년(정조 13)에도 선비들은 재차 서원 건립을 청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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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원 강당과 그 오른쪽의 한일우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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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1794년(정조 18) 그가 살았던 우록동에 녹동서원이 세워진다. 녹동서원은 그후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전국 서원 훼철 때 화를 당하지만 1885년(고종 22) 영남 유림과 문중의 합심에 힘입어 재건된다. 일본인인데도 조선의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는 점에서 김충선은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귀화한 일본인을 기려 서원을 세우느라 진력한 이 땅의 유림들 또한 열린 마음을 가진 진정한 선비였다.

녹동서원의 정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陽)가 뜨는 남쪽 고향을 향(向)해 서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고향 일본과 두고온 가족들을 내심으로는 한없이 그리워했을 김충선의 고통을 조선 선비들은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2012년 5월, 녹동서원 옆에는 '달성 한일 우호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김충선의 평화 정신을 오늘에 되새겨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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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을 모시는 녹동사(녹동서원의 사당) 앞에 '김충선 장군 유적비'가 서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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