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함부로 욕하지 마라
‘가문’이라는 말에 일말의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다. ‘가문’ 앞에 ‘양반’이 놓일 경우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양반가문’이라고 하면 대체로 부정적인 어감을 띤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제의 식민사관이 가장 치중한 것은 ‘조선의 폄하’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은 실제보다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존재로 왜곡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호랑이 아버지에 개 같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아버지와 아들 2대가 둘 다 훌륭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도 조금 들어 있다.
그런데 한 가문을 평가할 때는 보통 3대 단위로 한다. 어지간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 3대는 3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대가 있다.
다시 처음 논의로 되돌아가서, 양반가문은 부도덕하고 무능했는가?
논의를 온전히 하려면 양반의 정확한 개념부터 밝힐 필요가 있겠다. 양반이란 신분 개념이 아니다. 조선시대 신분계급은 크게 보아 양인과 노비 둘뿐이었다. 이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면 양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비건, 농부건 심지어 노비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양반인 것은 과거 무과에 합격했기 때문이다.(29명 중 12등) 반면 과거 문과에 다섯 번이나 낙방한 이승만은 조선 양반이 아니다. 요컨대 조선의 양반이란 ‘공직자’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의병장 신용우는 조선 말 정2품 고관 출신이다. 그의 아들 신규식은 임시정부 창업의 제1공로자이고,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는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장을 지냈으며(민필호의 부친도 정2품 참찬), 민필호의 사위 김준엽은 학병 탈출 독립군이자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양반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정1품 출신 동농 김가진은 상해 망명 독립운동가이고, 그의 아들, 며느리인 김의한과 정정화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김가진의 다른 아들 김용한은 독립운동가였고 김용한의 아들 김석동은 광복군이었다. 양반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병장 허위는 조선 말 성균관 박사 출신이며, 2대 허형과 3대 허형식 모두 발군의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허형식은 중국 동북에서 김일성에 견줄 만한 무장투쟁가였는데 8.15 직전에 분사했다.
여기까지 국난기 이른바 양반가문의 모범 사례를 제시해 보았다.
반면에 조선시대 빈농 서민의 아들 이완용이 있었다. 이완용이야 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호사를 누렸다. 이항구는 1913년 매형 홍운표와 요정에서 술을 마신 후 전세택시에다 기생들을 태우고 돌아다니다가 어린이를 치는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다. 이완용 가문은 물론 양반가문이 아니다.
이완용뿐 아니라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된 최남선과 최린의 부친은 중인 계급인 의관 또는 의원이었고 이광수의 부친은 소작빈농이었다. 이 셋 다 양반가문이 아니다. 이들뿐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는 유달리 중인의 후손이 많다.
흔히 문학이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는 조의관 - 조상훈 - 조덕기로 이어지는 3대를 그린 가족사 소설이다. 이 셋 중 긍정적인 인물은 없다. 특히 조부 조의관은 천하의 상놈이다. 그나마 손자 조덕기가 합리적이고 온건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는 윤직원 - 윤창식 - 윤종수, 종학 삼대를 그린 소설이다. 이 중에서 윤직원은 조의관과 비슷한 ’상놈‘이고 윤종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인 인물들이다.
또 다른 가족사 소설로 알려져 있는 김남천의 <대하>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족사 소설이 아니며, 섣불리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인물(기실은 여종이나 탐하는)이 주인공일 뿐이고 작품 자체도 초입만 발표된 미완 제품이다.
왜 우리 문학은 긍정적 인물이 풍성한 양반가문은 전혀 만들지 않은 것일까?
이렇게 볼 때 왜곡된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 역시 식민사관과 동전의 양면 격인 자학사관에 침윤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삼대>나 <태평천하>를 우리 근대문학의 걸작으로 가르치고 배운다.
1592년 임진왜란 ~ 1636년 병자호란의 시기는 일제 침략기 못지않은 국난의 시기였다. 그때 오희문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장수현감으로 재직하던 사위를 방문하러 갔다가 임진왜란을 맞는다.
그는 3개월 동안 산속 생활로 겨우 목숨을 건진 후 가족을 만나, 무려 9년 3개월이나 전국 각지를 떠돌며 농사를 짓고(소작을 하기도 했다) 누에를 치고 심지어는 장사를 하면서 가정을 보전하고 자식 교육을 시킨다.
무엇보다도 오희문은 장장 9년 3개월 동안의 삶을 일기로 기록하여 <쇄미록>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남겼다. <쇄미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임진왜란 시기 걸작 기록물이다.
오희문의 아들이 오윤겸이다. 그는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오윤겸은 국난의 시기 조정을 보위하고 적서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 놀라운 인물은 오희문의 손자 오달제이다. 그는 홍익한, 윤집과 함께 삼학사의 일원이다. 우리가 알듯이 삼학사는 조국의 자존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재들이다. 오달제는 문과 장원 급제를 했고 병조좌랑을 거쳐 사간원, 홍문관 등에서 정언, 부교리 등 가장 선망 받는 청요직들만을 역임했다.
스스로 심양에 끌려간 오달제가 청 황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참형을 당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내가 알기로 오희문 가문은 가장 전형적인 양반가문이다. 양반 함부로 욕할 것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