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이 풍성한 토론정치를 보라- 토론 부재 한국 정치, 조선에 머리 박고 배워야

道雨 2016. 6. 8. 16:01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23
이 풍성한 토론정치를 보라- 토론 부재 한국 정치, 조선에 머리 박고 배워야
김갑수 | 2016-06-08 14:52: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풍성한 토론정치를 보라


- 최부 재임용을 놓고 벌인 난상토론(1)

 

지난 번 글, ‘어명이오! 그게 그토록 센 것이었을까’에서 우리는 중국에 표류해 갔다가 무사히 생환한 최부의 이야기를 읽었다.

최부는 성종의 명을 받아 <표해록>을 집필했다.

최부가 부모상을 마치자, 성종은 최부에게 사헌부 지평(정5품) 직을 제수했는데, 대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지점까지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했다.

 

일단 자기 뜻을 접었던 성종은 이듬해 봄 다시 최부에게 홍문관 부응교(정4품) 및 경연시강관을 제수한다. 경연시강관은 임금과 직접 대화하며 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간들은 최부를 공박하고 나섰다.

 

그러자 성종은 최부를 두둔한다.

“최부가 아비 상을 당하여 한양에 머문 것은 나의 명을 받들고자 한 것이다. 그는 아비의 죽음에 애통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최부는 재주가 있으므로 홍문관에 합당하니 다시 말하지 말라.”

이어 성종은 승정원에, “최부의 일을 이조와 병조에 자문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이조와 병조에는 각각 문관과 무관을 관장, 통제하는 권한이 있었다. 성종은 사헌부나 사간원에 의뢰할 경우 또다시 최부에 대한 논박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사전에 조정 중론을 찬성 쪽으로 조정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조판서 홍귀달이 이조의 의견을 취합하여 아뢰었다.

“최부는 왕명을 받들어 일기를 찬술했습니다. 아비 상전에 급히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 일부러 머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조판서 한치형도 비슷한 의견을 개진했다.

“최부는 중국 땅에 6개월이나 체류해야 했습니다. 상을 들은 지는 오래여서 처음 벽용(부모 죽음에 가슴을 치고 뛰면서 슬퍼하는 의식)해야 할 때와는 시차가 있습니다. 하물며 왕명을 받들어 일기를 찬술했으니 그 정상이 참작되어야 합니다.”

 

“듣고 본 것은 날이 오래 되면 점차 잊어버리기 때문에 내가 찬술하여 바치라 명령한 것이었으니, 최부의 정상은 용서할 만한 것이다.”

 

문제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경연 시간을 이용하여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성종은 일단 사헌부의 의견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상중에 친구를 접대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본직을 갈게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문관에서 최부를 옹호하고 나섰다. 같은 삼사라고 하더라도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물론 홍문관은 학문연구기관이지만 이따금 사헌부와 사간원을 견제하는 기능도 행사했다.

홍문관 직제학 송질 등이 성종에게 와서 아뢰었다.

“최부가 아비의 상중에 한양에 머무른 것은 슬픔을 잊어서가 아니라 군명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를 접대한 것은 최부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문하는 것을 사절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인물을 진퇴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관계되는 바가 있어 가볍지 않으니 청컨대 널리 중론을 채택하소서.”

홍문관은 양사의 논박이 너무 박정하다고 본 것이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내가 중론을 들어 보리라.”

그러나…

 


최부 재임용을 놓고 벌인 난상토론(2)


토론 부재 한국 정치, 조선에 머리 박고 배워야

 

이조와 병조 그리고 홍문관까지 최부 임용 방침에 찬성했음에도 사헌부는 반대의 뜻을 꺾지 않았다. 홍문관 직제학이 성종에게 다녀간 다음 날, 대사헌 이세좌 등이 왕에게 차자(약식 상소문)를 써 올렸다. 사태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최부의 분상 문제가 이제는 사헌부와 홍문관의 대립으로 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 신등이 생각하건대, 친상은 진실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예기>에 타지에서 친상을 당하면 구하는 바가 있어도 얻지 못하는 것같이 하고, 하루 백 리를 가더라도 더딘 것같이 여기며, 숙소를 옮길 때마다 고향을 바라보고 곡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최부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경계에 들자마자 마땅히 분상을 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입니다. 비록 일기를 쓰라는 군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장사 치르는 일을 먼저 마친 후에 서술하여 문서로 보냈어도 늦지 않았을 것입니다. -

 

성종이 상소문을 다 읽자 대사헌 이세좌가 들어왔다. 그는 높은 어조로 말했다.

“인물의 진퇴는 중대사입니다. 홍문관은 논사(論思)하는 지위가 있어 인군의 과실을 거론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동료의 일을 계청할 수는 없습니다. 신등은 그런 조짐을 자라게 할 수가 없으니 먼저 주창한 자를 추궁하게 하소서.”

대사헌은 최부 임용을 반대하는 수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직권을 넘어선 행동을 한 홍문관 관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성종은 사태가 염려스러웠다.

“최부는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상중에 빈객을 접견한 것은 옳지 못한 듯하여 내가 홍문관에 되물었는데 용서할 만하다고 하였다. 옛날 광장이 불효의 이름을 받았을 때 그것이 맹자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 일이라 하여 변호되지 않았느냐? 나는 중론을 따라 처리한 것이다.”

 

문신 사이에서도 이상한 알력이 있었다. 문학을 하는 문관과 학문을 하는 문관 사이에 다소의 이질감이 있다는 것을 왕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르랴 싶었다.

 

“근래에 문학을 하는 선비들이 서로 연계하여 감싸고도는데 그 폐단이 적지 아니합니다. 최부가 비록 지조가 있다고 하지만 대절을 해침이 이와 같다면 홍문관에서 그것을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마땅히 정리(情理)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 경들의 의견은 다른 조신들의 의견과 차이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다음 날에도 또 강력한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은 수미일관 최부를 통박하고 있었다.

왕은 그들의 말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엄격한 도덕적 기준과 명분 있는 처신을 사대부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왕이 시킨다고 해서 덥석 받은 것은 최부가 출세 지향적 사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잘못이 있다면 하명한 자신에게 있지, 최부에게 책임을 돌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5품의 신진 관리가 어명에 바로 이의를 제기하기란 불가능했을 터였다. 게다가 최부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허둥지둥 고국에 온 처지였다.

이미 아버지가 죽은 지 5개월이나 지났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었다. 왕은 성급하게 명을 내린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예 권력기관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확산될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왕은 국면을 정면으로 돌파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긴급히 전체 대신회의를 소집했다. 그러자 난상(爛商)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난상토론이란 말 그대로 주제에 대하여 세부적인 것까지 낱낱이 드러내며 충분히 숙의하는 토론을 뜻한다.

대신들은 주저 없이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왕은 그들의 발언들을 끝까지 경청했다.

 

“홍문관에서 아뢴 바는 다만 최부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긴 것이지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대의를 헤아려보건대, 이것이 폐단으로 굳어질 수도 있으니, 신은 사헌부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동료들이 서로 도우며 애로를 풀어주는 것은 비록 순후한 풍속이라 할지라도, 기강이 침탈되면 사후수습이 어려워질까 두렵습니다.”

“공론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만의 하나 사사로운 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장차 폐단이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헌부에서 아뢴 것이 이치가 있는 듯하나, 이번 최부의 일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그리고 홍문관에도 인사 권한이 있으니, 이 일은 사사로운 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임자가 마땅하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이 예전에는 대간들만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홍문관도 그리합니다. 전에 홍문관에서 어떤 사람을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받지 않았을 때 논박이 없었습니다. 부정의 권한이 있다면 긍정의 권한 또한 있는 것이니 홍문관 잘못은 아니라고 봅니다.”

“홍문관에서 아뢴 바는 최부 문제를 중론을 수렴하여 결정하자는 것이었지 동료를 변명, 구제하려고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중론이 최부를 비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왕은 차제에 털어야 할 것은 털고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대신들에게 더 발언하라고 촉구했다.

“경들은 빠짐없이 의견을 말하라!”

 

“신은 최부의 인간됨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초상이더라도 상복을 입은 후면 마땅히 조객을 대하는 법입니다. 성 밖에 우거하고 있을 때 조문 온 친구를 맞이한 것이 어찌 허물이겠습니까?”

계속 최부를 비호하는 발언들이 주로 이어졌다. 특히 동지중추부사 윤효손의 발언은 가장 설득력이 높았다. 그는 최부가 먼 후진이라서 직접 상면한 적은 없다고 전제하고서 말을 이었다.

 

“신이 남원에 살 때 최부는 나주에서 상례를 지키며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말로 최부가 경학에 밝고 행실이 좋은 데다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게으름이 없다고 하여, 신이 아들을 보내어 <주역>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아들이 전한 바에 의하면 최부는 항상 묘 곁에 있으면서, 아침과 저녁으로 반드시 친히 상을 차렸는데, 진실로 정성스러워 마을에서는 그의 효도가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또한 최부가 표박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분상도 못한 채 성 밖 여리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찍이 교분 있는 사람으로 누가 조문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최부 또한 어찌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최부가 만약 이로써 오명을 얻게 된다면 국가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오욕을 남길 것입니다.”

 

성종은 무리다 싶을 정도로 대신들의 발언을 더 촉구했다. 왕은 이 회의로써 최부 논쟁을 종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의 의견은 윤효손의 것과 같습니다.”
“신등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성종은 끝으로 반대의 선봉에 있었던 대사헌 이세좌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홍문관의 문제만 제기했을 뿐 최부 문제는 애매하다고 한 발 물러섰다.

이에 성종은 최종적으로 전교를 내렸다.

 

“지금 육조와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거의 들었다. 사헌부에서는 홍문관의 문제 주창자를 국문하자고 하였으나, 그들은 공의를 따라 한 것이니 나는 그리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번 대간들이 최부가 친구를 접대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기에 이미 그 뜻을 받아들여 최부의 서용을 보류한 바 있다. 중론이 어떠한지는 오늘로 확인이 되었으니 뒷날 마땅히 최부를 통용하리라.”

 

이렇게 하여 최부가 귀국 즉시 분상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시비는 끝이 났다. 성종은 최부를 서울로 불러올려 사헌부 지평 직을 제수했다.

 

조선은 관리 하나를 서용하는 데에도 이토록 신중하면서도 민주적인 절차를 밟을 줄 아는 나라였다.

언젠가 어떤 문화콘텐츠 사이트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이 최부 논쟁을 ‘궁중 암투’라고 명명해 놓은 것을 보았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이 어떻게 ‘암투’란 말인가?

조선을 나쁘게 말하면서 세련된 양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지식 문화인들의 병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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