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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언약 『처음처럼』

道雨 2016. 10. 20. 17:49

 

 

신영복의 언약 『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이란 부제가 붙은 『처음처럼』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신영복(1941~2016)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복역한 지 20년 20일만인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

저서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숲』, 『처음처럼』 등이 있다.

 

 

『처음처럼』은 신영복의 글과 글씨와 그림을 정성들여 편집한 책이다.

작가가 감옥에 있을 때 집으로 보낸 엽서 아래쪽 구석에 작은 그림이 앉아 있었다. 그 작은 그림들은 옥중 서신의 어깨너머 독자인 어린 조카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엽서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게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이 책은 '처음처럼'에서 시작하여 '석과불식(碩果不食)'으로 끝나고 있다.

필자의 일관된 주제는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경을 견디는 방법은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며,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省察)이 아닐 수 없으며, 나목이 잎사귀를 떨구고 자신를 냉정하게 직시하는 성찰의 자세가 바로 석과불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석과불식의 의미는 씨 과실을 먹지 않고 땅에 묻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처음처럼』의 책 내용 중에서 내 맘에 드는 것들을 다시 새겨보기 위해 골라보았다.

 

 

 

 

* 처음처럼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수(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상선약수).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째,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갑니다. 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 당무유용(當無有用)

 

그릇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양이나 무늬 등 그것의 유(有)에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비어 있음에 생각이 미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 군자여향(君子如響)

 

종소리처럼 묻는 말에 대답하며, 빈 몸으로 서고 싶습니다.

 

 

* 춘풍추상(春風秋霜)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정하게 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형평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인에게는 춘풍처럼 너그러워야 하고, 자신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대화와 소통의 전제입니다.

 

 

 

* 빈손

 

갖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

 

 

* 간장게장

 

'간장게장'에 관한 시를 발견합니다. 시제는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간장이 쏟아지는 옹기그릇 속에서 엄마 꽃게는 가슴에 알들을 품고 어쩔 줄 모릅니다. 어둠 같은 검은 간장에 묻혀 가면서 더 이상 가슴에 품은 알들을 지킬 수 없게 된 엄마 꽃게가 최후로 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그 시를 읽고 나서 게장을 먹기가 힘듭니다. 엄마 꽃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창랑청탁(滄浪淸濁)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어부의 노래에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 관한 오래된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이끌어 냅니다.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도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수 없다고 한 『서경』의 구절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나이테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 보호색

 

애벌레를 먹이로 하는 소조(小鳥)들은, 애벌레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재빨리 쪼아 먹습니다. 그러나 소조가 애벌레를 보는 순간 공포를 느끼거나 과거에 혼찌검이 난 경험이 연상되는 경우에는 일순 주저하게 되는데, 이 일순의 주저가 애벌레로 하여금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부모의 보호가 없음은 물론,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최소한의 무기도 없는 애벌레들은, 오히려 소조를 잡아먹는 맹금류 등 포식자의 눈을 연상시키는 '안상문'(眼狀紋)을 등허리의 엉뚱한 곳에 그려 놓고 있습니다. 

애벌레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궁리해 낸 기만, 도용(盜用), 가탁(假託)의 속임수들이 비열해 보이기보다는, 과연 살아가는 일의 진지함을 깨닫게 합니다.

 

재소자들의 문신은 대개 서툴고 조악합니다. 이런 문신이나마 넣는 이유가 벌레들의 문양과 다름이 없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감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바깥에서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 집 그리는 순서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 양말 향수

 

고통이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자기가 직접 부딪치고 짐 져야 하는 물리적인 고통은 차라리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이 되어 건너오는 경우, 그것은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쁨과 아픔의 근원은 관계입니다. 가장 뜨거운 기쁨도 가장 통절한 아픔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 치약 자존심

 

물질적 조건이 나아지는 것도 어려움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차라리 그런 것이 없더라도 떳떳한 자존심이 역경을 견디는 데 더 큰 힘이 된다.

 

 

* 축구 시합 유감

 

첫 번 빳다가 열 대 맞으면 줄줄이 열 대 맞습니다. 첫 번 빳다의 임무는 빳다 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 노랑머리

 

열악한 삶의 존재 조건에서 키워 온 삶의 철학을 부도덕한 것으로 경멸하거나 중산층의 윤리 의식으로 바꾸려는 여하한 시도도 그 본질은 폭력이고 위선입니다.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 물 탄 피

 

병원에 피를 팔기 전에 찬물을 양껏 들이켰던, 그리고 물 탄 피를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을 애써 숨기려는, 그의 여린 마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동생들의 끼니를 위하여 좀 더 많은 피를 만들려고 했던 형이고, 그리고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좀 더 많은 피를 남기려 했던 노동자일 뿐입니다.

나는 설령 그가 들이킨 새벽 찬물이 곧바로 혈관으로 들어가 그의 피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얻는 부당이득의 용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 여름 징역살이

 

가장 큰 절망은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로부터 옵니다. 증오의 대상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자기혐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더불어 숲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 화이부동(和而不同)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철학이 화(和)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동화하려는 패권의 논리가 동(同)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 우직함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 문사철 작은 그릇

 

우리는 두 개의 오랜 세계 인식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가 그것입니다.

흔히 문사철은 이성 훈련 공부, 시서화는 감성 훈련 공부라고 합니다.

문사철은 고전문학, 역사, 철학을 의미합니다.

 

 

* 가장 먼 여행

 

일생 동안의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과 마음 좋은 사람의 차이, 머리 아픈 사람과 마음 아픈 사람의 거리가 그만큼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발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삶의 현장입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공존하는 숲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 서삼독(書三讀)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 부부 등가물

 

문제는 부부 관계마저도 상대적 가치 형태로 인식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 가치로 판단하지 않는 우리의 의식 형태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인간관계마저도 화폐 가치로 인식하는 우리의 천민적 사고입니다.

상품사회의 문맥이 보편화되어 있는 경우 인간적 정체성은 소멸됩니다.

등가물로 대치되고 상대적 가치 형태로 존재합니다.

상품 사회의 인간의 위상이 이와 같습니다. 인간 역시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 세월호

 

하부의 중심이 든든해야 합니다. 하부는 서민들의 삶이며 그것을 지키려는 민중운동입니다.

이러한 서민들의 의지를 억압하고 상층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평형수를 제거하고 또 다른 세월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신호등

 

우회전은 언제든지 해요. 좌회전은 반드시 화살표를 받아서 가야 됩니다.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의 위상이 이와 같지 않은가?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 그림자 추월

 

경쟁과 속도는 좌절로 이어집니다.

그림자를 추월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부분에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학교를 떠나는 존 키팅 선생과, 책상 위에 올라서서 선생을 배웅하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서 더 멀리, 더 넓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입니다.

모든 시대의  책상은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치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독립'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변화와 저항입니다.

 

 

* 비아당사(非我當師)

 

나를 올바로 꾸짖어 주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를 올바로 인정해 주는 자는 나의 벗이다.  

                                                         - 『순자』

 

 

* 대교약졸(大巧若拙)

 

뛰어난 기교는 마치 어리석은 듯 합니다. 대교약졸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서도(書道)입니다.

어린 아이로 되돌아가는 환동(還童)을 서도의 으뜸으로 칩니다.

어수룩함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그렇게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격려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최고의 예술입니다.

 

 

 

* 엽락분본(葉落糞本)

 

봄을 위하여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 석과불식(碩果不食)

 

큰 과실(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그 봄을 위하여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 그런 생각이 드네요.

 

                                                                             - 어느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