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종북’과 결별하라
‘종북’(從北)이란 단어를 처음 쓴 건, 보수 세력이 아닌 진보 정당이었다. 진보 정당 내부에서 북한 외교정책을 우선시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의미로 ‘종북’이란 신조어가 나왔다.
과거에도 ‘친북’은 있었다. 민주화 투쟁에 나선 단체 또는 개인에 독재정권들은 걸핏하면 ‘친북’이란 딱지를 붙여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종북’은 ‘친북’에서 몇걸음 더 나간 말이었다. ‘북한 지시를 그대로 따른다’는 뜻이니, ‘북한과 가깝다’는 친북보다 훨씬 자극적이다.
보수 언론이 이걸 놓칠 리 없었다. 어느새 ‘종북’이란 단어는 보수 언론·정당이 진보 진영을 공격하는 무기가 됐다. 조자룡이 헌 칼 쓰듯, 보수는 ‘종북’이란 칼을 마음껏 휘둘렀다.
북핵 문제를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하자고 해도, 북한 아이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자고 해도, 심지어 ‘한반도 평화’나 ‘남북 단일팀’을 입에 올려도 종북 세력으로 몰렸다.
현 정부가 출범 이후 대북 평화정책을 추진하자, ‘청와대가 종북 주사파에 점령됐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 관훈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게 새 정부 출범 이후 금기사항이지만, 주사파가 청와대에 있지 않나. 대통령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지 않나. 친북이란 것도, 정책 자체가 그렇지 않나. 북한이 핵무기 만들고 있는데, 세계가 경제제재 하고 있는데 북한을 도와주겠다고 하니…. 주사파가 전향선언한 적 없지 않나. (현 정부 내 주사파가) 우리는 종북 좌파가 아니다, 이렇게 선언을 하든지….”
임종석 비서실장을 비롯한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과, 주사파와는 운동 노선이 정반대였던 조국 민정수석까지 싸잡아 ‘종북 주사파 세력’이라 비난하는 사설과 칼럼이 유력 보수 언론들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착각이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최근의 지방선거 결과는 보수의 이런 착각이 더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편견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길은 열린다.
보수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는 극우보수 세력의 해리성 장애 양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연사들은 북-미 정상회담과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하는데, 200명 남짓한 청중의 손엔 대부분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가 꼭 쥐어져 있었다.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내통’한 트럼프를 비난하면서도, 성조기는 버리지 못하겠다는 단심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럴 수 있다. ‘태극기 부대’는 자유한국당마저 기회주의라 비난하는, 보수의 맨 오른쪽에 위치한 그룹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그런 인식이 극소수가 아닌, 보수 주류와 오피니언 리더들의 생각으로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자유한국당 쇄신의 출발점은 ‘친박’이라는 버릴 돌을 골라내는 데 있지 않다. 김정은의 변화를 ‘적화를 위한 속임수’라 생각하고, 청와대부터 입법·사법·문화계까지 남한 전체에 ‘종북 세력’이 뿌리내렸다는 거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하다.
광화문 태극기 부대와 똑같은 사고를 하는 한 보수의 재건은 쉽지 않을 것이다. 성조기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 ‘종미(從美) 세력’은 있을지 몰라도, 유의미한 ‘종북 세력’은 우리 사회에 없다는 게 팩트이기 때문이다.
주사파 원조로 불리다 전향한 ‘강철’ 김영환씨가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과 김정은이 더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최근의 변화를 ‘북한 속임수’로만 봐선 보수가 살아나기 어렵다”고 말한 건 음미해볼 만하다.
주한미군을 ‘돈’으로 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를 비판할 수 있다. 동맹의 가치보다 현금을 우선하는 트럼프의 행동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보수 진영이 트럼프를 비판하면서, ‘미국은 한국의 진보 정부보다 훨씬 정직하고 믿음직한 영원불변의 혈맹’이란 믿음을 허물었으면 한다. 더이상 국내 집회에서 태극기보다 성조기가 물결치는 기이한 현상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유연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우파의 탄생을 보고 싶다.
성조기보다 먼저 버려야 할 건, 현실과 괴리된 허황된 이념의 칼이다.
풍차를 거인이라 생각하고 돌진했던 돈키호테처럼, 이미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중대한 위협이라 생각하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다.
보수는 ‘종북, 친북, 주사파’ 같은 말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9932.html?_fr=mt0#csidx9e3e6470fcddfc19ee5746daf3a2b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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