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러일 전쟁 4.발트함대의 대 출정

道雨 2018. 9. 17. 17:37







러일 전쟁 4.발트함대의 대 출정

 

                                                      헨리 정(정영진. 35회 재미 칼럼리스트)

 

 

 

 

여순항의 태평양함대가 완전 붕괴되기 몇 개월 전,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러시아 발트함대가 극동의 전세를 뒤집고 말겠다고 원정길에 나섰다.

황제 챠르 니콜라이 2세가 손수 Revel항에서 거행되는 출정식에 참가, 격려를 해 주었고, 먼 항해를 떠나는 환송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때는 1904년 10월9일.

그 거창한 출정은 좀 지나치기도 하고 그릇된 표현으로 세계 신문들의 지면을 요란하게 수 놓았다. 이 함대의 출동을 지켜보던 러시아 국민들과 세계인의 눈은 “일본 너 인제 죽었구나-”하고 여겼다.

 

북대서양을 떠난 함대의 항로는 스에즈운하를 통과하여 동 아시아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때 영국은 영일동맹의 파트너로서 일본 측 편이었기 때문에, 발트함대의 원정을 환영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에즈운하는 지금 수리중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측에 그 통행은 불가라는 통지를 보내었다.

그리고는 괜히 운하 양편 언덕에서 화약 터뜨리는 소리를 펑! 펑! 내며 새빨간 거짓말을 위장하고 있었다.

발트함대는 할 수없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구를 반 바퀴 돌만치 먼 거리로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28,000Km에 달하는 긴 항해를 8개월이나 걸려 떠 가던 그 긴 여정에는 경험 미숙, 지연, 생각치도 못했던 난관 등 많은 애로가 있었다.

전 국민의 명장으로 떠 받들던 마카로프제독이 사망한 후 러시아해군의 가장 탁월한 지휘자로 인정받던 로데스크벤스키 부제독(56)이 이끄는 이 함대는 그 승무원들이 대부분 비숙련, 농삿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의 사관 중 대부분이 경험 부족인 장교들이었다.

 

42대에 달하는 전체 함정 중 4척의 전함과 4척의 순양함은 비교적 새로 건조된 신형 함정이었으나, 나머지 함정들은 대단히 낡은 것들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데스크벤스키 제독과 그의 지휘관들은 그들의 출동은 꼭 승리를 앗아 올 것 이라고 자신했고, 그 전승의 꿈은 곧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우렁찬 출정은 처음 항해 때부터 삐걱 거리기 시작하였다.

기지를 떠난 지 1주일이 지나 신나게 항진해 가던 함대의 전방에 얼렁거리는 몇 척의 소형 선박이 시야에 들어 왔다. 대서양의 짙은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잡힌 그 선박들은 발트함대의 진로를 정탐하는 일본 정찰선으로 오인하고 함대에서 불을 품어 그 중 2대의 ‘적 선박’을 그 자리에서 격침시켜 버렸다.

적군 소탕을 한답시고 각 함정에서 쏘아 올린 함포가 같은 우군인 러시아함대의 순양함 갑판에 떨어져 피해를 입힌 오발 사고가 생겼다.

“무찌르자 일본군 몇 백만이냐~러시아 남아 가는데 ‘조개’로 구나~”하며 군가를 부르며 아무데나 쏘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적 초계정으로 여긴 그 작은 배들은 조업 중인 영국 어선 트롤선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에게 백배 사죄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래서 최강 영예를 안고 있던 러시아 발트함대는 전 세계로부터 ‘미친 개 같은 함대’(Mad dog fleet)라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들의 길고도 먼 여정은 느리고도 지지부진하였다.

함대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지나 동 아프리카 마다가스칼 섬을 지날 무렵, 그들의 행선지였던 여순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1905.1월)


황제 챠르는 그의 무적함대는 그 만한 규모라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해 나가리라고 생각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난관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함대가 아프리카 동해안을 항해 중 전 함대의 연료(석탄)가 바닥이 났다.

이 항해 작전에서 연료 공급은 독일의 한 협력 업체가 공급을 해 주기로 계약했으나, 그 계약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그 공급 회사가 “나 몰라-”하고 발을 내 밀었다.

 

그들의 행선지인 여순항이 함락되었다고 하니, 그 출정의 목적도 상실되고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블라지보스톡이다 하고 변경하고, 전투보다도 안전하게 자국 항구에 도달하는 것만이 소기의 목표였으며, 연료문제로 그 근처에서 2개월을 그냥 머물러야만 하였다.

러시아 본국에서는 10여척의 보급선을 추가로 보내 주었다.

그 배들은 요행이 영국 정부의 양해를 얻어 스에즈운하를 통과 할 수 있었고, 인도양 상에서 발트함대 본대와 겨우 합류하여 연료와 보급품을 조금 전달할 수 있었다.

이 대 함대가 항해 하는 중 연료(석탄)와 식량, 식수들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자체 조달할 수밖에 없는 상항에서 항해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로인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남지나해의 말레지아, 싱가포루 모두가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거기 어느 항구에도 기항을 허가받지 못하고, 겨우 프랑스령 월남의 캄란만에 도착하여 목마른 갈증을 해결 할 수 있었다.

즉 석탄,식료품,식수등을 겨우 구입하여 보급품을 배에 실었으나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블라지보스톡에 도착하기에는 충분치가 않았다. 그래서 거기에서 다시 90Km 떨어진 다른 항구 반퐁에 기항하여 좀 더 연료를 조달할 수 있었다.

 

5월17일 발트함대는 반퐁항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연해주 블라지보스톡항을 향해 떠났다. 그 항로는 세 갈레의 선택해야 할 옵션이 있었다.

대한 해협을 가로 지르는 최단거리, 일본 본도와 북해도 사이 협로, 북해도를 우회 하는 길.

그래서 <로>사령관은 도박과 같은 승부수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면 돌파다-, 대한 해협을 가로 질러 가는 것이다-”.

 

5월25일 발트함대는 한반도 남쪽 남지나해를 들어서며 속력을 낮추고 무선도 끊은 채 소리없이 북상을 계속하였다.

머나 먼 항해를 8개월이나 계속하는 동안 배를 몰던 장교와 수병들은 지칠데로 지쳤고, 그 전투력과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목적항인 블라지보스톡까지 항해하는 데는 연료가 모자랄 듯하여, 이때부터 함내에 있는 모든 목제가구(침대,책상,서랍등)는 모두 갑판으로 끌어 올려 땔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령관은 전투는 피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다만 빠져 나가는 것만이 희망이었다.

무장함대들이 맨 가상자리에 1렬 종대로 나아가고, 가운데 줄에는 비무장함대인 병원선, 보급선, 연료선등이 들어서 줄을 짓고, 다른 바깥 줄은 다시 무장 전함, 순양함들이 줄 지은 매머드 함대가 3렬 종대를 이루며 조심조심 대한해협에 진입하였다.

함정들에게는 모두 탐조등과 불을 끄게 하고 어둠 속에서 야간 돌파 작전을 편 것이다.

 

이때까지 마산만 앞에 진 치고 기다리던 일본 연합함대는 발트함대가 극동 지방에 접근하고 있을 것 이라는 짐작은 하였지만 도대체 어느 항로로 블라지보스톡에 향할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 삼일...진해 근처 남해에서 길목을 지키던 일본 연합함대는 초조하게 러시아함대를 기다렸으나, 어느 곳을 뚫고 지나 갈까는 캄캄한 상태였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대한해협에 나타 날 기미가 없으면 북해도 쪽으로 방어기지를 옮기겠다고 본국 정부에 타전을 보냈다.

 

5월 27일 새벽 2시45분, 일본 순양함 시나로마루호가 발트함대 병원선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밤바다에서 포착하였다.

이 정보는 곧 도고 사령 함대에 무전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다른 순양함 이즈미호는 이 병원선을 미행하며 그 해상 위치를 시시각각 보고했다.

잠에서 깬 도고 제독이 즉각 전 사령 참모를 불렀다.

도고 사령관 상항실에서는 러시아 발트함대의 항로를 드디어 알아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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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10 : 쓰시마해전 2,발트함대의 괴멸 
 


오후 1시30분 조금 지나,도고제독은 러시아군함의 밝은 황색과 흑색의 굴뚝을 발견했다.거대한 러시아군함들이 일본함대쪽으로 오는 순간,도고는 자기 함대의 항로를 즉각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그의 함대가 최초의 방향대로 전진한다면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러시아함대를 스치고 지나가 버릴 것이었다.
그러면 한 차례 포격을 교환한 후에 해전은 끝나버리고 러시아군함들은 저지받지 않은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항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도고는 일본함대에게 즉각 항로를 바꾸라고 명령했다
이 대담한 명령에 따라 일본함대의 군함들이 차례로 선수를 돌리는 동안 일본함대는 거의 15분이나 러시아함대의 포화에 노출되었다.
러시아함대는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을 곧 깨닫고 포격을 개시했다.
러시아함대의 미숙한 포수들은 미카사호에는 16발의 명중탄을 맞힐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포격은 목표에서 벗어났다.
선회를 완료한 일본함대는 러시아함대와 평행선을 그리며 항진했고,이내 러시아함대를 앞질러 러시아함대의 북진을 막아 버렸다.
러시아함대는 옆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함대의 정예포수들은 근거리에서 러시아함대의 선두를 달리던 수보로프,오슬랴바,알렉산더 3세와 보로디노 등 4척의 군함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일본함대는 속도와 포격술에서 우세했고,이내 그 차이가 전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던 일본의 회색 군함들은 눈에 잘 띄는 러시아의 군함 위에 타고 있던 미숙한 러시아의 포수들로서는 명중시키기 어려운 목표였다.
일본함대는 프랑스가 개발한 새로운 제조법에 따라 만든 강력한 시모즈화약을 보유하고 있어 이것이 또 하나의 결정적인 장점이 되었다.
이 화약은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에 폭발하면서 불꽃을 뿜었는데 이때 견딜 수 없는 열과 유독성 연기가 발생했다.
도고제독은 뒷날 쓰시마해전은 시작되고 겨우 한 시간쯤이 지난 시각인 그날 오후 2시 45분경에 이미 승패가 거의 판가름났다고 자랑했다.
이때쯤에는 이미 러시아함대는 완전한 혼란 속에 빠졌고 선두에 섰던 4척의 군함이 모두 직격탄을 맞은 뒤였다.
오후 3시 조금 지나,오슬랴뱌호의 함장은 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30분 뒤 이 거대한 군함은 옆으로 기울어지며 침몰했다.
이때쯤 로제스트벤스키의 기함 수보로프호는 사령탑이 폭파되어 큰 피해를 입고 전열에서 벗어나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자신도 포탄의 파편으로 머리에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작은 배로 옮겨졌다.
그러나 러시아함대의 2인자였던 니콜라스 네보가토프제독이 자신이 함대의 임시사령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여러 시간 뒤의 일이었다.
수보로프호 대신에 기함이 되었던 알렉산더 3세호의 함장은 서쪽으로 항로를 틀어 일본군의 포화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고의 군함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었다.
오후 6시경 알렉산더 3세호는 갑판이 불과 연기로 뒤덮인 채 전열에서 낙오되었다.
이 배는 오후 7시 조금 지나 9백명의 전승무원을 태운 채 침몰했다.
보로디노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그날 저녁 도고는 그의 전함들을 북쪽으로 돌려서 러시아군함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편 전함보다는 경량급인 구축함들과 어뢰정들은 밤새도록 러시아함대를 공격했다.
다음날 오전 늦게쯤에는 도고제독의 함대가 러시아함대의 남아 있는 군함들을 포위했고 네보가토프제독은 항복의 깃발을 올렸다.
그는 뒤에 이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러시아 최강 함대였던 발트 함대는 총 37척(전투 직전에 빠진 석탄 보급선 제외)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합해 19척(절반)이 격침되었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항복, 나포되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후방에 있던 순양함 3척과 기타 선박들이 도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운좋게 도착한 함정은 앞서 언급한 3척뿐으로 사실상 함대 전멸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기존의 태평양 함대가 입은 피해까지 생각하면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에 해군이라고 할만한 것은 흑해 함대가 유일했다. 인명피해도 커서 장교,사병을 합쳐  첨가한 전체병력의 절반 가까이 되는 4,800명이 전사했고 중상자도 많았으며, 포로도 약 6천여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은 달랑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이 전사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격침된 함정의 총톤수로 볼 때 이 해전은 2차대전의 거대한 해공 입체전을 제외한다면  오늘날까지도 최대의 해전으로 꼽힌다.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일본 전역은 전승 분위기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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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발틱 함대와 쓰시마 해전


 



특히 이 해전은 우리나라 진해 앞바다, 대마도 앞, 울산 앞, 동해 독도 앞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제독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사모했으며, 그 전술을 연구하여 정자전(丁字戰)으로, 그 유명한 러시아 발틱함대를 완벽하게 무찔렀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세계에 일본을 알리는큰 역할을 하였다.


만일 이 해전에서 일본이 이기지 못하였다면, 러일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고, 조선의 운명도 바뀌었을 것이다.



결론부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나누어져있던 발틱함대의 응집력이 부족하였으며, 영국과 일본의 동맹으로 영국의 식민지를 통과하지 못한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톡까지 집결하는 시간이 반 년이 걸리며, 많이 지칠때로 지쳐있었으며(석탄보급, 사기 저하등), 일본의 첩보력과 도고제독의 전술 이른바 이순신장군의 정자전을 완벽하게 연구하여 실전에 활용한것이다.



서양에서는 이 전술이 도고제독의 전술인줄 알고 있는데, 이 전술은 우리의 이순신장군이 만들어 놓은 해전 전술이였다.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경로. 거의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았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주력함대를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이동시키는 일은 당시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함대의 대부분이 증기선이기에 항상 석탄공급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시로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또한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했으나, 러시아는 이들 항구와 운하를 지배한 영국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1904년 10월 21일 일본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러시아는, 북해에서 일어난 도거 뱅크 사건에서, 러시아 해군은 영국 어선을 일본 수뢰정으로 오인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스페인에게 러시아 발틱함대에 보급을 하지 말라는 압력과 함께, 영국 식민지 항구에도 발트함대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사실상 수에즈운하 통과도 일부 함대만 가능하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제2 태평양함대 주력은 아프리카대륙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았고, 함대는 마다가스카르 섬의 노스베항에서 합류했다.



이후 인도양에서는 러시아의 우호국 항구는 매우 적었고, 동맹국 프랑스에게도 냉대를 받아 약 반년간의 항해는 피로가 극에 달했고, 사기도 매우 저하되었다.

제2, 제3 태평양함대는 190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캄란 만에서 합류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목표로 항해를 시작했다.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본 도고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전투지점





도고 제독은 쓰시마 해전에 임하기 전에 " 이 해전에 의하여 황국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근엄한 말로 이 해전에 임하였다.



쓰시마 해전은 1905년 러일전쟁 중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트 함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노급전함을 주력으로 한 함대가 정면으로 격돌한 최대의 해전이었다.

일본해군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트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전,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함대를 동원한다. 하지만 일본 해군보다 3배나 많은 함대를 보유하면서도, 각지역에 흩어진 러시아 함대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흑해함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때문에 출동이 불가능했기에, 출동 가능한 함대는 태평양 함대밖에 없었다.


러시아 해군 사령부는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제독이 이끄는 발트함대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제독이 이끄는 제3태평양함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는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황해 해전울산 해전에서 격파해 무력화 시킨 뒤, 발트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발틱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 해협이었다.


러시아 함대에 비해 세력이 열세인 일본 연합함대는 이중 1곳에 전력를 집중시켜야 했다. 일단 2곳은 거리상 및 기뢰에 의한 방어가 튼튼했기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는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거라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5월 14일 발틱함대가 캄란항을 출항했으나, 5월 19일부터 소식이 묘연했다. 발틱함대의 진로를 알 수 없게된 일본 연합함대는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발틱함대가 태평양에서 홋카이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대반전은 일명 '정(丁)자전법' 혹은 '도고 턴'의 개시였다.


러시아 함대는 전함, 순양함의 대부분을 침몰 혹은 나포당해, 대부분의 전력을 이 해전에서 잃어버렸다. 일본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대함대끼리의 해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차가 이렇게 크게 난것은 별로 없었기에, 해전사 역사상 매우 보기 드문 승리였다.

이 승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할 시 일본에게 매우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 러시아 박틱 함대와 일본연합 함대의 피해



- 러시아 함대 : 격침 16척(전함 6척, 기타 10척), 자침 5척, 나포 6척, 중립국 도피 6척, 자국항 도착 3척(순양함 아르마즈, 구축함 브라브이, 크로즈누이)

승무원: 전사 4,830명, 포로 6,106명


- 일본함대 : 침몰 3척(수뢰정 3척), 승무원 : 전사 117명, 부상 58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