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제주 4.3 항쟁 이전의 비극이자, 4.3 항쟁의 시작. <화순 칸데라 1946>

道雨 2019. 4. 3. 17:45




4.3 항쟁 직전에 일어난 비극... 미군의 '끔찍한' 만행

[리뷰]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 칸데라 1946> 제주 4.3 항쟁 이전의 4.3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70주년을 맞이했던 지난해 제주 4.3 항쟁 추념식에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가 초대 받았다.

왜 제주에 '화순'의 이야기가 담긴 뮤지컬이 초대된걸까?

이에 대해 제주 4.3 추념식 본부는 "'화순 광부 학살 사건'으로 기억되는 화순 10월 항쟁이야 말로 4.3 이전의 4.3, '4.3 항쟁'의 시작"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왜 '화순 사건'이 4.3의 시작인 것일까?

지난 2일 KBS 1TV에서 방영된 특집 다큐 <화순 칸데라 1946>은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순에 찾아온 해방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945년 해방 무렵 전남 화순 지역에는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탄광이 있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터전을 일구며 살던 이곳에도 해방은 찾아왔다. 일제가 남기고 간 탄광, 노동자들은 '자주 관리' 체계를 통해 나라의 석탄 자원을 원활한 공급을 위해 노력했고, 나아가 노동조합 조직인 '전국 평의회'가 이의 관리를 이어 받았다.

이들은 '해방된 나라의 노동자가 할 일은 열심히 생산하는 것'이라는 기치 아래 의기투합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2500여 명 노동자는 한 달 기준 석탄 7~8000톤 정도를 생산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1300여 명 노동자가 1만3000톤을 초과 생산하는 기적을 일구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10월 일본군 대신 동남아시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보병 부대가 '또 다른 점령군'으로 능주 초등학교에 주둔했다.

왜 하필 '능주'였을가?

능주 치안대가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오합지졸'이 된 일본군에게 무장 해제한 일을 문제 삼아, 당시 미군은 화순 지역을 관심 지역 혹은 위험 지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앞서 미군은 1945년 10월 일본이 남긴 재산, '적산'은 조선 군정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당연하게도 '화순 탄광'처럼 우리가 스스로 '관리'에 들어간 공장, 탄광도 '불법'으로 여겼다.

1945년 11월 미군은 탄광 접수를 공표했고,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24시간 이내 떠날 것을 요구했다. 임금 투쟁 등 노동 쟁의를 벌이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게 될 것이라 협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원 감축을 핑계로 100여 명을 해고했다.

당시 미 군정청의 책임자로 부임한 하지 장군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남한에 대해 "불만 대면 터질 화약통"이라며 "자신이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가장 자리에 있다"고 표현했다. 미군이 당시 남한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미 군정청의 결정에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반발했다. 해방 후 비로소 우리의 나라, 우리의 공장이라는 '해방 공간'이 하루 아침에 '또 다른 점령군'에게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이들은 1946년 2월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를 실시하라' 등을 내걸고 싸웠다.

해방 1주년, 피로 물든 너릿재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그렇게 싸움을 지속해 나가던 중 1946년 8월 해방 1주년이 다가왔다.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은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너릿재'를 넘어가고자 했다. 탄광 노동자와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와 아이들까지 1000명이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대열이었다. 그러나 미군과 경찰은 장갑차와 총칼을 앞세워 대열을 저지했다. 30여 명이 학살을 당했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과 경찰의 무차별적 탄압에 맞선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본의 앞잡이'였던 이들이 다시 탄광에 들어와 자신들을 탄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이에 더해 '심각한 식량 사정'은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더욱 불살랐다.

미군은 통치를 시작하며 일제가 하던 '쌀 공출' 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방식에 맞춰 쌀의 자유시장화를 위해 1945년 10월 '조선 미곡 자유 판매'를 실시했다.

당연하게도 대혼란이 빚어졌다. 당시 자유 시장 제도에 부응할 수 있었던 건 일제에 협력했던 대지주나 중급 이상의 지주, 미곡상들 뿐이었다. 매점매석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몇 개월 만에 쌀값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결국 미군은 다시 공출, 배급제로 회귀했다.

하지만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의 "네 홉 주던 걸 세 홉으로 줄이다니, 하루도 못 버틸 양으로 닷새를 버티라니. 배때지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못 살겠어"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배급량은 턱도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당장 굶어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쌀을 달라"며,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며 1946년 10월 다시 광주로 향해 나섰다.

화순의 10월 항쟁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그 들불의 최종 귀착지는 제주도였다.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946년 11월 4일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당했고, 화순 탄광 폐쇄령이 떨어졌다. 6일에는 75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11일에 경찰서를 공격하던 노동자들 중 3명이 사망했다. 결국 그해 말 화순 탄광을 중심으로 했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군의 노동자들은 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화순 주변 지역 산에서 '화탄 부대'가 되었고, 이들이 바로 빨치산의 시초라 추측된다. 또한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산으로 가 '소년 부대'가 되었다. 결국 조정래의 대하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빨치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본주의를 섣부르게 이식하려 했던 '점령군' 미국이었다.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방송에서 국사학자 정용욱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촛불 항쟁에 비유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과연 모두 좌익이나 빨갱이여서 그 자리에 나갔나. 아니지 않나. 촛불이라도 하나 밝혀야지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의 상황도 비슷했을 것이다." 

해방된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고 싶었던 마음,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받고 싶었던 마음,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생존의 절규가, 바로 너릿재 고개를 넘던 대부분의 이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1TV 특집 다큐멘터리 <화순칸데라 1946>의 한 장면ⓒ KBS

 


화순, 제주 4.3, 그리고 이어진 여순 사건까지, 우리의 역사는 그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2009년 오봉옥 시인은 <붉은 산 검은 피>를 통해 비로소 역사의 행간에 묻혔던 화순 사건을 세상에 드러냈다. 자신의 큰아버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쓴 시였다.

그러나 오봉옥 시인은 '이적 출간물 출간'이라는 이유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아야 했다.


이제 제주 4.3 71주년을 맞았다.

늦었지만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선, 역사의 행간 속에 묻혀 있던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복기해 내야 할 것이다.



이정희(ama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