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독립운동위해 만주로 망명간 구미 임은 허씨가문의 여성들

道雨 2019. 12. 10. 11:12







독립운동위해 만주로 망명간 구미 임은 허씨가문의 여성들
왕산 허위 일가에서 만주로 망명한 여성들
뉴스프로 | 2019-12-09 13:32:36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910년 나라를 잃자 경북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 망명대열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석주 이상룡(독립장)의 부인 김우락(애족장) 여사, 며느리 이중숙 여사등 임청각의 여성들, 백하 김대락(애족장), 일송 김동삼(대통령장) 일가의 부인과 며느리 손부 손녀딸 그리고 구미의 왕산 허위(대한민국장) 일가의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항일투사와 가족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 여겼고 이들은 만주에서 서로 혼인 관계를 맺으며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중 구미 출신 왕산 허위 일가에서 만주로 망명한 여성들의 기록을 찾아 본다.


왕산 허위는 성균관박사,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에는 오늘날의 대법원장 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어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송사를 처리하여 큰 칭송을 얻었으며 나중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대통령비서실장)의 지위에 오르면서도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정면으로 맞섰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1만명이 넘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일제 통감부를 치기 위해 서울진공작전을 결행한다.

결국 그는 매국노 이완용의 체포령에 의해 일제 경찰에 잡혀, 자신이 일하던 평리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908년 10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왕산이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뒤 구미 임은동 그의 집안은 의병장 집안으로 낙인 찍혀 헌병과 밀정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렸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왕산의 셋째형 허겸(애국장)은 1912년 대대로 살아오던 경북 선산 구미 임은동을 뒤로 하고 제수인 왕산의 부인 평산 신씨와 아들과 두 딸까지 동반하여 서간도로 망명길에 오른다.

왕산의 사촌형제인 허형과 허필(건국포장) 일가도 몇해 지난 1015년 그 뒤를 따라 모두 만주로 갔다.



왕산가

범산가

왕산 허위 일가에서 만주로 망명한 여성들



만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1915년 음력 3월 신천지를 찾아 나서는 수십명이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서, 김천시 남면 부상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 도착해, 배 네척을 구해 압록강을 보름 동안 수로여정을 거처 회인현 화전에 도착했다.


독립운동가문 집안을 따라 만주로 망명간 특히 만주 망명 여성들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3중의 무거운 과제를 떠안았다.

1세대 독립운동가의 지원, 가족들의 호구지책 마련, 거기다 함께 간 어린 자녀들을 민족 앞에 쓸 좋은 동량으로 길러내야했다.

남자들이 독립운동을 하느라 몇해씩 집을 떠나고 또 왕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만주에서 까지 추적을 당하는 신세가 되니 왕산가 집안의 여성들은 만주에서 모든 험한 일을 떠 맡아야만 했다.


독립운동이 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여성의 도움 없이는 반세기 이상 긴 세월동안 독립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라며, 만주로 망명간 여성들의 독립운동사 연구 영역을 확장할 것을 여성계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안동 임청각 종부 3대 관계도



만주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경북의 여성들은 수없이 많지만, 안동 임청각의 항일투사가족을 지켜낸 허은(애족장)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육사와는 고종사촌간이며, 나중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3군 군장이 된 허형식 장군은 두살 적은 당숙이었다.

임청각 종부 3대 김우락 여사, 이중숙 여사, 허은 여사의 가계도를 보면,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독립운동가 집안과의 혼맥이 연결되어 있다.


1908년 10월 구미 임은허씨 가문의 기둥인 왕산 허위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왕산의 형제들과 종형제 그리고 맏아들 허학등은 만주 망명을 의논했다. 그리고 허위 일가의 망명을 주도한 사람은 성산 허겸이었다.


허겸은 자신의 부인 송씨와 제수(왕산의 부인 신씨)와 허위의 맏아들 허학(애국장), 셋째 아들 허준과 그의 부인 손기옥등을 데리고 1912년도 경 만주로 먼저 떠났다.

이때 허위 차남 허영과 막내 딸 허혜경 그리고 맏 며느리인 박노숙은 국내에 남겨진다. (박노숙은 달성 하빈의 박팽년 집안의 딸이다)

그리고 1915년 성산 허겸이 만주에서 구미 임은동으로 돌아와 사촌인 허형과 허필등 가족과 하인 일부를 데리고 만주로 향한다.


범산 허형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안동 도산면 원촌리로 시집간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을 제외하고 모두 망명길에 올랐다. 왕산가와 범산가의 며느리와 딸 손자며느리 등이 같이 만주 망명길에 오른것이다.


 



이들은 수륙만리길을 거처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 이후에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 돌아 다녔다. 그 기록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가 된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자세히 나온다.

그 회고록에는 구미 임은동을 떠나 나중 만주에서 ‘독립군의 어머니’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한 내용과 국내로 다시 돌아 올 때는 구미가 아니라 안동 임청각으로 귀향한 이야기 등이 대하드라마 같이 펼처진다.


허은 여사의 회고록을 내용에 나오는 만주로 간 왕산가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찾는다.  

허은 여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이자, 한말 의병장이던 왕산 허위 집안의 손녀이다. 8살 때인 1915년 가족들을 따라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녀의 고모이다. 16세가 되던 1922년, 허은은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했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만주로 망명간 구미 임은동 왕산가의 여성들의 삶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엔 왕산의 부인 신씨와 허학의 부인 박노숙 그리고 시조모인 석주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 여사, 시모 이중숙 여사등에 대한 이야기도 숱하게 나온다.  


큰 올케(이은기- 허발의 장자 허채의 부인)는 만주 오기 바로 전해(1914년) 안동 예안에서 구미 임은동으로 시집왔다. 땅뙈기나 있을 때였으니 큰집 며느리 본다고 아버지(허발) 형제분들이 있는 힘껏 정성을 다해서 혼수를 마련해 주었었다.

홍갑사,청갑사 치마에 저고리는 모보단으로 하고 패물도 갖추어 했다. 만주와서 먹을 것이 없으니 형님(이은기)이 소지하고 있던 그 채단 치마저고리 두벌, 나비잠, 매화잠, 은가락지들을 십 리 밖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에게 가서 팔았다. 은전 얼마를 받아 와서 그걸로 양식을 사먹었다.

그 형님(이은기)는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열다섯에 시집와서 일년 만에 그것들을 처분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새색시가 결혼 때 받은 귀중한 것을 없앴으니 눈물이 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만주에 도착한 후 통화현 다황거우에 오십리 떨어진 진두허로 다시 이사를 가서 농사를 짓다가 토질이 안 좋아 다시 왕산댁 가족을 찾아 만리거우로 이사를 가는 장면에 왕산의 셋째 며느리(손기옥) 이야기 나온다.  

 

남자들은 독립운동 하느라고 바깥일에만 전념하니까 그집도 나무 하나 해다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재종 백모님이 되시는 왕산댁 셋째 며느님(손기옥)이 밥을 지으려고 동네에서 짚을 얻어다 불을 때셨다.

짚에도 얼음이 얼어서 떡장 같았다. 마르지도 않은 생나무를 때자니 불은 안 붙고 연기는 매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백모님께서 그래도 또 그 불을 살려 밥을 지었다. 눈물로 지은 밥을 얻어먹고 이튿날 계속해서 이사가는 목적지로 향했다.

눈물 흘리며 밥해주셨던 그 백모님(손기옥 – 왕산의 3남 허준의 부인)께서 언젠가 당신 시아버님인 왕산 어른에 관해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인품이 훌륭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도 아주 잘 생기셨다고 했다. 이마도 훤하게 잘 생기시고 눈은 그리 크지 않으나 눈 깊숙이 어디선가 빛이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어른께서 길을 나서시면 길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임은에 시집와서 얼마 모시지 못하고 왜놈에게 교수형을 당하셨으니 그 훌륭한 어른을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는 말씀도 하셨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만주에서 1919년까지 자활과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수십만의 이주교민을 보호하고 수천 명의 애국청년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진 자치단체 조직과 관련해서 여성들도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는데 여기에 왕산의 부인 신씨 이야기가 나온다. 

 

부민단(扶民團)을 처음 창설한 것은 성산(허겸) 어른이었다. (…중략) 성산 할아버지가 식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새 단체 이름을 뭘로 하면 좋을까?” 라고 하셨다.

옆에 계시던 왕산 할머니(왕산의 부인 신씨)께서 “부민단(扶民團)이 어떻겠습니까?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으로”라고 하자 다들 좋다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2대 단장은 석주 어른이 했다고 들으니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도 의미가 깊은데다 만주 땅에 세운 부여민족, 즉 우리민족의 단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하셨다.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대한민국장) 홍범도(대통령장) 장군의 대승 이후 일본군이 만주 한인을 상대로 보복으로 대학살을 감행했다. 이른바 경신참변이다. 경신참변을 피해 애국지사들과 그 가족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우리도 왕산댁 허학 재종숙(왕산의 장남)이 영안현 철령허로 오라 하기에 또 그기로 이사했다. 영안현은 철령허에서 칠십리 길이고 모란강(목단강)은 철령허에서 오리 쯤 떨어져 있다.

허은 일가는 철령허 정거장 근처에서 자리잡고 할아버지(범산 허형), 아버지(일창 허발) 어머니(이산운) 작은 오빠내외 여섯 식구가 자리잡고 살았다.

그곳에서 작은 오빠(허현)의 첫애기(허법)가 태어났고 만주와 한국을 드나들며 군자금을 모으던 숙부 일헌 허규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범산은 셋째 아들의 소식을 듣고 상심 끝에 별세하고 말았다. 72세의 나이로 정든 고향 구미 임은동 떠나 만주로 망명간지 7년만에 79세의 나이로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범산의 장자 허민은 당시 군부주사로 근무하고 내각 지제교를 역임하였는데, 명필로 이름이 나서 고종의 어명으로 명정전(明政殿)과 명정문(明政門)의 현판을 썼다. 범산 일가가 만주 망명 몇해 전 칠곡군수로 부임 명령을 받았는데 갑자기 급사했다. 어의[御醫]가 독극물에 의한 죽음이라 말했고 일제가 독살시켰다는 설이 떠돌았다.

사랑하는 맏아들을 그렇게 잃고 72세의 나이로 만주로 떠난 범산은 막내 아들도 일경에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그의 묘는 만주 흑룡강성 목단강시 사도구 자전산에 있다.  



허은 일가가 살았던 흑룡강성 목단강시 철령하 거리,  옛날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사진/ⓒ전병택)

허은 여사 가족이 철령하 기차역 정거장 부근에 살았다는 희미한 기록만 가지고 철령하 거리를 끝과 끝을 몇번이나 오가면서 그 흔적을 찾았으나 100년이 다 지난 세월에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목단강시에서 철령하로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 표지판이 있다. 이 표지판 맞은편에 독립투사들을 수감하여 고문한 액하감옥이 있다. (사진/ⓒ전병택)  



허은은 영안현 철령허에서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식을 올렸다.  


새로지은 지은 집은 방이 네개 였다. 결혼식은 큰데서 하느라 먼저 살던 학교 강당에서 했다. 오랜만에 대소가 친척들이 다 모이고 이웃 교민들도 다 모이니 훈훈했다.

왕산 가족들도 이웃에 살았고 도성이 엄마(강신복, 왕산의 둘째 며느리 (※ 허경성의 모친)도 한국에서 들어온 지 일년 밖에 안 된 딸 둘을 데리고 우리 이웃에 살고 있어서 모두 참석했다.


결혼식 후 허은여사는 영안현 철령허에서 화전현 완령허로 이천팔백리길의 시댁으로 향한다. 그 길에는 아버지(일창 허발), 시아버지(동구 이준형.애국장) 신랑(이병화. 독립장) 그리고 허은 네명이 동행한다.

허은 여사의 아버지 일창 허발은 이육사의 큰 외삼촌으로, 이육사의 항일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육사 시인이 큰 외삼촌 일창 허발에게 만주에서 일창한약방을 경영하며 독립군자금을 모아 준 큰 외삼촌에게 고마움을 담아 보낸 수부선행 휘호  



시댁으로 가는 길은 부산에서 신의주 쯤 되는 거리의 길이다. 그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며 항일투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의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던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홉살 어린 나이로 허씨 집안의 일원으로 구미 임은동을 떠나 풍찬노숙하며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고 임청각의 종부가 되어 스물여섯의 나이로 안동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삶도 만만치 않았다. 1945년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은 이루어졌으나,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독립운동세력은 어처구니없게도 탄압과 홀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편마저 유명을 달리하자,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 갔다. 그 와중에도 임청각을 지키며, 고립무원의 지난한 처지에서도 좌절을 딛고 일어서 7남매를 올곧게 키우는 데 힘썼다.

허은여사는 시할아버지 이상룡, 시아버지 이준형, 그리고 남편 이병화로 이어지는 3대가 독립운동을 벌이는 것을 적극적 으로 뒷바라지한 독립운동가이다. 허은같은 여성이 없었으면 고성 이씨 3대의 독립운동은 켤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의 생계는 포기한 남자들을 대신해 농사를 짓고, 독립군을 위해 조석(朝夕)을 준비하는 것은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부인, 며느리, 딸의 몫이었다.


왕산의 부인 평산 신씨(1863~1929)는 남편 왕산 허위가 순국할 때 45세의 나이였다. 고관대작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살았을 텐데 남편의 순국으로 인해 도망치듯 임은동을 떠났다.

1912년 49세 때 시아주버니 허겸,아들 허학, 삼남 허준, 허준의 아내 손기옥과 서간도 망명을 결행했다.이때 차남 허영과 막내딸 허혜경 그리고 맏며느리인 허학의 부인 박노숙은 국내에 남겨두었다. 이들은 1915년 뒤따라온다.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신씨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몇군데 나온다.  


그 전에 유하현 우두거우에 살고 있을 때 내 열한 살 때인데 종숙질(허형식)이 매일 만나 새를 잡아다가 큰집 할머니 (왕산 부인)께도 갖다 드렸다. 할머니는그걸 정성껏 장만해서 양념해서 할아버지 두 형제분 (성산과 범산)께서 잡수시도록 해 드렸다.

그 할머니는 선비댁 마님인데도 채전도 잘 가꾸셨다. 애호박이 처음 열리면 5리나 떨어진 우리집에 가져 오셨다. 손으로 칼국수를 밀어서 봉지 안에 싸가지고 와서 새로 연하게 올라온 파도 송송 썰어 넣어 할아버지 두 분께 끓여 드렸다. 지금도 칼국수 봉지 들고 집에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신씨 부인은 서간도로 북만주로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랑의 삶을 살다가 1929년 66세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15년 만주로 간 이후 망명 사회의 든든한 안주인으로 큰 버팀목이 되었을것이다.


왕산의 맏며느리 박노숙(1888~1979)은 순천박씨 박팽년의 후손으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출신이다. 왕산 일가가 만주로 떠날 때 국내에 남겨졌기 때문에 1916년 이후에 도만했을것이다. <고종이 평리원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 등에 임명한 칙명과 왕산의 유언서등 중요한 문서를 허학의 처가에 맏겨두었다가 해방 후 다시 찾아왔다.>

만주로 온 박노숙은 길림성.흑룡강성.연해주 등지에서 활약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허학은 망명전 21세의 나이로 부친 허위과 함께 의병전쟁에 참전했으며 1913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급활동을 펼쳤다.

이 일로 1914년 매부인 왕산의 사위등 54명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등이 북만주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신민부(新民府) 참의원으로 활약했다.





허위의 2남 허영과 3남 허준은 영안현 해림진 산시역 앞에 있는 백야 김좌진과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았다. 허준의 아들 허광배,허웅배,허환배 이름을 김좌진 장군이 직접 지어준 것이다. 배달 나라의 영웅과 빛이 되어라는 뜻이다. 허위의 3남 허준은 영안현 해림진을 중심으로 김좌진,김규식,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허준은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총무부장 또는 경리부장을 맡으면서 백서농장을 관리할 때 부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서간도의 서로군정서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을 때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왕산의 장손자 허경성(93)옹의 부친 허영은 흑룡강성 영안현 산시에서 김좌진 장군과 같은집에서 살았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1925년 무렵 왕산의 맏며느리 박노숙은 남편 허학과 시동생 허준, 허국 가족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여기에서 허학의 둘째 딸 허로자가 태어났다.

그들은 농업으로 생계를 꾸리며 살던 중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그해 9월 10월 사이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약 23만명과 같이 시베리아 횡단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졌다.


박노숙은 남편 허학(애국장)과 10대의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강제 이주 열차에 올랐다. 막내 시동생 허국의 가족도 함께였다.

허국의 부인(이후석)은 석주 이상룡(독립장)의 손녀다. 이준형(애국장)과 이중숙의 셋째 딸로 열한 살 어린 나이로 만주로 와서 17세 무렵 왕산 허위의 넷째 아들 허국과 혼인하였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한 후의 삶은 만주 망명 보다 더 처절했다. 스탈린 정권이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 2,500명을 숙청하거나 처형하였는데 박노숙의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어 1941년 동서 이후석 마저 42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로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남자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리고 버티던 막내 숙모(이후석)가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결국 병으로 죽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의 집으로 시집가서 모질게 버텼지만, 끝내 카자흐스탄에서 주검이 되었다.

99칸 대저택인 안동 임청각 셋째 딸로 태어나 모진 망명 생활 끝에 그리던 고향 가족들과는 영영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삶을 산 것이다.

또한 그 힘겨운 세월을 살아낸 박노숙은 1979년 92세의 나이로 머나 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왕산 허위의 부인 신씨와 맏 며느리 박노숙과 더불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허위의 맏딸 양주댁이다. 양주댁은 허위의 첫째부인 순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 허위와 함께 의병전쟁을 펼친 이기영(애국장)에게 시집갔다.

시댁이 경기도 양주에 있어 양주댁이라 불렀다. 이기영은 허위 순국 후 만주로 망명했다가 1913년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고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양주댁은 이후 아들 이강준을 데리고 친정을 따라 만주로 망명갔다. 왕산의 맏딸 양주댁은 아들 이강준과 주하현, 목단강 철령허, 연해주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30년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사람들은 이렇게 고난의 삶을 살았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또는 남편이 독립전쟁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명망높은 고관대작의 부잣집 가문 출신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을 이들은 가문 전체가 가시밭길의 길을 걸었다. 



왕산 허위 일가의 만주 망명 생활 주요 경로(서간도애서 북만주 그리고 연해주까지) (사진/ⓒ장기태)  



왕산가, 범산가 후손들 중 경북 구미로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도 없으며, 그 후손들은 아직도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도 각양각색이다.


가장 고난을 겪은 대한민국 3대 항일 가문인 왕산 허위가문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구미시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 선양사업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허은 여사는 그나마 회고록을 남겨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회고록을 남길 기회조차 갖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나 어머니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숙제다. 여성 독립운동가 서훈에 대한 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구 달성공원내 8M 거리를 두고 세워진 석주 이상룡의 구국 기념비와 왕산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는 이 두 가문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으나 달성공원에 오는 시민 대부분이 기념비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 의미를 모르는 시민들은 더욱 많다. (사진/ⓒ전병택)



안동 임청각의 3대 종부 허은 여사의 회고록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허은 여사의 구술을 받아 기록한 변창애는 서울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국어선생으로 30여년간 재직했다.

그녀의 남편이 바로 허은 여사의 숙부 일헌 허규의 아들 허술(許鉥)이다. 허술(許鉥)은 이육사와는 고종사촌이 된다.

기록한 변창애는 그와 서울대 국어국문과 동창으로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시누이 허은의 서간도 망명의 삶과 임은 허씨 일가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시댁인 안동 임청각 가문의 항일 투쟁사를 구술받아 기록으로 남겼다.


※ 일헌 허규는 해방 후 김규식(金奎植) 안재홍(安在鴻) 여운형(呂運亨) 장건상(張建相)등과 입법의회 의원을 지냈다.



참고문헌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 허은

경북독립운동사 –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만주로 간 경북 여성들 – 한국국학진흥원 강윤정

목숨바처 나라를 사랑한 선비 왕산허위 – 권대용 교수

허형식 장군 – 박도

의병장 왕산 허위 일가의 항일투쟁 – 경상북도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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