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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주요 연표(이순신 중심)(음력)

道雨 2020. 9. 3. 11:00

임진왜란 주요 연표(이순신 중심)(음력)

 

 

@ 임진왜란 이전

 

154538: 이순신 출생, 서울 건천동(현재는 인현동)에서 출생(양력 428)

1552? : 어머니의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함(8).

15658: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과 혼인. 영의정 이준경이 중매.

* 1522(중종 17)에 치러진 식년 사마시에서, 이준경과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 그리고 이순신의 처조부 방국형, 이 세 사람이 모두 생원시 동방(同榜 :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기생들)

15672: 아들 회() 출생

15712: 아들 열() 출생

1572? : 훈련원 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여 결국 낙방

15762(32) : 식년 무과에 급제

12: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9)

15772: 아들 면() 출생

15792: 훈련원 봉사(8)

10: 충청절도사 군관

15806: 발포 수군 만호(4)

15811: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됨

5: 다시 풀려나서 훈련원 봉사(8)

15837: 함경남도 절도사 이용이 위에 보고하여 공을 자기 부하(군관)로 삼음

10: 건원보 권관(9). 오랑캐 울지내를 유인책으로 잡아 죽임.

11: 훈련원 참군(參軍)(7), 아버지 덕연부원군 사망.

15861: 사복시 주부(6)로 임명되었으나, 북쪽 오랑캐들의 난리로 조선보 병마만호(4)

15878: 녹둔도 둔전관 겸임

9: 녹둔도 전투 : 추수하던 중 오랑캐의 기습으로 피해를 봄.

10: 북병사 이일에 의해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해임·투옥되며, 이일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1588? :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

1588년 윤6: 집으로 돌아옴. 조정에서 무신들을 천거.

15892: 전라순찰사 이광이 공을 불러 자기 부하(조방장)로 삼음.

11: 선전관 겸임

12: 정읍 현감(6) : (권준-순천부사, 배흥립-흥양현감, 어영담-광양현감, 신호-낙안군수 등 함께 발령)

15907: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3)로 임명되었다가, 대간들의 반대 상소로 말미암아 그대로 눌러 있음.

8: 만포진 수군첨절제사(3)로 임명되었으나, 대간들의 반대 상소로 그대로 눌러 있음.

15912(47) : 진도 군수(4)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또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3)에 임명되었고, 또 부임하기 전에 다시 올려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에 임명됨.

15923: 거북선을 만듦.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함.

412: 거북선에서 현자, 지자 대포를 쏘아봄.

 

 

 

@ 임진왜란 발발 이후

 

1592. 4. 13 : 왜적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4. 14 : 부산진성 전투. 정발 전사. 왜장 고니시

4. 15 : 동래성 전투. 송상현 전사. 왜장 고니시

4. 18 : 밀양성 함락. 박진 도주. 왜장 고니시

4. 19 : 김해성 전투. 서예원 도주. 왜장 구로다

4. 21 : 경주성 함락. 박의장 도주. 왜장 가토

4. 24 : 상주 전투. 이일 패주. 왜장 고니시

4. 27 : 탄금대 전투, 신립 전사. 왜장 고니시

4. 29 : 광해군을 세자로 세움.

4. 30 : 선조는 새벽에 한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름. 저녁에 임진강 도착, 밤에 도강.

5. 3 : 왜군 한양 입성

5. 7 ~ 6. 11 : 선조의 평양 체류 기간.

 

1592. 5. 4 ~ 5. 9 : 이순신의 1차 출동 : 판옥선 24, 협선(중선) 15, 포작선(소선) 46. 85

좌수영-소비포(1)-당포(1)-송미포(1)-옥포(해전)-영등포-합포(해전)-남포(1)-적진포(해전)-당포(1)-좌수영

5. 6 : 당포에서 경상우도(원균) 수군(판옥선 4, 협선 2)과 합류

5. 7 : 옥포해전 : 왜군 함대(도도 다카도라) 30여척 포위 공격. 왜선 26척 격파. 조선군의 첫 승전.

합포해전 : 이동 중인 왜선(5)을 합포까지 쫓아가 5척 모두 격파.

5. 8 : 적진포해전 : 정박해있던 왜선(13)을 공격, 11척 격파.

 

1592. 5. 16 : 해유령(양주)전투 : 부원수 신각이 한강방어선에서 철수 후, 해유령(양주)에서 왜군(가토 휘하)의 선발대 70여명을 기습하여 전멸시킴. 조선 육군의 첫 승리였음. 신각은 적병 60여명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으나, 김명원의 장계(전장 이탈)로 인해 처형되었다. 신각의 승리 소식이 늦게 전해졌고, 조정은 신각의 참수형 집행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선전관을 통해 보냈지만, 이미 신각의 목이 잘려나간 이후였다.

5. 17 ~ 5. 18 : 임진강전투 : 왜군의 유인작전에 말려 도강하였다가, 가토군의 기습으로 패전. 신할, 유극량, 김여율 전사.

5. 20 ~5. 25 : 왜군 임진강 도강

 

1592. 5. 29 ~ 6. 9 : 이순신의 2차 출동 : 거북선(2~3) 최초 출전, 판옥선 23, 전라우도 수군(이억기) 합류,

좌수영-사천포(해전)-모자랑포(야간)-사량도(1)-당포(해전)-창신도(1)-추도(1)-착량(1)-당항포(해전)-말우장(1) 율포(해전)-온천량, 송진포(1)-증도-송진포(1)-당포(1)-미조항-좌수영

5. 29 : 사천포해전 : 선진리 왜성과 장사결진(長蛇結陣), 거북선 최초 출전, 이순신 부상, 13척 격파.

6. 2 : 당포해전 : 왜선 20여척 격파. 큰 배(층루선) 9, 중소형 12.

왜란 발발 후 처음으로 왜장(가메이 코레노리)의 목을 벰.

왜장의 금부채 노획(도요토미가 왜장에게 준 것)

6. 4 :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판옥선 25(협선과 포작선 약 50여척 따름)을 거느리고 합류. 연합함대 구성.

6. 5 ~ 6. 6 : 당항포해전 : 왜선 33척 격파. 왜선을 유인하여 쌍학익진으로 사방포위작전.

1척만 남겨놓아 왜군의 탈출을 유도한 후 이를 섬멸함.

6. 7 : 율포해전 : 율포에서 부산 쪽으로 도망치는 왜군 선단을 쫓아가 7척 모두 격파

 

6. 3 ~ 6. 5 : 용인 전투 : 전라(이광), 충청(윤선각), 경상(김수) 삼도 근왕군 5만이 와키자카 군에 대패.

6. 11 : 선조 평양성을 떠나 영변으로 향함.

6. 14 : 광해군 분조 : 선조가 요동으로의 망명을 염두에 두고 의주로 피난 가는 도중, 본국에 남아 있을 조정으로 분조를 설정하고, 영변에서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관장하게 함. 광해군은 평안도·황해도·이천 등지에서 7개월간 분조활동을 하다가 행재소에 합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분조활동을 호위했던 사람들을 위성공신으로 책록했다.

6. 14 ~ 6. 15 : 왕성탄 전투 후 평양성 함락.

6. 22 : 선조 의주 도착.

7. 7 ~ 7. 8 : 웅치전투 : 정담(김제군수), 이복남(나주판관), 황박(의병) 등이 진안에서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안코쿠지 : 고바야카와의 부장)을 맞아 방어전을 폈으며, 정담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 측이 패했으나, 왜군도 큰 타격을 입었으며, 웅치를 넘어 전주성 가까이 안덕원까지 왔다가, 남원에서 돌아온 황진(동복현감) 군의 공격(안덕원전투 : 웅치전투의 연장)을 받고 패퇴하여 물러남.

7. 8 : 이치전투 : 금산에서 전주로 진출하려는 왜군(고바야카와)을 권율(나주목사), 황진(동복현감)이 격퇴.

7. 9 ~ 7. 10 : 금산전투(1) : 웅치에서 안덕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진산(금산군 진산면)에 주둔하고 있던 고경명이 79일에 호남 의병을 거느리고, 웅치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던 왜군의 근거지였던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다음날 순절함. 고경명(의병장), 고인후(고경명의 둘째 아들) 전사

 

1592. 7. 6 ~ 7. 13 : 이순신의 3차 출동 : 전라좌우도, 경상우도 수군 연합함대

좌수영-창신도(1)-당포(1)-견내량,한산(대첩)-해간도(1)-온천도(칠천도,1)-안골포(해전)-김해,감동,몰운대-가덕도-가조도(1)-한산도-좌수영

7. 4 : 여수에서 이억기 함대와 합류.

7. 6 : 좌수영 출발, 남해도 노량에서 원균 함대와 합류

7. 8 : 한산대첩 : 견내량에서 왜선단(와키자카) 유인, 쌍학익진으로 포위 섬멸. 59척 격파, 14척 도주.

양국간 최초의 본격적인 해전(양측 합쳐 2만여 명)에서 일방적 승리.

7. 10 : 안골포해전 : 일본 해군장관 구키 요시다카는 수비전으로 일관. 왜성(안골포), 밤을 타 도망감.

왜선 42척 격파.

7. 11 : 낙동강 하구(김해, 감동)와 몰운대까지 와서 무력시위.

 

1592. 7. 17 : 평양성전투 : 명군 조승훈 평양성 공격했다가 패주.

7. 27 : 영천전투 : 권응수(의병장) 등 의병들이 영천성의 왜군을 화공전으로 공격하여 수복함.

8. 1 : 청주성전투 : 조헌(의병장), 영규(승장) 등이 청주성 수복.

8. 18 : 금산성전투(2) : 조헌(의병장), 영규(승장) 전사. 칠백의총(七百義塚).

 

1592. 8. 24 ~ 9. 2 : 이순신의 4차 출동. 전라좌우도, 경상우도 연합함대로 왜군의 후방기지인 부산을 공격.

좌수영-관음포(1)-사량도-당포(1)-거제도-(야간항해)-원포(1)-김해강,양산강,장림포(해전)-가덕도(1)-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초량목,부산포(해전)-가덕도(1)-좌수영

8. 24 : 전라좌우도 연합함대가 좌수영에서 출발.

8. 25 : 원균 함대 합류

8. 29 : 장림포해전 : 왜선 6척 격파.

9. 1 : 화준구미(5), 다대포(8), 서평포(9), 절영도(2), 초량(4),

부산포에 약 500여척의 왜선들이 정박. 조선군의 함포 공격에 왜군은 왜성(부산진성)과 소굴(참호), 방파제, 선상에서 방어. 녹도만호 정운 전사. 왜선 100여척 격파.

9. 2 : 연합함대 해산 및 복귀

 

 

8. 28 ~ 9. 2 : 연안성전투 : 이정암이 의병을 모집, 비어있던 연안성을 접수, 왜군(구로다)의 공격을 물리침.

9. 7 : 경주전투 :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물리치고 경주 수복.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 최초 사용.

10. 5 ~ 10. 10 : 진주대첩 : 진주목사 김시민. 38백여 명의 관군과 성내 백성이 힘을 합쳐 8배가 넘는 왜군을3만여 명의 공격을 물리침(1차 진주성전투). 외곽에서는 전라도(곽재우)와 경상도(최경회)의 의병들이 교란 및 지원.

목사 김시민은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전투 중 이마에 적탄을 맞아, 며칠 뒤에 사망함.

12. 11 : 독성산성 전투 : 권율(광주목사)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던 중, 독성산성에 들어가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왜군(우키타) 2만여 명이 공격을 했으나 패퇴함.

 

1593. 1. 6 ~ 1. 8 : 평양성전투 : 명나라 이여송 제독 군대가 평양성의 왜군(고니시)을 공격하여 탈환. 왜군은 이여송의 묵인 하에 새벽에 성을 빠져나감.

1. 27 : 벽제관전투 : 왜군의 기습공격으로 이여송군 패퇴.

2. 12 : 행주대첩 :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권율(전라도 관찰사)의 군사 2,300여명이 의병(김천일), 승병(처영)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3만여 명의 왜군(우키타, 고니시, 구로다, 이시다)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함. 충청수사 정걸의 수운 보급.

 

1593. 2. 6 ~ 4. 3 : 이순신의 5차 출동

좌수영-사량도(1)-견내량-온천도(칠천도)-웅천포-소진포(1)-웅천포-(산발적 전투 계속)-안골포,제포 상륙전-사화랑-송진포-칠천량-사화랑-칠천량-걸망포-사량도-여수 귀항

2월초 ~ 4월초 : 웅천포해전 : 2개월에 걸쳐 웅포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을 수차례 공격. 상륙작전 병행.

 

4. 20 : 한성 탈환 : 명과 왜의 강화회담으로 하루 전에 왜군이 한성을 비워주자, 명군이 한양에 입성하였으며, 명군은 황제의 방침에 따라 퇴각하는 왜군의 추격과 공격을 금지시킴.

 

1593. 5. 7 ~ 1597. 3. 5 : 이순신의 6차 출동 : 견내량 막아서기 작전

명군 최고사령관인 경략 송응창은 왜와의 협상 직후 조선 수륙의 장수들에게 전투금지령을 내렸으나, 선조는 수륙의 장수들에게 총 진군령을 내림. 전라좌우도, 경상우도에 충청수사(정걸)도 합류.

616일부터 왜선의 숫자가 800여 척으로 급격히 늘어나자, 지금까지의 웅천, 안골포에 대한 공격에서, 견내량을 막아서는 수비전으로 전략을 바꿈. 한산도에 주둔. 왜장 구키는 10여 차례 유인전을 도모.

1593. 6. 21 : 한산도 이전 :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김.

 

1593. 6. 22 ~ 6. 29 : 2차 진주성 전투

남해안에 웅거한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10만의 병력과 선박 800여 척을 동원하여 진주성에 대한 보복공격을 감행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내의 군민 7만여 명을 모두 죽임.

충청병사 황진(전사), 경상우병사 최경회(투신), 창의사 김천일(투신), 의병 복수장 고종후(투신), 초유사 김성일(병사), 기타 의병장 다수.

당시 명은 왜군의 진주성 공격은 협정 위반이라며 항의하였지만 묵살당했고, 고니시는 성을 비우고 나가는 게 낫다고 조언했고, 조선군(권율, 선거이, 곽재우 등)마저 중과부적으로 판단하여 철수하였으며,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충청병사 황진 및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김천일, 고종후 등)들은 조정과 명군의 권고와 일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촉석정충단비, 창열사. 논개(최경회의 후처)와 의암(사적비),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 3장사(三壯士 : 김성일, 조종도, 이로). 호남 3장사(삼절사 : 황진, 최경회, 김천일) + 고종후(황진 대신).

호남에서는 삼장사를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라 하고, 속전에는 최경회, 김천일, 황진이라 한다.

2백여 년 동안, 영남 삼장사와 호남 삼장사의 엇갈린 주장.

 

 

1593. 8. 8 : 이여송 귀국 : 명군 3만 명을 이끌고 귀국.

 

1593. 8. 15 :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교지는 109일에 받음). 본직(전라좌수사)은 그대로 수행.

 

1594. 3. 4 : 2차 당항포해전 : 견내량 막아서기 작전 중, 견내량을 넘어 공격, 왜선 수송선 31척 격파.

진해에서 나와 이동하던 왜선 10척 중, 읍전포에서 6, 어선포에서 2, 시구질포에서 2척 등 모두 격파. 이어서 당항포에 정박해있던 왜선 21척 격파. 이 전투 후 명 담종인 도사의 패문(왜적 토벌 금지 명령)을 받음.

 

9. 29 : 장문포 해전 : 왜군 선봉 2척 격파.

윤두수와 원균이 기획 추진한 수륙합동작전이나, 태산명동의 서일필로 끝난 실패한 작전이 되어, 윤두수는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원균은 충청병사로 감.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도 참가했다가 돌아감.

 

1594. 11 : 유정 귀국 : 명군 15천 명 이끌고 귀국.

 

1597. 1. 13 : 정유재란 발발 : 가토 200여척 이끌고 다대포 도착.

 

2. 6 : 이순신을 잡아오라는 선조의 밀명이 내려짐.

이순신 모함세력 : 윤두수, 윤근수, 김응남, 김응서, 이산해, 김수

이순신 옹호 : 유성룡, 이원익, 정탁, 이정형

1597. 2. 26 : 이순신 파직 및 압송 :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요시라-고니시의 반간계에 속은 조정에 의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됨.

34일에 옥에 갇히고, 3월 중순에 혹독한 국문을 당함.

41일 석방되고, 권율 도원수부로의 백의종군 길에 413일 모친상을 당함.

427일 순천 도착. 금부도사 돌아감.

64일 합천군 초계(권율 도원수부) 도착. 718일까지 머물며, 권율 도원수의 군사 고문역 수행함.

 

1597. 7. 15 ~ 7. 16 : 칠천량 패전(원균) : 야간에 왜군의 기습으로 조선군 함대 전멸.

원균은 춘원포에서 왜군에게 죽고, 이억기는 바다에 투신.

단지 배설(경상우수사)이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도망. 한산도 진을 불태움.

7. 22 : 배설(경상우수사)로부터 칠천량 패전의 경과를 듣다.

1597. 8. 3 :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이순신은 상중임에도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교지(임명장)와 유서(諭書 : 명령서) 받음.

이후 선조는 원균을 두둔하던 대신들을 멀리하고(김응서는 백의종군),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중도적 인재들을 중용했으며, 수군의 작전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고 이순신에게 일임함.

 

1597. 8. 12 ~ 8. 15 : 남원성전투 : 조명연합군(양원, 이복남)이 지키고 있던 남원성을 왜군(우키다, 고니시 등) 58천 명이 공격하여 함락시킴. 조명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조선과 명나라는 남원성에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000명의 군대가 들어오고,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부사 임현 등이 함께 지키고 있었다.

15일 밤에 일본군은 명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 동문을 점령하였다.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생승선 등이 전사했고, 북문을 지키던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여 자결했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만이 50기의 부하만 데리고 탈출하였으며, 조명 연합군 4000명과 7000명의 남원성의 군민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남원성전투는 1593년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맞먹을 만큼 군, , 민이 함께 싸우다 희생한 전투로, 사후에 이곳에 죽었던 장수들을 기리는 충렬사에 배향했고, 시체들을 모아 만인의총도 세웠다. 만인의총은 여러 번의 이장 끝에 198141일 다시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1597. 8. 15 : 보성 열선루 :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선조의 교지를 받고, 전선 12척으로 싸우겠다는 장계를 올림.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가를 짓고, 쓰고, 읊다. 제목은 閑山島歌, 시의 첫머리는 寒山島.

        * 이순신의 친필 글씨는 정유년 중추(仲秋 : 8월)에 쓴 것으로 되어있으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한산도 시절에 지은 것으로 생각됨. 

8. 18 ~ 8. 19 : 회령포(장흥 회진항)에서 배설의 판옥선 확인 및 인수.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게 함.

                  임금의 교서와 유서에 예를 다하지 않는 배설의 오만한 태도를 징치함(배설 대신 영리에게 곤장을 때림).

8. 20 : 진을 이진(梨津 : 해남 이진항)으로 옮김.

8. 28 : 어란포 해전 : 정유재란 이후 왜군 선발대와의 첫 교전. 왜선 패퇴.

8. 29 : 벽파진에 도착. 92일에 배설이 도망침. 그 후 배설은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잡혀 처형당함.

9. 7 : 벽파진 해전 : 왜선 30척이 다가오기에 나가 맞아 싸우니, 왜선은 도망감.

이후 야간에 4번의 야습을 물리침.

9. 15 :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김. 명량(울돌목)을 지키기 위해 진을 옮김. ‘必死卽生 必生卽死

9. 16 : 명량대첩 : 13척의 판옥선으로 330여 척의 왜군에 대승을 거둠. ‘神算의 해전

왜군 선두의 133척을 격파, 왜장(구루시마)의 몸을 토막 내어 장대 높이 내걸음.

 

* 왜군 선봉장 구루시마 : ‘돌격전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는 해군장수로서, 그의 水營이 왜국의 울돌목으로 일컬어지는 야쿠보 해안에 위치해 있어, 명량(울돌목)에서의 해전의 적임자였고, 임진년 당항포 해전에서 검은색 왜군 함대를 지휘하다 전사한 왜장과는 친형제지간이었기에 각오가 남달랐음.

 

* 명량 해전의 진행과정 및 대승 이유

1) 왜장 구루시마는 거북선의 용머리포 또는 일시집중타에 맞아 초전에 바다로 굴러 떨어졌다. 이순신은 구루시마를 건져 올려 토막을 낸 후 뱃전에 걸어 왜군들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도록 했다.

2) 잇달아 구루시마의 직할 선단마저 화염에 휩싸이자, 거기에 타고 있던 3천여 명(중형 왜선 31x 100)의 왜군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해협은 허우적대는 왜군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3) 불탄 왜선들은 마침 조류가 바뀌자, 후방의 왜선단 속으로 떠내려갔다. 이는 적의 배를 불 질러 적의 함대를 불태우는 방식인데, 그 시점 또한 절묘했다.

4) 왜군 측에는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5) 반면에 조선 함대에는 공격 명령이 내려졌으며, 요란한 군악소리에 맞춰 수병들 모두 신들린 듯 공격하였다.

6) 왜군들은 귀신같은 이순신이 부근 섬 어딘가에 복병 함대를 숨겨놓고 퇴로마저 끊고서 공격해 오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7) 육지와 진도 양쪽에서 강강술래의 노랫소리와 군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8) 때마침 공포의 조류 유속 16km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얼이 빠져서 달아났다.

 

15979~ : 왜군은 순천에 왜교성을 쌓음. 12월에 고니시 군 15천 명이 입성하여, 1년여 간 주둔.

 

1597. 9. 16 ~ 10. 28 : 진을 옮겨 다님. 당사도-어외도-홍농-위도-고군산도-법성포-우수영-보화도

10. 14 : 아들 면()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음. 면은 어머님(이순신의 부인)을 모시고 아산 본가에 가있다가, 왜적들이 여염집을 분탕질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싸우다가 복병의 칼에 찔려 길에서 죽음.

 

1597. 10. 29 ~ 1598. 2. 16 : 고하도 통제영 : 보화도(목포 고하도)에 진영을 설치.

11. 16 : 선조가 은자 20냥을 상으로 하사. 명나라 장수 양호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냄.

선조가 일찍이 요시라에게 하사한 은자는 80냥이었음.

11. 17 : 명나라 경리 양호의 초유문(招諭文)과 명황제의 면사첩(免死帖)을 받음.

* 초유문 : 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러운 조건으로 용서한다는 포고문.

* 면사첩 : 죽음에 처하지 않게 할 것임을 약속하는 증명서. 황제만의 권한.

 

1597. 12. 23 ~ 1598. 1. 4 : 1차 울산성 전투 : 조명연합군이 울산 왜성의 가토 군과 13일간 교전한 후 물러남.

초반에는 적을 고립시키는 작전으로 우세했으나, 공방전이 길어지면서 왜의 구원병들이 도착하므로 철수. 조명연합군 약 5,800, 왜군 약 6,000몀이 전사. 이후 가토는 서생포성으로 후퇴.

 

1598. 2. 17 : 고금도 통제영 시대 : 보화도(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진을 옮김.

7. 16 : 명 수군 합류 :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수군 5천 명을 데리고 왔기에, 큰 잔치를 베풀음.

7. 24 : 절이도해전 : 녹도만호 송여종이 10여척의 왜군을 격파. 왜선 6척과 적의 수급 69개를 가져왔는데, 이를 진린 도독의 공으로 돌려 진린의 체면을 세워주었으며, 송여종의 공적은 사실대로 장계로 보고함.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칭찬하는 글을 올림. “통제사는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 있습니다.”

 

1598. 8. 18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사망

 

9. 17 ~ 10. 11 : 사천 왜성 전투 : 중로군으로 명군(동일원 제독) 34천 명과 조선군(정기룡 경상병마사) 22백 명이 사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군(시마즈 요시히로 : 1만 명)을 공격했으나,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

동일원은 명 황제의 명령으로 1117일 다시 사천 왜성으로 진격했으나, 시마즈 군은 본국의 철군명령과 순천 왜교성에서 농성 중이던 고니시 군의 요청에 따라 노량으로 떠난 후임.

 

9. 15 : 장도해전 : 순천 왜교성 앞의 장도 왜군기지에 있던 왜군의 군량을 빼앗아오고 남는 것은 불태움.

 

1598. 9. 20 ~ 10. 7 : 순천 왜교성전투 : 서로군 명군(유정) 26천 명, 조선군(권율, 이광악) 1만 명과 조명연합수군(진린, 이순신)의 합동작전으로,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군(병력 15천 명, 선박 500여 척)에 대한 공격.

사도첨사 황세득(이순신의 사촌 자형)이 전사(102).

명의 육군(유정)2~3일간 싸우다가 퇴각(106). 조명연합 수군도 물러남. 이후 왜군의 철수를 감시, 견제.

육지와 바다 양쪽 모두 퇴로가 막힌 고니시는 명군(유정,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작전을 펴면서, 사천의 시마즈에게 구원 요청하였고, 시마즈는 철수 준비를 하던 부산, 김해 일대의 왜군들에게 지원 요청하여, 300여 척 규모의 고니시 군 구원 선단 편성.

 

9. 22 ~ 11. 18 : 2차 울산성 전투 : 동로군으로 명군(마귀 제독) 24천 명, 조선군(김응서) 55백 명이 왜군(가토) 1만 명과 전투. 수비에 전념하던 가토는 울산성을 불태우고 서생포와 부산을 거쳐 왜국으로 돌아감.

 

1598. 11. 19 : 노량해전 : 조명연합함대 250여 척(조선군 8천 명, 명군 13천 명)이 왜교성 앞 바다에서 노량으로 이동. 시마즈의 함대와 야간 전투를 치름. 혼전 중 진린 함대가 시마즈의 직속선단을 관음포로 몰았는데, 다른 왜선단이 시마즈를 구하기 위해 진린 함대의 뒤를 공격하니, 진린이 위험에 빠져 구원신호를 올렸고, 이순신도 진린을 구언하러 관음포로 들어가 북을 치며 독전하던 중, 왜군의 조총에 겨드랑이를 맞고 죽음.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의 임종을 지켜본 아들 회()와 조카 완()은 명령에 따라 북을 치고 독전기를 휘날리며 지휘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이 숨을 거둔 그날, 고니시는 여수와 남해도 사이를 지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순신의 영구는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12월에 아산으로 옮겨졌고, 이듬해 2월 매장되었으며, 그로부터 16년 후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기록이 남겨 있지 않은 유일한 해전이다.

 

1598. 11. 26 : 왜군 부산포에서 완전 철수. 왜란 종결.

 

 

 

@ 이순신의 사후

 

1598(선조30) 12: 이순신 사후 우의정으로 증직됨

1599(선조31). 2. 11 : 충남 아산 금성산 아래에 안장함.

1604(선조37) : 선무공신 1, 덕흥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좌의정으로 추증됨.

1614(광해군6) : 충남 아산시 음보면 어라산 아래로 이장.

1643(인조21) : 충무(忠武)는 시호를 받음.

1706(숙종32) : 충남 아산에 현충사 건립.

1793(정조17). 7. 1 : 영의정으로 추증됨.

1795(정조19) : 규장각에서 이충무공전서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