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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친원전 진영의 구세주가 됐다고? ‘아전인수 서평’

道雨 2021. 2. 23. 10:26

빌 게이츠, 친원전 진영의 구세주가 됐다고?

빌 게이츠 신간의 핵심내용은 온실가스 510억톤→0 감축 과정
안정적인 ‘차세대 원전’ 역할 제시
재생에너지 확대·탄소총량 규제로 ‘탈탄소 가는 길’ 정부 역할 강조

한국 친원전 진영 ‘아전인수 서평’
김영사쪽 “원전 홍보책 오해 불러”

 

*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66)가 지난 16일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을 전 세계 동시 출간했다. 게이츠노트 제공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66)는 지난 16일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을 전 세계 동시 출간했다. “기술 찬양론자”인 게이츠는 ‘온실가스 배출 제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설립한 원전회사 ‘테라파워’가 개발 중인 차세대 원전의 역할을 강조한다. 동시에 연간 510억톤에 달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줄이기 위한 재생에너지의 조속한 확대, 강력한 탄소배출 규제 등을 정부에 요구한다.

 

빌 게이츠가 2000년 빈곤과 질병 퇴치를 목표로 자신과 아내 이름을 딴 공익재단을 설립한 후 처음으로 내놓은 이 책은 출간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가난한 이들에게 “안정적 에너지를 저렴하게 공급”하려는 그의 초기 관심은, 온실가스와 기후변화의 관련성을 알게 된 뒤 “안정적이며 저렴하고 깨끗한 에너지 공급”으로 바뀌었고, 이는 차세대 원전 개발 투자로 이어졌다.

 

세계 여러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서평과 인터뷰를 내놓았다. 한국에선 <조선일보> 등 친원전 진영이 그의 책과 발언을 ‘한국형 탈원전-친원전 구도’에 욱여넣으면서, 에너지생산, 제조업, 농축산업, 교통, 냉난방 등 인류 전 영역의 변화와 재생에너지 투자·확대를 촉구했던 게이츠의 주장은, 오로지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마냥 납작해졌다.

 

책은 한국어 번역본 기준으로 356쪽 분량이다. 원전이 직접 언급된 건 11쪽으로, 그 중에서 2개쪽은 핵분열이 아닌 핵융합 발전을 설명한 부분이다. 게이츠는 특히 현존 원전이 아닌, 자신이 이사회의장으로 있는 테라파워의 차세대 원전을 소개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상용화 전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만 존재한다.

게이츠는 “훨씬 더 적은 양의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완전히 자동화”돼 있고, “지하에 지어 외부 공격이나 침입으로부터 자유롭”고, “독창적인 기술로 본질적으로 안전”한 신기술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탈탄소로 갈 수 있는 길”이라며 “원전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촉구한다. 1979년 스리마일섬 사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단 2기의 원전만을 건설해 오래 전 신규 건설이 중단된 미국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환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빌 맥키번의 칼럼을 통해 게이츠 책을 소개했다. 칼럼은 태양광 발전의 가격 하락이 국제에너지기구가 2010년에 예측했던 것보다 50~100년 빨라지고 있다“게이츠가 재생에너지 가격 하락 추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어권에서 영향력이 큰 <엘 파이스> 인터뷰 기사에선 15개 질문 중 2개가 원전 관련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기존 원전이 안전 문제 등으로 대중적 수용력이 없기 때문에 차세대 원전을 개발하는 것이고, 이를 성공한다 해도 다시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과제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선 12개 질문 중 하나가 원전에 관한 것인데, 게이츠의 회사가 깨끗한 전기를 안전하게 생산할 차세대 원전을 개발 중이라는 것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들 매체 기사에서 내용 대부분은 기후위기 문제의 심각성과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게이츠가 갖는 영향력 등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긴 분량의 기사를 낸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선 원자력(nuclear)이란 단어가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

 

* 2018년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한 비료 유통 시설을 방문한 빌 게이츠. 게이츠노트 제공

 

이와 달리 <조선일보>의 게이츠 인터뷰는 5개 질문 중 4개가 원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마저도 인터뷰 때 답변 분량이 충분치 않았던 탓인지 책 내용을 가져와 채워넣었다.

한국어 번역본을 출판한 ‘김영사’ 관계자는 “저자가 원전을 통한 무탄소 전기 생산을 지지하고 있긴 하지만, 깨끗한 전기 생산의 방법이 원전만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가 소개한 원전도 우리가 지금 쓰는 원전이 아닌 차세대 원전인데도, 원전만이 집중 확대돼 보도되면서, 원전 홍보 책으로 오해하게 했다”고 말했다.

 

에너지 전문가인 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우리가 강점을 가진 가압경수로형 원자로는 기본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비싼 시설이다. 정작 전력이 필요한 개발도상국은 국채를 발행해야하는 등, 건설을 위한 자본조달 자체가 어렵다. 게이츠도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확산이 어렵다고 생각해, 미래 기술인 소형 원자로를 주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형 원자로는 흔히 ‘5년 된 기술’이라 불리는데, 항상 5년 뒤에나 성공할 수 있다고 얘기되기 때문”이라며, 게이츠의 차세대 원전을 현실적 대안이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게이츠 책의 전체 구조는 해마다 지구상에 510억톤씩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데 모아진다. 특히 기술적 해결 방안에 관심이 높다. 스스로도 “기술 찬양론자”라고 쓰고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정부가 발전소나 자동차, 공장들이 배출할 탄소총량을 규제해야하며 “정부가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 “시장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썼다. 정부가 새로운 제로탄소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화석연료의 사용 비용을 높이는 등의 정책을 펴야한다고 했다.

 

김병권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소장은 “게이츠가 차세대 핵발전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수십배나 더 재생에너지 투자와 조속한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탄소세 등 강력한 탄소가격 설정도 찬성하는데, <조선일보> 등이 이런 대목에 공감하고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게이츠의 책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후위기 대응에 필수적인 사회제도 변화나 소비축소 같은 얘기가 부족한 것이 정작 문제”라고 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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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4070.html?_fr=mt2#csidx16e3ff1052e0dca8725c1d9a8134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