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남명 조식

道雨 2021. 2. 26. 17:30

남명 조식

 

                                                       - 대붕의 기상을 품은 산림처사

 

# 남명(南冥) :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大鵬)

 

조식은 성리학자이지만, 동갑내기(1501년생)이자 학문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같은 전형적인 성리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요서(妖書)라고 배척했던 책인 장자(莊子)에서 자신의 호를 취했다. 이 책의 첫 장에 남명(南冥)’이라는 말이 나온다.

 

··· 북녘의 아득한 바다[北溟]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 이름은 곤()이고,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곤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변신하는데,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이 붕의 등 넓이 또한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일어나면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란 천지(天池)이다.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북명(北溟)’은 북녘의 아득한 바다, ‘남명(南冥)’은 남녘의 아득한 바다이다. ()이라는 물고기는 상상 속의 동물이고, 이 곤이 변신하여 붕()이 된다. ()은 전설 속의 새로, 한 번의 날갯짓으로 9만 리 장천(長天)을 난다고 해서 대붕(大鵬)’이라고도 한다.

大鵬은 자신이 살고 있는 북녘 바다를 벗어나 끊임없이 남녘 바다로 날아가고자 한다. 北溟은 세속의 삶, 南冥은 모든 욕망과 권력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향을 가리킨다.

남명은 곧 대붕을 상징하고, 모든 욕망과 권력,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위민(爲民)과 안민(安民)의 나라 조선을 꿈꾼 그의 철학을 담고 있다.

 

그는 유학자로서는 특이하게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이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마음을 밝히는 것은 이고, 외물을 끊는 것은 이다)라고 새겨 있었다.

또한 성성자(惺惺子)’라고 이름 붙인 방울까지 차고 다녔는데, 이것은 나태하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살았지만, 사회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명종이 그를 단성 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했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자손일 뿐이니, ···

- 남명집』 「을묘사직소

 

그는 임금을 향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직언(直言)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감히 임금을 선왕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일 뿐이라고 부르고, 또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 있는 권력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조식은 더러운 권력과 어지러운 세상에 나아가 부귀공명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이름 없는 산림처사로 살기를 원했지만, 세상사를 회피하지 않고 잘못된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개선하는 데 자신의 삶과 학문을 바쳤다.

 

조식은 임금의 덕목은 백성을 아끼고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이 나라를 엎을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도 주저하지 않았다.

 

··· 배가 이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또한 이로 인해 전복(顚覆)되기도 하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이야기는 옛적부터 있었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드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는 존재이기도 하네.

- 남명집, 민암부(民巖賦)

 

임금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글은 제목에서부터 불경(不敬)하고 불충(不忠)한 듯 보인다. 민암(民巖)이란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식은 죽을 때까지 더러운 권력에 몸담지 않겠다는 자신의 출처(出處)’ 철학을 오롯이 지킨 조선 유일의 산림처사였다.

퇴계 이황은 물러날 퇴(退)’자를 평생 품고 살았지만, 임금이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벼슬에 나섰다가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거듭했기에, 조식은 이황에게 출처가 애매모호하다고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 산해(山海) :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조식은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의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가에서 줄곧 자라다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한양으로 이사했다.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 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45), 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 뇌룡정)를 짓고 산 시기(48~61), 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72)로 구분된다.

 

한양에서 조식은 이윤경·이준경(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로, 조정에서 사림의 후견인 역할) 형제와 이웃해 살면서 절친하게 지냈고, 성우·성운 형제(성혼의 아버지 성수침과 사촌지간)와 벗을 삼아 생활했다.

26세 되는 1526, 아버지가 사망하였는데, 조식은 선영이 있는 삼가현의 관동에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후 경남 의령 자굴산 명경대(明鏡臺) 아래암자에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30세가 되는 1530년에 처가가 있는 경남 김해로 옮겨 홀로 남은 노모를 봉양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는 신어산 아래 탄동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산해선생(山海先生)’이라고 불리고, ‘산해(山海)’라는 호를 사용했다.

태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라는 뜻으로,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45세가 되는 1545년 노모가 사망하면서, 삼가현의 선영에 어머니를 모신 삼년상을 마친 1548년 김해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그곳을 강학의 공간으로 삼아 후학을 양성했다.

鷄伏堂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이고, 雷龍舍는 비록 산림에 묻혀 사는 산림처사일지라도 마땅히 용과 우레의 기상을 품고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곳에 거처하며 조식은 사림의 태두로 우뚝 솟았고, 전국의 수많은 사림들이 그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왔다. 오건, 정인홍(합천의 유생들을 이끌고 와 조식의 제자가 되었다), 김우옹, 최영경, 정구 등 뛰어난 젊은 학자들이 조식의 제자가 되었다.

 

 

# 방장노자(方丈老子)·방장산인(方丈山人) : 지리산에서 태어나 지리산에 묻히다

 

조식은 지리산 아래 삼가현에서 태어났고,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지리산 자락 덕산(德山, 지금의 산청)에 묻혔다. ‘방장산의 늙은이[方丈老子]’ 혹은 방장산에 사는 사람[方丈山人]’이라는 호에는 지리산에 대한 조식의 사랑이 가득 묻어 있다. 이 산은 남다른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지리산(智異山). ‘백두산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라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방장산(方丈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조식은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금기시했던 莊子를 빌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여러 차례 드러내었다.

 

지리산을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천왕봉을 더욱 가까이에서 대하고 싶은 마음에, 계부당과 뇌룡사를 떠나 덕산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산천재(山天齋)라고 이름붙인 집을 짓고 살았다.

 

68세가 되는 1568년에 새로이 즉위한 선조가 조식을 한양으로 부르자, 다시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이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조선사 최고의 직언(直言)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무진봉사(戊辰封事)이다. 여기에서 조식은 특히 서리(胥吏)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갉아먹고 있다는 이른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주장하였다.

 

4년 후인 1572(선조 5),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산천재 뒷산에 묻혔다. 이때 조식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 칭호를 처사(處士)’라고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식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평소 차고 다녔던 칼과 방울 중, ‘(의로움)’를 상징하는 칼은 내암(萊菴) 정인홍이 물려받았고, ‘(공경함 혹은 두려워 함)’을 상징하는 방울은 동강(東岡) 김우옹이 물려받았다.

 

특히 정인홍은 스승의 유지를 이은 강우학파의 맹주 대접을 받았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후 권력을 잡은 북인(北人) 대북파(大北派)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다.

그리고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西人)들에 의해 역적의 수괴라는 혐의와 누명을 쓴 채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정인홍의 죽음과 더불어 조식의 학맥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황이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로 찬사를 받는 동안, 조식은 오랫동안 잊힌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요약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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