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道雨 2021. 2. 25. 18:26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 조선의 대표 화가, 3원(三園)

 

# 단원(檀園) : ‘선비[士]’가 되기를 바랐던 화가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이다.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인물화, 불화, 동물화, 초충화(草蟲畵) , 그림에 관한 한 모든 방면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 독보적인 인물이다.

김홍도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의 증조부인 김진창이 만호(萬戶)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와, 집안이 원래 무반이었으나 중인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어릴 적 그가 스승으로 모신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의 표암유고(豹菴遺稿)』 「단원기(檀園記)의 기록으로 보아, 김홍도는 7~8세 어린나이부터 20세 때까지 경기도 안산에 살던 강세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그림 공부를 하였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 신필(神筆)’이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던 김홍도는, 21세 때 이미 도화서의 궁중 화원으로 영조의 즉위 40주년과 칠순을 기념하는 잔치를 묘사한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를 그렸고, 1773(영조 49) 나이 29세 때는 당대 최고의 화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임금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이름을 올릴 만큼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다.

1781(정조 5) 어진을 모사한 공로로 2년 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고, 1791(정조 15)에 다시 어진을 그린 공로로 연풍 현감(延豊縣監)에 임명되는 영광을 입었다. 화원 출신으로 현감에 오른 사람은 김홍도 이전에 겨우 2명 남짓 있을 정도로, 중인 출신이 목민관이 된다는 것은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을 일컬어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인 수준에 이르고, 교묘하게 하늘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닭이나 개를 그리는 것은 어렵고 귀신을 그리는 것은 쉽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 표암유고, 단원기

 

김홍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화가가 아닌 선비[]’에 두고 있었다. 그의 자()는 사능(士能).

 

일정한 소득이 없어도 항상 같은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

- 맹자』 「양혜왕(梁惠王)

 

유사위능(惟士爲能)’,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라는 구절을 빌어 자신의 자를 사능이라고 했다.

 

단원(檀園)은 원래 명나라 시절 사대부 화가로 이름을 날린 이유방(李流芳)의 호다. 이유방은 문사(文士)로 시((()에 모두 뛰어났다. 김홍도는 비록 화원의 신분이었지만, 이유방처럼 시··화에 두루 통달한 고상한 문사를 자신의 평생 모델로 삼았기에, 단원(檀園)自號로 취했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은 정조 때 병조참판(2)과 한성부 판윤(2)까지 오른 문신이면서, 그림을 잘 그려 문인화가로 크게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김홍도는 단원(檀園)’이라는 호를 짓고, 그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에게 특별히 이와 관련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했다. 강세황이 쓴 단원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김홍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글이다.

 

 

영조 재위 시절 김홍도는 어진(御眞)을 그릴 때 참여하여 도왔다. 또한 지금의 임금(정조)에 와서도 명을 받들어 어용(御容, 임금의 용안)을 그려서 크게 칭찬받고 특별히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다. ··· 이에 自號를 단원(檀園)이라고 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생각해보니 단원(檀園)은 명나라 이유방(李流芳)의 호다. ··· 그 문사(文士)의 고상하고 맑은 인품과 기묘하고 우아한 그림을 사모하는 데 있을 뿐이다. ··· 김홍도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잊어버린 친구라고 할 만하다. 내가 단원(檀園)에 대한 기문(記文)을 사양할 수 없었고, 또한 단원이라는 호에 대한 짤막한 평을 미처 하지 못한 것과 대략이나마 김홍도의 삶을 적어서 이에 응답한다.

- 표암유고, 단원기

 

김홍도는 지금의 경북 안동에 있던 안기 찰방(安基察訪)에 임명되어 2년 반 정도 근무하였다.

연풍현감(연풍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으로는 약 3년간 근무하였다.

 

김홍도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비[]’에서 찾았다는 사실은, 그가 직접 그린 자화상 한 점과, 또 자화상으로 짐작되는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한 점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의 자화상은 독특하게도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고 간략하게 그려 있고, 그 대신에 선비들이 착용하는 도포와 망건은 얼굴과 비교할 때 지나칠 정도로 크게 묘사되어 있다. 선비의 풍모를 느낄 수 있도록 작정하고 그린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의풍류도>는 김홍도가 50세 무렵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선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포의풍류(布衣風流)란 벼슬하지 않는 선비가 베옷을 입고서도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화제(畵題)가 적혀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종이창과 흙벽에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는 선비로 피리 불고 시 읊으며 그 속에서 살리라. 단원.”

 

 

# 혜원(蕙園) : 난초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신윤복은 당시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 연애 그리고 여성을 그림의 소재와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화풍을 독자적으로 개척한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과 연애에 대한 본능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하고 표현해, 당시 사회의 금기와 인습과 관습을 철저하게 허문 파격의 화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갖춘 에로티시즘의 화가라고 하겠다.

 

여인 풍속화나 연애 혹은 성애(性愛) 풍속화라고 불러도 좋을 신윤복의 그림은, 정조 시대 조선 사회가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신윤복의 파격적인 그림은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 군주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과 세도 가문의 보수 반동 정치가 휩쓴 순조 이후로는, 신윤복처럼 성리학이 극도로 혐오한 인간의 성과 연애 본능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신윤복은 조선 사회 성리학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풍운아였던 셈이다.

 

김홍도의 삶이 영광의 나날이었다면, 신윤복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윤복은 속화(俗畵)를 즐겨 그린다는 죄목으로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났다.

신윤복의 화풍이 김홍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미술사가나 화가들의 중론(衆論)이다.

신윤복은 김홍도보다 열세 살 어렸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은 도화서의 궁중화원이었다.

 

신윤복은 김홍도의 호에서 ()’을 따왔다. ‘()’는 난초의 일종인 혜란(蕙蘭)이다.

줄기 하나에 한 송이 꽃이 피어 향기가 넘치는 것은 ()’이요, 한 줄기에 예닐곱 송이 꽃이 피지만 향기가 조금 덜한 것은 ()’이다.

난이든 혜이든 모두 난초의 일종으로,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四君子)에 속하며, 선비를 상징한다.

혜원 역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은 선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난초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해서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윤복 그림 속의 주인공은 단연 여성이다. 따라서 혜원이라는 호가 여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의 정신적 영향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던 신윤복은 , 연애, 그리고 여성을 소재로 삼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김홍도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짜임새 있는 구도를 중시한 반면, 신윤복의 풍속화는 배경을 중시해 상세하게 묘사하는 한편, 부드럽고 유연한 필체로 색채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는 묘사와 표현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는 화사보략(畵史譜略),“당대의 화원들이 범본(範本)만을 모방하던 시절에 오직 신윤복만이 현실 묘사를 주장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점은 파천황(破天荒)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공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회의 금기에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이는, 당대에는 혹평과 비난을 받지만 후대에는 호평과 찬사를 받게 된다. 다른(훌륭한 혹은 성공한) 사람을 추종하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차라리 욕을 먹고 비난을 사고 고통을 받더라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이 역사적으로 볼 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

 

 

# 오원(吾園) : “너희만 원(園)이냐, 나도 원(園)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삼재(三齋)와 삼원(三園)’이다. 여기에서 삼재(三齋)는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말한다. 삼원(三園)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가리킨다.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거지처럼 떠돌며 살다가, 중국어 역관(譯官) 출신으로 종2품 당상관인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오른 이응헌의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며 연명했으며, 누구로부터 어떻게 그림을 배웠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힘겹게 그림을 익히고 터득했다. 그러나 장승업이 그린 그림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천재적 솜씨에 매료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매천(梅泉) 황현, 을사늑약 때 <황성신문>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위암(韋菴) 장지연 등은 장승업의 그림을 신이 만든 작품[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그가 자신의 호를 오원(吾園)’이라고 지은 것은 남다른 자부심 때문이었다. 자신도 당시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못지않은 천재 화가라는 자부심을 담아, “너희만 원()이냐, 나도 원()이다!”라고 일갈하듯,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지었던 것이다.

 

장승업은 어느 곳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은 채, 평생 자신의 그림을 구하는 후원자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궁중 화원이나 임금이 내린 벼슬의 영예도 그에게는 구속이었고, 그림을 그려준 대가로 받은 엄청난 액수의 금전 역시 그를 주저앉히지 못했다.

 

장승업은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도 가지고 있었다. 술은 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이 술 때문에 천재광인(狂人)’ 사이를 넘나들며 살았다.

장승업은 고종에게 정6품 감찰(監察)이라는 관직을 임명받아 출세할 기회를 얻었는데,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에 수차례 달아났다 이내 잡혀오기를 거듭하다가, 끝내 관직을 버리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술만 있다면 장승업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술에 취해 낙관을 잃어버리기 일쑤여서 그림에 다양한 낙관이 찍히게 되었고, 낙관 없이 이름만 써넣은 것도 많았기에, 오늘날 장승업 그림의 진위를 가리는 게 쉽지 않게 되었다. 현재 장승업의 진짜 작품으로 확인된 것만 140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장승업의 삶은 천재광기(狂氣)’사이를 넘나들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빈센트 반 고흐와 닮았으며, 김홍도처럼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인 솜씨와 재능을 보여주었다.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에 탁월했으며, 근대적 회화감각을 느낄 수 있는 선염(渲染) 담채법(淡彩法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묘사와 표현 기법을 보여주었다.

조선 회화의 전통기법과 근대적인 회화 기법을 동시에 보여주었기에, 미술사적으로 볼 때, 장승업은 조선 회화와 근대 회화를 잇는 징검다리이자 토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이 글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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