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道雨 2021. 2. 24. 16:21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 가사 문학의 산실(産室), ‘면앙정’과 ‘성산’

 

 

# 가사 문학과 호남가단(湖南歌壇)

 

무등산은 광주, 화순, 담양에 걸쳐 있는 웅장하고 수려한 산인데, 북서쪽 자락에 있는 성산(星山) 아래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한국가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반경 10여 킬로미터 안에 세워진 면앙정(俛仰亭식영정(息影亭소쇄원(瀟灑園환벽당(環壁堂송강정(松江亭) 등을 무대삼아 호남의 문사(文士)들이 수많은 국문 시가(가사 문학)의 걸작들을 남겼다.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이 도학(道學, 성리학)’ 연구와 그 실천에 힘을 쏟은 반면, 호남사림은 시가(詩歌)’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문학 활동은 당시 조선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한시(漢詩)보다는 국문 시가인 가사 문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른바 호남가단(湖南歌壇)’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호남사림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호남가단을 이끌었던 문사들은, 현재 한국가사문학관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 혹은 정원의 주인이었다. 면앙정의 송순, 식영정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과 석천(石川) 임억령, 소쇄원의 소쇄옹(瀟灑翁) 양산보, 환벽당의 사촌(沙村) 김윤제, 송강정의 정철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들과 사제 관계나 혹은 친·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봉 기대승, 하서(河西) 김인후, 백호(白湖) 임제, 제봉(霽峰) 고경명, 옥봉(玉峯) 백광훈,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등이 호남가단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크게 보아 면앙정과 성산 주변의 빼어난 산세와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 삼아 창작 활동을 했는데, 이 때문에 호남가단은 면앙정가단성산가단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조선의 가사문학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극찬하는 두 사람, 곧 면앙정(俛仰亭) 송순과 송강(松江) 정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 면앙정(俛仰亭) :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다.”

 

송순은 1493년 전남 담양 기곡면 상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1세 때 담양 부사로 부임한 눌재(訥齋) 박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박상은 훗날 정암(靜庵) 조광조와 뜻을 함께해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이름을 올린 인물인데, 도학(道學)과 절의(節義) 그리고 문장을 두루 겸비한 호남사림의 종조(宗祖)이다. 송순이 호남사림의 큰 스승으로 대접받았던 이유는 그의 문하에서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과 같은 대학자와 문인들이 다수 배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원인은 그가 호남사림의 종조인 박상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박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송순은 1519,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초기 벼슬길은 순탄했지만, 모함을 받고 파직되어 낙향했다가, 다시 벼슬을 받고 올라갔지만 부친상을 당해 다시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이 무렵 송순은 집안의 세거지인 상덕리에서 서북쪽으로 2~3리가 떨어진 기촌(企村)이라는 곳에 새로이 집터를 장만했고, ‘기촌(企村)’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다시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 사헌부 장령, 이조와 병조의 정랑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훈구파의 수장이자 권문세가로 권력을 전횡한 김안로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파직당한다. 이때가 1533년 그의 나이 41세였다.

 

고향인 담양으로 돌아온 송순은 비로소 기촌의 집 서북쪽 봉우리 위에 초가로 된 면앙정을 짓고, 스스로 그 뜻을 취해 자호(自號)로 삼았다.

 

맹자(孟子)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 첫 번째 즐거움은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아무 탈이 없는 것이요, 두 번째 즐거움은 하늘을 우러러보아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세 번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다.

 

俛仰亭은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두 번째 즐거움,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송순은 구부릴 부() 대신 같은 뜻을 가진 한자인 구부릴 면()’을 사용해 俛仰亭이라고 이름 붙였다.

훗날 송순은 면앙정가(俛仰亭歌)’라는 한시(漢詩) 한 편을 지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드러내기도 했다.

 

굽어보니 땅이 있고, 우러러보니 하늘이 있네. 그 가운데 지은 정자 호연지기 일으키네.

바람과 달을 불러 산천(山川)에 절을 하고, 명아주 지팡이 짚고 백 년을 보내노라.

- 면앙집(俛仰集), 면앙정가

 

송순은 이때부터 문하의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와 벗으로 사귄 석천 임억령 등과 교유하며, 호남가단의 제일봉이라고 할 수 있는 면앙정가단을 창시해 활동했다. 당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등 호남 제일의 문인들은 모두 면앙정 주변의 빼어난 산세와 아름다운 풍경을 면앙정 30(三十詠)’이라는 시에 담아 읊었다.

 

송순은 153745세 때, 김안로가 권력에서 쫓겨나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의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다.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던 1542, 외척이자 권신인 윤원형을 정면으로 공박하다가 외직인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당했다. 이때 외가(外家)의 아우인 소쇄옹 양산보와 더불어 조선 제일의 정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산(星山)소쇄원(瀟灑園)’을 중수하는 일을 도왔다. 소쇄원은 면앙정가단과 함께 호남가단을 대표하는 성산가단의 주요 활동 무대 중의 하나이다.

 

사림의 지사(志士)로 권신 윤원형 일파와 끝까지 대립했던 송순은 1550년 사악한 당파를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구수담(具壽聃)과 절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연좌되어 평안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방면되었고, 1552년에는 선산 부사로 복직되었다.

이때 송순은 잠깐 휴가를 내어 담양의 고향집과 면앙정을 찾았는데, 지난 7년여 가까이 돌보지 못한 면앙정은 부서지고 허물어져 흉한 상태였다. 당시 송순과 함께 면앙정을 찾은 담양 부사 오겸(吳謙), 흉물이 되어버린 면앙정의 모습을 보고 크게 마음 아파하면서, 자신이 재물을 보낼테니 중수(重修)하라고 권했다. 면앙정은 이렇게 해서 다시 본모습을 찾게 되었다.

송순의 제자 고봉 기대승은 훗날 면앙정이 새로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하며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어 올리기까지 했다.

 

윤원형 일파와 관계가 나빴던 송순은 외직을 전전했다.

1565년 윤원형이 처형당하고, 2년 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한 송순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의정부 우참찬 등 최고위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77세가 되는 1569년 송순은 병을 핑계로 마침내 벼슬에서 물러나 면앙정에 정착하게 되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과 함께 국문 시가(가사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면앙정가를 완성한 때도 이 무렵이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면앙정에서 바라본 산수(山水) 풍경과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풍광을 노래하면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자신의 호연지기를 노래한 국문 시가이다.

송순은 浩然之氣라는 말을 좋아해서 한시 면앙정가나 가사 면앙정가에서 모두 호연지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표현했다.

 

말년의 송순은 호남사림의 큰 스승이자 호남가단의 대부(大父)로 말할 수 없이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1493년에 태어나 158292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송순은 나이 87세 때 회방연(回榜宴, 과거 급제한 뒤 6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는 큰 잔치)을 열었는데, 선조가 직접 어사화와 어사주를 내릴 만큼 성대했다. 호남과 각지의 문사(文士)는 물론이고 전라도 관찰사와 여러 고을의 수령들까지 참석했다. 잔치가 끝나고 송순이 잠자리에 들려고 나서자, 송강 정철이 즉석에서 선생님의 가마를 우리가 직접 메고 모시자고 제안했고,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등이 흔쾌히 나서 정철과 함께 앞과 뒤에서 송순을 태운 가마를 멨다. 이들 네 사람은 이미 대학자이자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도, 천한 신분의 사람이나 메는 가마를 스스럼없이 멜 정도로 송순은 큰 스승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가마를 멨다고 전해오는 기대승은 실제 5년 전인 1572년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이미 사망한 기대승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반드시 자청해서 가마를 멨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확신했던 것이다.

 

 

# 송강(松江) : 성산(星山) 앞에 흐르는 아름다운 내

 

정철의 집안은 왕실의 외척으로 이른바 로열패밀리였다. 정철의 큰누나가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의 후궁인 귀인(貴人) 정씨였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 누나는 왕족인 계림군의 부인이었다. 정철은 43녀 중 막내여서 온 집안의 사랑을 받았다.

정철은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왕자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매형이 되는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 역시 정철의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그의 매형 인종이 즉위 8개월 보름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한 문정왕후는 친동생인 윤원형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인종의 측근들을 핍박하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사림에 대하여 무자비한 정치적 박해를 가했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사림 세력이 어린 명종을 폐하고 새로이 계림군을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는 모함을 해 을사사화(乙巳士禍)까지 일으켰다. 계림군이 역모의 수괴가 되자, 그의 처가인 정철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계림군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으로, 큰형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에 처해졌다.

 

2년 뒤인 1547년 정철의 나이 12세 때에, 문정왕후가 어린 임금 위에 앉아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힌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다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이배(移配)되었고, 큰형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매 맞은 상처가 도져 죽고 말았다. 나이 어린 정철은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면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정철의 아버지는 1551년 정철의 나이 16세 때 유배형에서 풀려났지만, 딱히 갈 데가 없어서, 가족들을 이끌고 부모의 묘소가 있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지실 마을로 이사를 왔다.

지실 마을로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정철은 어머니와 함께 전남 순천에 은둔해 지내던 둘째형 정소(鄭沼)를 만나러 길을 떠나게 된다. 당시 지실 마을에서 순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산(星山,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재) 아래를 지나쳐야 했는데, 여기에서 정철은 기이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호남사림의 한 사람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나주 목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내던지고 성산 건너편 환벽당(環壁堂)에 거처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사촌(沙村) 김윤제였다.

 

김윤제는 자신의 정자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앞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던 소년 정철을 보고서는, 말을 걸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고, 어린 정철에게 빠져 그를 자신의 문하에 두고 제자로 삼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다니느라 학문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정철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김윤제는 학문이 깊고 시문에 뛰어난 문사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부호여서 당시 성산 일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담양과 장성을 근거지로 삼은 호남사림의 유명 인사들과 사제 혹은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김윤제의 처남이고, 식영정의 주인인 김성원은 그의 조카였고, 면앙정가단의 일원인 임억령은 김성원의 장인으로 그와 사돈지간이었다. 김인후는 처남인 양산보와 사돈지간이고, 송순은 양산보의 외가 형이었다.

이 때문에 환벽당은 면앙정 못지않게 호남가단의 1세대 문인들이 어울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지냈던 공간이었다.

 

김윤제가 맺어놓은 학맥(學脈)과 인맥은 정철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철은 김윤제의 문하를 드나들며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송순 등 호남 제일의 문사들로부터 학문과 시문을 배우는 행운까지 누렸다. 17세 때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 유씨와 혼인을 한 이후로는 경제적인 도움까지 받았다.

 

정철이 김윤제를 처음 만났던 개울(혹은 강)은 계절 혹은 형세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개울에 시루 바위가 있다고 해서 증암천(甑巖川)’, 7~9월이 되면 백일홍이 아름답게 핀다 해서 백일홍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 개울 주변에 자리한 고서면의 지명을 따 고서천(古西川)’, 짙푸른 개울물에 빗대어 창계천(蒼溪川)’, 개울가에 대나무가 즐비하다고 해서 죽록천(竹綠川)’이라고 했으며, 이 개울의 또 다른 이름이 다름 아닌 송강(松江)’이다.

정철은 이 개울()이 맺어준 스승 김윤제와의 인연을 잊지 않고, 또 늘 푸르른 소나무의 기개를 닮기 위해 松江自號로 삼았던 것이다.

면앙정 30처럼 성산과 송강 주변에도 ‘20이라 읊은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다.

 

정철은 식영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성산가단의 중심이었는데, 대개 이들은 면앙정가단의 스승(혹은 선배) 그룹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던 1520년대와 1530년대 출생들이었다. 서하당 김성원(1525년생), 고봉 기대승(1527년생), 제봉 고경명(1533년생) 등이 그렇다. 정철은 이들보다 더 나이가 적은 1536년생이다. 비록 정철은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가사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

 

156227세 때 문과 별시에 장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정철은, 평생 네 번이나 낙향하는 정치적 불운을 겪는데, 담양으로 낙향할 때마다 주옥과 같은 국문 시가(가사 문학)를 남겼고, 오늘날까지 가사 문학의 일인자로 인정받고 있다.

첫 번째 낙향은 1575년 그의 나이 40세 때였는데, 당시 담양 창평 고향집에서 2년간 머무르며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성산별곡은 송순의 면앙정가와 함께 우리나라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두 번째 낙향은 157944세 때였으며, 5개월간 고향에 머문 후, 선조로부터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강릉으로 떠났다. 이때 지은 가사가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세 번째 낙향은 158146세 때였고, 네 번째 낙향은 158550세 때였다. 당시 정철은 송강정에 머무르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었다.

 

정철은 정치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냉혹한 인물이었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이후, 정철은 서인의 선봉장이 되어, 동인을 공격하고 논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벼슬에서 거듭 낙마해 낙향한 이유 역시 그가 당쟁의 한복판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율곡 이이의 간곡한 만류와 부탁에도, 그는 죽을 때까지 동인을 공격했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동인의 탄핵을 받아 네 번째로 낙향한 지 4년이 지난 1589,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른바 정여립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발탁되고, ‘정여립 역모 사건을 국문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동인 세력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선비가 줄잡아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훈구파와 척신(戚臣)들이 사림 세력을 탄압한 수차례의 사화(士禍)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의 선비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림이 사림을 죽이는 피의 숙청은 정여립 역모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정철의 행동은 끔찍하고 무자비했다.

정철 또한 당쟁의 피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또다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강화도의 송정촌(松亭村)에서 말년을 보내다 죽음을 맞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정철은 星山 앞을 흐르는 아름다운 내() ‘松江의 자연 풍경은 물론, 그와 하나 되어 사는 선비들의 삶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문학적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정치가 정철은 松江의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잔혹한 살인귀의 이미지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 위의 내용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