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교산 허균과 죽도 정여립

道雨 2021. 3. 11. 19:30

교산 허균과 죽도 정여립

 

                                        - 만민평등과 천하공물을 부르짖은 두 혁명가

 

 

# 교산(蛟山) : 이무기의 꿈

 

허균을 대표하는 호는 교산(蛟山)’인데, 그가 태어난 강릉 외가의 뒷산 이름이 교산이다. 오대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이무기처럼 기어가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교산 아래에 허균의 외가 터가 자리잡고 있다.

 

허균의 외가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1561(명종 16) 어느 가을날, 이무기가 교산 아래에 있던 큰 바윗돌을 깨뜨리고 사라졌는데, 이때 두 동강 난 바위에 문처럼 구멍이 뚫려서 교문암(蛟門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의 삶을 추적해 볼 때, 교산이라는 그의 호는 단순히 지명을 취한 것이 아니라 이무기의 정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애일당기(愛日堂記)에서, 허균은 자신이 태어난 강릉 외가의 집터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무기의 정기와 전설이 서린 명당 중의 명당으로, 특이하고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균의 나이 24세가 되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허균은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함경도로 갔다가 다시 북쪽에서부터 배를 타고 교산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볼보지 않아 폐허같던 외할아버지의 옛 집터인 애일당(愛日堂)을 다시 일으켜 세운 후 거처로 삼았다. 허균이 교산이라는 호를 처음 사용한 시기도 이 무렵부터였다.

 

상상 속에서건 아니면 현실에서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 가운데 용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동물은 이무기밖에 없다. 이무기는 잠재적인 용이다.

허균은 용을 꿈꾸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허균이 서얼을 비롯해 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동원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꾸몄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때, 그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을 심문한 기록을 보면, “허균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라는 증언이 나온다.

 

허균이 생각한 왕이란, 신분 차별이 없고, 만민이 평등한 나라에서, 그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이 아니라, 그들의 지지를 얻고 선택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였다.

 

허균이 쓴 호민론(豪民論)유재론(遺才論)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글이다.

허균은 호민론의 첫 구절에서부터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학의 민본(民本) 사상보다 진일보한, 민권(民權)에 가까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民本은 백성을 다스림의 대상으로 두고, 그들을 위한 정치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의 사상인데, 허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호민론에서 허균은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이 가운데 호민(豪民)시대적 변고를 만나면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존재로 보았다.

 

대개 얻거나 이룬 것만 즐거워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구속당하고, 순순히 법을 떠받들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시키는 일이나 하는 백성을 항상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민(恒民)이라고 한다. 항민은 두렵지 않은 존재다.

가혹하게 빼앗겨 살갗이 벗겨지고 골수가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나오는 곡식이 바닥을 드러내도 도대체 끝이 나지 않는 요구에 따라 갖다 바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위에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백성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원민(怨民)이라고 한다. 원민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다.

자신의 종적을 푸줏간 속에 감추고 암암리에 다른 마음을 쌓고 天地間을 흘겨보다가 다행히 시대적인 변고를 만나면 자신의 소원을 실현하려고 행동하는 백성을 자신의 힘으로 세력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해서 호민(豪民)’이라고 한다. 무릇 호민이란 가장 크게 두려워해야 할 존재다. ···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의 멸망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다. ()나라의 혼란 또한 황건적에서 비롯되었다. ()나라가 쇠약해지자 왕선지와 황소가 이 틈을 노려 일어섰고, 마침내 이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였다. 이런 사변은 모두 백성을 괴롭히고 자기 배만 채운 죄과가 부른 재앙이다. 호민(豪民)은 바로 그와 같은 틈과 기회를 노려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 ··· 그러므로 진()라와 한()라 이래로 호민(豪民)이 일어나 입은 화란(禍亂)은 당연한 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호민론(豪民論)

 

호민론은 고통 받고 원망하는 백성이 없도록 정치를 해야 왕실과 사직 그리고 권력과 재물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화법(話法)과 논법(論法)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글의 속뜻은 제왕이나 양반 사대부와 같은 지배 계층이 단지 백성에게 고통을 주고 핍박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호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바꾸고 윗자리에 있는 권력자들을 처단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지 반역이 아니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맹자 이후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한 왕조를 다른 왕조로 바꾸는 易姓革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유학자는 많았다. 그러나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바꾸는 일종의 민중 혁명의 정당성을 언급한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호민론의 정치 철학은 그만큼 급진적이다.

 

유재론(遺才論)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같은 권리를 부여받아 태어났다는 만민평등(萬民平等)의 사상을 역설했다. 유재론에 따르면, 하늘은 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때 귀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해서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해서 재주를 인색하게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늘이 평등하게 부여한 재주를 문벌(門閥)로 단속하고 과거(科擧)로 제한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준 권리를 침해하는 불의(不義)한 일일 따름이다.

 

하늘이 재능이 있는 자를 세상에 보내는 것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늘이 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때 귀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해서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해서 재주를 인색하게 주지는 않았다. ··· 하늘은 균등하게 재능을 부여했는데 문벌(門閥)로 단속하고 과거(科擧)로 제한하고 있으니, 항상 인재가 모자라다고 애태우는 것도 당연하다. ··· 천하가 넓다고 해도 서얼(庶孼) 출신이라고 해서 어진 인재를 버리고, 어미가 개가(改嫁)했다고 해서 그 재능을 쓰지 않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어미가 미천한 출신이거나 개가했다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에 끼지도 못한다. ···

- 성소부부고, 유재론(遺才論)

 

이러한 허균의 주장과 논설은 서양의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만민평등의 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이 교산이라는 호에 담은 이무기의 꿈, 바로 호민론유재론에서 보여준 민권과 만민평등의 사회 혹은 나라였던 것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내비친 신분 차별이 없고 만민이 평등한 새로운 나라’, 율도국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비록 거기에서 홍길동은 율도국의 왕이 되었다고 나오지만, 분명 율도국은 하나의 성씨가 왕위를 세습하는 또 다른 왕조체계나, 지배 계층이 자리만 바꾼 그런 나라는 아니었다.

 

허균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꾼, ‘용을 꿈꾼 이무기이다.

 

모든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고,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허균의 시대뿐만 아니라, 신분 질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가치이다.

지금도 용을 꿈꾸는 이무기, 곧 더 평등한 사회와 삶을 꿈꾸는 수많은 허균들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허균은 스스로의 힘으로 용이 되려고 하는 모든 피억압·피지배 계층의 영원한 아이콘일 수밖에 없다.

 

 

# 성소(惺所)·성옹(惺翁)·성성옹(惺惺翁) :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도 홀로 깨어 있겠다!”

 

허균은 교산이라는 호 외에도 학산(鶴山), 백월거사(白月居士), 성소(惺所), 성옹(惺翁), 성성옹(惺惺翁) 등 다양한 호를 사용했다. 유독 ()’이라는 글자를 좋아했다.

허균은 1611(광해군 3) 나이 43세에 전라도 함열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시문(詩文)이나 각종 논설과 비평 및 기록 등을 모아 엮은 문집의 이름을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고 붙였다.

성소부부고7년 후(1618) 그가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기 직전에, 이미 죽음을 예감한 바로 그 순간에도, 혹시 의금부에 압수당해 유실될 것을 두려워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은밀하게, 출가한 딸의 집으로 보낼 만큼 아꼈던 문집이었다.

허균이 중년 무렵 스스로를 관찰하고 성찰한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의 제목 역시 성옹송(惺翁頌)’이었다.

 

허균은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나 다름없었던 초당(草堂)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경덕의 학풍 탓인지는 몰라도, 허엽의 집안은 당시 양반 사대부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가풍을 띠고 있었다.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은 서얼 출신인 손곡(蓀谷) 이달과 절친한 사이로 지냈으며, 허균과 허난설헌은 이달을 스승으로 삼을 만큼 가문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또한 여성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사대부가의 관례를 깨고 딸인 허난설헌이 자유롭게 시문을 짓고 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허균은 장성하면서 유학이나 성리학 이외에도 불교·도교·노장(老莊) 사상을 두루 섭렵했다. 명나라에 갔을 때 접한 서학(西學)과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유학 사상 최대의 이단자로 지목당한 이탁오의 사상에도 심취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허균이 최초로 명나라에 갔다가 천주교 선교사들의 지도와 게(, 가톨릭 교회의 기도문) 12장을 가지고 왔다.”라고 했고, 허균이 직접 엮은 한정록(閑情錄)에는 이단 서적이라고 하여 금서(禁書)로 엄격하게 다루어진 이탁오의 분서(焚書)가 등장한다.

 

()’고요하되 마음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것혹은 고요하면서도 마음이 맑게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삶을 뜻한다.

또한 ()’이라는 글자에는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는 뜻과 함께, 무엇인가에 미혹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거기에는 성리학이든 혹은 불교이든, 혹은 도교이든 혹은 천주교이든 혹은 양명학이든 그 어떤 학문과 사상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

 

그의 호 성성옹(惺惺翁)과 그의 집 이름인 각헌(覺軒)을 통하여, 깨어 있는 삶과 깨닫는 삶의 본질이 같다고 적었다. 사람은 오직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본성의 힘으로 깨어 있는 삶과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죽도(竹島) : 죽도에서 ‘천하공물(天下公物)’을 외치다

 

허균이 죽음을 맞은 1618년 보다 30여 년이나 이른 1580년대에 이미 천하(天下)는 공물(公物)이므로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왕정(王政)을 부정한 사람이 있었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우리나라 최초의 공화주의자’,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1599~1658)보다 50년 앞선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이 사람은 바로 죽도(竹島)라고 自號했던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1544(중종 39), 전라도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나이 27세가 되는 1570(선조 3) 대과(大科)인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또한 이 무렵 경기도 파주에 머물며 강학하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갔다.

정여립은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변론(辯論)에 능숙하고 박학다식해서, 율곡과 우계의 신망을 얻었고 정치적 후원까지 받았다.

 

서인(西人)의 파당적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정여립은 율곡이 사망한 후 서인을 떠나 동인(東人)이 되었고, 이듬해인 1585(선조 18) 4월 경연(經筵) 석상에서는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율곡과 우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로 인해 조정과 사림 안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나서 정여립을 크게 질책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렸다.

 

낙향한 정여립은 고향집과 가까운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전국 각지에서 그의 명성을 따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났다. 스스로 죽도라는 호를 썼기 때문에, 호남 일대에서는 그를 죽도선생(竹島先生)으로 불렀다. 죽도는 육지 속의 섬이다.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 사방을 에워싸고 흐르기 때문에 마치 섬처럼 보인다. 산죽(山竹)이 무성하게 자라서 한겨울에도 대나무 잎이 보인다고 한다. 죽도라는 이름은 이러한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죽도를 주요 무대로 삼아 활동한 정여립은 단순히 학문을 닦고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일보다는 일종의 사회 조직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그가 조직한 대동계는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 질서와 장벽을 깨뜨리는 매우 파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기에는 양반 사대부와 사림의 선비는 물론, 서얼, 무사, 무뢰배, 노비, 승려, 도사, 산적들까지 참여했다.

대동계는 왕조 체제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신분질서와 통치 때문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다양한 부류의 피지배 계층이 다수 참여하는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동(大同)’이라는 조직의 명칭 자체가 이미 어떤 신분 차별이나 사회적 불평등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만민평등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대동(大同)’이라는 용어는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데, 비록 유가의 경전에 실려 있지만, 춘추 전국 시대에 만민평등과 반전(反戰) 사상을 설파했던 묵가(墨家)의 창시자인 묵자(墨子)의 학설이라고 보고 있다.

 

큰 도가 행해지니 천하는 공민(公民)의 것이 된다.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선출하여 믿음을 이루고 화목으로 다스린다. 이러한 까닭에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

홀아비, 과부, 고아, 외로운 장애자와 병자들 또한 모두 부양을 받는다. ···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자신만의 소유로 저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으로 일하지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몰래 모의하거나 어울리지 않으니, 도둑이나 난적(亂賊)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닫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이것을 대동(大同)’이라고 말한다.

 

신분 차별이 없는 만민평등 사상에 의거해 조직된 정여립의 대동계는 호남 일대의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었다. 특히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탈해 백성들을 괴롭히고 살육했던 왜구(倭寇)들에 대한 무력행사까지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신망과 존경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을 끌어들여 전국적인 규모의 세력을 갖추었다.

 

정여립은 매월 15일에 대동계의 구성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활쏘기·말 타기·칼 쓰기 등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을 강론했다. 당시 정여립이 구성원들에게 강론한 급진 사상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천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므로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을 수 없다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이다.

단지 하나의 왕을 다른 왕으로 바꾸는 반정(反正)’이나, 혹은 하나의 왕조를 다른 왕조로 교체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보다 더 급진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천하는 누군가 사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공적인 것, 즉 제왕이나 양반 사대부의 소유물이 아닌 공민(公民, 백성)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본래의 주인이 자신의 것을 찾는 것일 뿐 역모나 반역이 아니다.

 

또 다른 급진 사상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는 이른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다.

天下公物說何事非君論은 모두 조선의 지배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정여립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죽었기에, 그의 글과 기록은 물론, 그와 관련된 정보 또한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다.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죽도를 본거지로 삼고 죽도라고 자호했던 시기를 전후해 자신의 사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대동계를 조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여립은 허균보다 수십 년이나 앞서 왕조 체제의 전복을 꿈꾼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혁명가였다.

 

정여립의 야심찬 구상은 1589(선조 22) 10전주의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조정에 접수되고, 토벌군이 급파되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정여립은 형세의 불리함을 직감하고 아들 정옥남, 박춘룡 등과 함께 죽도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토벌군이 죽도를 덮치자, 정여립은 잡혀서 심한 고문을 받을 경우 동지들을 발설할까 봐, 먼저 변숭복을 죽이고, 다시 정옥남과 박춘룡을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자 자결하였다.

 

역모나 모반 사건에 무척이나 예민했던 선조는, 송강 정철을 필두로 서인 당파를 앞세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했다. 서인 세력 역시 이 사건을 기회삼아 자신들의 반대파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당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의 숫자가 1천여 명에 달했다.[기축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