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金萬重)
- 1637(인조 15) 한성에서 출생, 1692(숙종 18) 남해 유배지에서 사망.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청음 김상헌의 형)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부수찬이 되고, 헌납·사서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그는 많은 시문과 잡록, 〈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남기고 있다.
〈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쓴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소식의 〈동파지림 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 〈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다.
#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
- 요약
김만중의 창작 소설이며, 국문본으로 목판본·필사본·활자본이 있고, 그의 종손이 쓴 한역본이 있다.
필사본은 주로 〈남정기〉 또는 〈사씨전〉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한림학사인 유연수의 부인 사정옥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교씨를 첩으로 두는데, 아들을 낳은 후 더 간악해진 교씨가 사씨를 모해하여 내쫓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한다.
교씨의 모함으로 유한림이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돌아오던 중 전후의 모의 사실을 들은 후, 사부인을 만나 사죄하고, 좌승상으로 승직하고 교씨를 살해해 원수를 갚는다.
후에 사부인은 내훈과 열내 전을 지어 후세에 길이 전한다.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책봉한 사건에 대해, 숙종을 깨닫게 하기 위해 쓴 '목적소설'이다.
17세기 중·반기 본격적인 소설시대를 열어주었다는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 내용
명나라 유현이라는 명신과 최씨부인 사이에서 주인공인 연수가 태어난다. 연수는 재질이 뛰어나 15세에 급제해 한림학사에 제수된다. 유현은 여승 묘혜를 통해 덕이 뛰어난 사소저 정옥을 며느리로 맞이한다. 사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스스로 유한림에게 취첩을 권유한다. 유한림이 사양하던 끝에 교씨를 첩으로 맞이한다. 원래 사악한 성품의 교씨는 아들 장주를 낳은 후로는 차츰 더 간악해지기 시작한다. 그뒤 사부인도 아들 인아를 낳자 교씨는 문객 동청과 결탁해 사씨를 모해하기 시작한다. 동청과 교씨는 유한림의 재산을 빼앗아 함께 도망쳐 살기로 하고 시비를 통해 아들 장주를 죽여 사부인의 소행으로 모함하기에 이른다. 교씨는 사부인을 내쫓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유한림도 교씨와 동청의 모함을 입어 승상 엄숭에 의해 행주로 유배되고 동청은 유한림의 정적 엄숭의 도움으로 계림태수 벼슬을 얻게 된다.
시비 설매는 교씨로부터 인아를 살해하라는 사주를 받았으나 양심의 가책으로 도리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러던 중 천자의 특사를 입어 유배지에서 돌아오던 유한림이 우연히 교씨와 동청의 행차를 만나 설매로부터 전후의 모의 사실을 듣게 된다. 동청 일당의 추격을 받은 유한림이 강에 투신하나 여승 묘혜에 의해 구출된다. 유한림은 사부인을 극적으로 만나 사죄하고 엄숭은 죄가 드러나 천자에게 버림받는다. 동청 또한 추방되어 죽음을 당하고 교씨는 냉진과 사통하다 냉진마저 죽자 결국 기녀로 전락한다. 유한림은 그후 좌승상으로 승직되고, 사부인의 권유로 임씨 추영을 첩으로 맞아 후사를 잇고 안아도 되찾게 된다. 교씨를 살해해 원수를 갚고, 사부인은 내훈과 열내전을 지어 후세에 길이 전한다.
- 작품의 의의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책봉한 사건에 대해, 숙종을 깨닫게 하기 위해 쓴 '목적소설'이다.
이러한 소설 창작 동기에 있어서의 목적성과는 별도로, 이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 강화되기 시작한 가문의식이다.
임진·병자의 양 난 이후 피폐화된 현실, 특히 예송과 그에 따른 수차례의 환국, 그리고 사족 가문 내부의 처첩 갈등과 같은 여러 문제가 그 반영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문 창달을 위한 기본적 요건으로, 충·효·열 등의 계서적 질서(階序的 秩序, 일정한 조직이나 체계 내에서 지위 따위가 높고 낮음에 따라 서열이 이루어진. 또는 그런 것)가 강조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으로 현실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작품 구성의 많은 부분이 신비적이고 환상적 요소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교녀·동청·냉진과 같은 악인형의 인물 형상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의 단면을 일정 정도 반영함으로써, 반봉건적인 요소나 측면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작품은 후대 소설 창작의 모범이 되면서, 많은 모방작들이 산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 중·반기에 들어 본격적인 소설시대를 열어주었다는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최근 이 작품과 매우 유사한 구성이나 지향, 주제의식을 보이는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중심으로, 이러한 초기 장편소설 발생의 측면에 주목해, '규방소설'이라는 유형이 새로 설정되기도 했다.
# 구운몽(九雲夢)
- 개요
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
김만중이 1687년 선천 유배 시절,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는, 한국 고소설의 대표 작품이다.
이규경의 〈소설변증설〉에 전하는 바로는, 〈구운몽〉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며, 〈사씨남정기〉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창작동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썼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서포집〉,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등이 있으며, 행장에 의하면 〈채상행 採桑行〉·〈비파행 琵琶行〉·〈두견제 杜鵑啼〉 등의 작품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 창작 배경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김춘택(金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南征記)」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귀국하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 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이윤(李昀)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 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 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근래에 『서포연보(西浦年譜)』(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졌으며,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李縡)가 「구운몽」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구운몽」의 주제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공(空)’에 있다.
공(空)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구운몽」은 『금강경』이 소설화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 구성 및 형식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국문필사본·국문활자본·한문필사본·한문현토본 등 50여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 작품 내용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이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인사드렸다.
용왕의 후대로 술이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연화봉을 구경하며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하여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양처사는 신선이 되려고 곧 집을 떠났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경사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九士良)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경사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경사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으로,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졌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여, 두 사람이 인연을 맺도록 한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려 하니,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린다.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는데, 이튿날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다.
한편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 날 황제가 베푼 주석에서 양소유를 보고, 그 환선시(紈扇詩 : 흰 깁 부채에 쓴 시)에 차운(次韻 :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여 애타게 된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 날 밤에 난양공주의 퉁소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로 간택되지만,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그 때 토번왕이 쳐들어와서 양소유가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진중에서 토번왕이 보낸 여자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양소유는 백룡담에서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주고 그녀와 또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이 물리침을 당하여 실심에 빠진 정경패를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탄하여 형제가 되어 정경패를 제1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하여지고, 영양공주·난양공주와 혼인한 후, 진궁녀와 또 만나 동침하는 가운데 진채봉임을 확인하게 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노모를 찾아가 경사로 모시고 오다가, 낙양에 들러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리고 오니, 심요연과 백릉파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 양소유는 2처 6첩을 거느리고 일가 화락한 가운데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아간다.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비회에 잠긴다.
이에 9인이 인간세계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며,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자고 할 때, 호승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꿈에서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와, 전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팔선녀가 찾아와 대사의 가르침을 구한다. 이에 대사가 설법을 베푸니, 성진과 팔선녀는 본성을 깨우치고, 적멸(寂滅 : 번거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를 이르는 말)의 대도를 얻어 극락세계에 돌아갔다.
-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의 기본설정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속에서 실현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金時習)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같은 몽유소설(夢遊小說)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꿈속에서 이룬 욕망성취가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한 점은, 다른 몽유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몽유소설과는 달리, 꿈속의 주인공인 양소유의 삶이 ‘영웅의 일생’에 따라 전개된다. 그러나 투쟁이 약화되는 대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영웅소설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구운몽」은 몽유소설과 영웅소설을 변형시켜 결합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구운몽」은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과정,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미 있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인물·심리를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적 흥미를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며, 사상적 깊이를 가지도록 하여, 유식한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구운몽」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구운몽」 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구운몽」은 고소설 창작에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어, 「춘향전」과 더불어 고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구운몽」에 관한 연구는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먼저 원본을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김태준(金台俊)은 「구운몽」도 「남정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만중이 국문으로 창작한 것을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정규복(丁奎福)은 국문 원작설에 의문을 제기하여, 한문 ‘을사본’의 모본이며 최고본(最古本)이라는 한문 ‘노존본(老尊本)’을 발견하였다.
이에 의해 이전까지 원본에 가깝다고 추정해 온 국문 ‘서울대학본’ 및 국문 ‘노존본’이 한문 ‘노존본’과 같은 계통이며, 이의 번역본임을 증명하고 한문 원작설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구운몽」은 텍스트의 연구를 통하여, 한문본이 노존본(1725년 이전)에서 을사본(1725)으로, 을사본은 다시 계해본(癸亥本, 1803)으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국문본도 노존본 계통의 국역본(國譯本), 을사본 계통의 국역본, 계해본 계통의 국역본 등으로 분류된다. 아울러 서포문중설화(西浦門中說話)가 밑받침되어, 「구운몽」의 한문 원작설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데 「구운몽」의 한문본과 국문본의 비중이 거의 같다는 점은, 계층과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 「구운몽」이 수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구운몽」은 어느 부류의 독자층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공동의 소설적 규범을 개발하는 데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운몽」의 주제 또는 사상에 관하여는 여러 연구에서 논란이 거듭되었다. 우선 주장된 바는 「구운몽」에는 삼교 화합 사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게일(Gale,J.)이 「구운몽」을 영역할 때 서문을 쓴 스콧(Scott,R.)은, 「구운몽」에는 “유교·불교·도교 사상이 섞여 있다.”고 하였다.
김태준은 작품의 여러 장면에서 나타나는 민간신앙에서 유·불·선 삼교의 화합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주왕산(周王山)은 유교의 현실주의, 불교의 은둔사상, 도교의 향락주의가 나타나, 삼교가 “혼연히 일치된 소설”이라고 하였다.
또, 이명구(李明九)는 양소유는 유교를, 성진은 불교를, 팔선녀는 도교를 각기 표상하고 있어, 「구운몽」에는 “유·불·선 세 가지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삼교 화합설에 대하여, 김만중의 불교에 대한 심취나 작품에 나타나는 불교적 성향을 들어, 「구운몽」에 나타난 사상은 오로지 불교 사상뿐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박성의(朴成義)는 「구운몽」이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을 사상적 배경으로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구운몽」이 나타내는 사상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공사상(空思想)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정규복에 따르면, 성진은 팔선녀로 인하여 미(迷)하였다가, 유교적인 부귀공명의 환(幻)을 통하여 육관대사 앞에서 각(覺)한 성진으로 되돌아갔으니, 이는 미(迷)에서 환(幻)을 통하여 각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중심으로 한 공사상과 대응된다.”는 것이다.
성현경(成賢慶)은 “넓게는 불교사상, 좁게는 공사상이 서포적으로 변용, 굴절되어 나타났다.”고 하였다. 정주동(鄭柱東)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금강경』의 공사상, 곧 공즉시색(空卽是色)·색즉시공(色卽是空)의 진공묘유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설성경은 “「구운몽」에서는 대승불법이 강조되고, 이는 금강경의 공사상을 통하여 구현된다.”고 하여 성현경, 양주동과 마찬가지로 정규복의 금강경이 바탕이 된 공사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공사상설에 대하여 김일렬(金一烈)은 「구운몽」이 금강경의 중심사상인 공사상을 투영하려 하였으나, 그 결과는 “공사상의 본격적인 차원”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구운몽」의 현실부정은 각자의 관념적인 도피이며, 이는 공사상의 한 단계로서 공사상만의 것이 아니고, 불교사상 일반의 것으로 그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동일(趙東一)은 “성진이 금강경 사상의 높은 차원의 것을 실행하지는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그 사상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사상설을 비판하였다. “상(相)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는 정도의 생각은 불교의 기본적인 전제이기에, 불교사상설이 오히려 실상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복은 「구운몽」의 종결 부분에 등장하는 육관대사와 성진의 문답에서 성진의 꿈(양소유)과 인간(성진)의 2분법을 깨뜨리고 성진과 양소유, 몸과 꿈, 장주와 호접의 1분법으로 되돌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구운몽」의 주제와 사상은 다시 『금강경(金剛經)』이 바탕이 된 공관(空觀)의 미학임을 재확립하였다.
「구운몽」을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다룬 연구로는 정규복의 업적이 대표적이다. 「구운몽」에 나타나는 환몽구조(幻夢構造)의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에서 형성된 ‘사라나비구(娑羅那比丘)’(雜寶藏經)이다. 이것이 육조시대에 중국에 들어와 당나라 때에 나온 「침중기(枕中記)」·「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앵도청의(櫻桃靑衣)」 등과 같은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작품이 다시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구운몽」 창작의 배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고미야마[小宮山天香]에 의하여 「무겐[夢幻]」으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즉 환몽구조는 인도에서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불경의 ‘사라나비구’는 설화형태에 지나지 않고, 당대의 전기소설은 소설의 초기형태에 불과하지만, 「구운몽」은 완전한 소설이라는 점이 다르다. 일본으로 건너간 「구운몽」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번안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운몽」이 동양문학권 내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구운몽」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나 『태평광기(太平廣記)』 및 『서유기(西遊記)』의 영향도 받았다.
한편, 국내의 다른 작품과의 대비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상택은 「구운몽」이 초월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춘향전」은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성현경은 「구운몽」이 「옥련몽(玉蓮夢)」(옥루몽)을 낳게 한 모태가 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 「구운몽」의 ‘여장탄금(女裝彈琴)이야기’로도 그 이야기를 기조로 한 「임호은전」·「장국진전」·「김희경전」·「옥선몽」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김병국(金炳國)은 분석심리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작품의 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고자 하였고, 이능우(李能雨)는 작품 속의 성적(性的) 상징물들을 분석하였다. 김열규(金烈圭)는 기호론적 방법론으로 작품에 나타난 ‘이산(離散)’과 ‘회동(會同)’이라는 구조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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