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
- 북학파의 비조(鼻祖)
# 박지원과 홍대용의 도의지교(道義之交)와 북학파
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과 지식 혁명을 이끈 두 개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그 하나가 성호 이익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성호학파라면, 다른 하나는 연암(燕巖) 박지원과 담헌(湛軒) 홍대용을 비조(鼻祖, 시조)로 하여 사제(師弟) 혹은 사우(師友) 관계를 형성한 북학파라고 할 수 있다.
북학파는 자신들이 추구했던 신학문과 지식 경향을 가리켜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경세제민학(經世濟民學)·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이라고 불렀다.
‘이용후생학’이란 나라 경제와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 및 생활 도구나 생산 기구의 제작 등을 다루는 학문으로, 과학 기술이나 농업·공업 기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경세치용학·경세제민학·경세제국학’은 세상을 경영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정치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혹은 사회 복지학 등을 꼽을 수 있다.
‘명물도수학’은 세상 만물을 고증·변증하거나 그 법칙을 분석하고, 수량(數量)과 도량(度量)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산학(算學, 수학), 물리학, 기하학, 천문 지리학, 생물학 등 자연 과학 일체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북학파’란 용어는 박지원의 제자였던 박제가가 1778년(정조 2)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에 연원을 두고 있다.
박제가는 춘추 전국 시대 남쪽 초나라 출신의 진량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노나라를 찾아가 선진 학문인 유학을 배웠던 역사적 사실에 비유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해, 조선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대부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킬 목적으로, ‘북학’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1755년(영조 31) 박지원은 한양 근교 양주군 석실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1동 서원마을)에 있던 석실서원을 찾아가, 홍대용의 스승인 미호(渼湖) 김원행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이때 홍대용을 처음 만나 사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지원은 19세였고, 그보다 6살 연상인 홍대용은 25세였다.
북학파의 면모와 주요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평생 언행(言行)을 모아 기록해놓은 『과정록(過庭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북학파의 주요 멤버는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이었다.
1731년생인 홍대용과 1730년생인 정철조는 스승 김원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 사이였다. 그들은 1737년생으로 자신들보다 예닐곱 살이나 연하인 박지원과는 평생 동지이자 친구로 만났다.
또한 1741년생인 이덕무와 1748년생인 유득공, 1750년생인 박제가와 1754년생인 이서구는 사상적으로는 북학에 뜻을 함께한 동지였고, 문학적으로는 백탑시사(白塔詩社)를 맺어 함께 활동한 시동인(詩同人)이었다. 이들은 신분과 나이를 떠나 모두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때 홍대용은 이들 그룹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가 당시 권세를 누린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반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감내해야 했던 서얼 출신이었다. 이들은 나이와 경륜, 신분의 귀천과 벼슬의 고하를 떠나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만물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에 일찍이 기득권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이용후생과 경세제국과 명물도수의 학문과 그 실천에 평생을 바쳤던, 박지원과 홍대용의 삶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연암(燕巖) :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선택한 ‘제비바위 협곡[燕巖峽]’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2월 5일 새벽에 한양의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서소문 밖 풀무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영조 때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 지돈령부사 등 최고위 관직에 올랐던 할아버지 박필균으로 인해 한양의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나이 31세 때 박지원이 세 들어 산 집은 대장(大將) 이장오의 별장이었다. 날마다 이장오를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이, 또한 문장을 잘 짓고 언변과 화술이 뛰어난 박지원을 즐겨 찾아오곤 했다.
시간이 지나자,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자신을 자기 당파(黨派)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불쾌하게 여겨,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고 초연히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을 확고히 했다.
1770년 나이 34세 때, 박지원은 소과(小科)인 감시(監試)에 응시해,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다.
박지원의 문재(文才)에 탄복한 영조는, 특별히 침전(寢殿)으로 입시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도승지로 하여금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였다.
이때 영조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춰가며 듣고 나서, 박지원에게 크게 격려하는 말까지 남겼다. 그래서 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벼슬아치들은 박지원을 반드시 대과(大科)인 회시(會試)에 합격시켜 자신의 공적으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한 박지원은 아예 회시에 응시하지 않으려 했으나,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 억지로 회시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으나, 시험장에 들어간 박지원은 정작 답안지는 제출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나는 과거 공부를 일찍 그만두었기 때문에 마음이 한가로웠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대신 산수 유람을 많이 했다.” ‘연암(燕巖)’을 자호로 삼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1771년 개성 유람에 나섰을 때, 개성 부근의 장단 보봉산에 있던 화장사(華藏寺)에 올랐고, 별천지가 있겠다는 생각에 동행한 백동수와 함께 그곳으로 가보았다. 황해도 금천군의 일명 ‘제비바위 협곡’, 곧 ‘연암협(燕巖峽)’이었다.
박지원은 이곳에 매료되어 장차 이곳에 집터를 닦아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곳에 있던 ‘제비바위’ 즉 ‘연암(燕巖)’을 취해 자호로 삼았다.
훗날 큰형수가 사망한 후 지은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에 연암협에서의 삶을 기록.
정조가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1778년, 절친 유언호로부터 권신(權臣) 홍국영이 자신을 해치려고 도모한다는 말을 들은 박지원은 가족들을 이끌고 연암협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그 즉시 한양을 떠났다.
그런데 박지원이 걱정되었던 유언호가 뒤이어 외직(外職)을 자청해 연암협 부근의 개성유수로 부임해 왔다. 유언호의 권유로 박지원은 개성부 안 금학동(琴鶴洞) 양호맹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언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복귀하자, 연암협으로 돌아온 박지원은 마침내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품어온 농사짓고 독서하며 저술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 바위틈은 깊숙이 입을 벌려 저절로 동굴을 만들고,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틀었으니, 이곳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바위)입니다. ···
- 연암이 친구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
연암협에서의 박지원의 삶의 모습은, 아버지 박지원을 회상하며 한 줄 한 줄 그 언행을 기록한 박종채의 『과정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1780년 홍국영이 정조의 노여움을 사 권세를 잃었기에, 한양으로 돌아온 박지원은 서대문 밖 평동(平洞)에 있던 처남 이재성의 집에 거처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종형(三從兄, 팔촌형)인 금성위(錦城尉,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해 얻은 부마 칭호) 박명원을 따라가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그토록 열망했던 청나라에 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5월에 길을 떠난 박지원은 6월 압록강을 건너 8월에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 베이징)에 들어섰다. 그러나 당시 황제가 열하(熱河)에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곳으로 갔다가 다시 연경으로 돌아왔고, 10월에 귀국하였다.
이때의 여행 체험을 기록한 책이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고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걸작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어머니처럼 여겼던 큰형수와 아버지처럼 여겼던 큰형까지 연암협에 묻혔다. 평생 권세와 명리를 멀리한 채 가난하게 살았던 박지원은 50이 다 된 늦은 나이에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큰형까지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선공감 감역(종9품)에서 시작해, 평시서 주부(종6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한성부 판관(종5품) 등 여러 관직을 거친 다음, 박지원은 1791년 나이 55세 때 경상도 안의현(安義縣)의 현감이 되어, 한 고을을 직접 맡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양선(颺扇, 풍력을 이용해 겨 따위를 없애는 농기구), 수차(水車)와 베틀, 그리고 물레방아 등을 손수 제작해 이용후생에 힘썼다. 현재 함양군 안의면에는 안의현감 시절 박지원이 제작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기념하는 ‘연암 물레방아 공원’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난 박지원은 이후 충청도 면천군수(1797년)로 나갔다가, 다시 강원도 양양부사(1800년) 직을 맡았다. 면천군수 시절에는 농업 및 토지 개혁과 상업적 농업 및 과학적 영농 기술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담은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양양부사로 부임해서는 환곡(還穀)의 방출과 수납을 조ᄌᆞᆨ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아전들의 부정비리를 바로잡는 한편, 역대 임금들의 필적을 봉안한다는 명분으로 궁속(宮屬)들과 결탁해 관리를 구타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예사로 벌인 천후산(天吼山) 신흥사(新興寺) 승려들의 횡포를 뿌리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감사가 조정의 권세가와 연결되어 있던 승려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얼버무리기만 하자, 박지원은 아무 미련 없이 관직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버렸다. 1801년이었다.
정조가 사망한 후 권력을 장악한 노론의 권신과 세도가문 아래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품은 개혁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박지원은 이전에 살았던 연암협으로 돌아갔다.
# 담헌(湛軒) : 과학자를 꿈꾼 선비의 집
홍대용의 호 ‘담헌(湛軒)’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 있던 집에 붙여진 이름이다.
‘담헌’이란 집의 이름은 홍대용이 12살 때부터 스승으로 섬겼던 미호(渼湖) 김원행이 지어 줬는데, ‘담(湛)’이라는 글자에 담긴 대의(大意)를 훗날 홍대용은 ‘텅 비고 밝으며 넓어서 바깥 사물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홍대용이 1765년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가서 사귄 중국의 지식인 반정균은, 홍대용의 몸가짐이 맑고 밝으며 집은 텅 비어 깨끗하니, ‘담(湛 )’이라는 글자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스승 김원행이 홍대용에게 지어준 ‘담헌’이라는 호는, 욕망과 이욕(利慾)에 마음을 빼앗겨 재물이나 권력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1765년(영조 41) 그의 나이 35세 때, 홍대용은 청나라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이 된 계부(季父) 홍억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갔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연행록(燕行錄)은 오늘날까지 수백 권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그 숫자가 많다. 대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연행록의 백미(白眉)로 알고 있지만, 사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역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노가재(老稼齋)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연행록 중 하나로 일컬어질 정도로 걸작이다.
『을병연행록』이라는 제목은 홍대용이 을유년(乙酉年)인 1765년 11월 2일 한양을 떠나 연경에 도착한 후, 병술년(丙戌年)인 다음 해 5월 2일 고향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붙여졌다. 을유년과 병술년에서 머리글자를 따와 『을병연행록』이라고 지은 것이다.
홍대용은 연경의 서점가 유리창(琉璃廠)의 한 골목인 건정동(乾淨衕)에서, 청나라 항주(杭州) 출신의 지식인 세 사람과 개인적 만남을 갖고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었는데, 귀국한 후부터 죽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서신과 인적 왕래를 통해 조선과 청나라를 오고가는 친교를 맺었다.
홍대용의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식은, 특정한 스승에 연원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거나 직접 각종 과학 기구를 제작해 실험해보는 과정을 통해 터득한 ‘자득(自得)’에 있었다.
나이 29세 무렵인 1759년에, 홍대용은 전라도 나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나주관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그는 근처 동복(同福, 전라도 화순) 땅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하고 있던 석당(石塘) 나경적을 친히 찾아가 과학 기술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나경적과 그의 제자 안처인(安處仁)을 나주관아로 초청해 가르침을 받고, 3년여 가까이 공을 들여 과학 기구와 도구 등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연구하고 작업한 결과물이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자명종이었다.
홍대용은 수촌 마을의 집 담헌에 사설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농수각을 세워 이들 기구들을 설치하고, 천체 관측과 과학 연구에 활용했다.
각종 과학 실험과 연구를 했던 홍대용은 1773년 나이 43세 무렵, 그 내용을 종합하고 정리한 『의산문답(毉山問答)』이라는 과학 서적을 세상에 내놓았다.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지구설(地球說), 지전설(地轉說), 무한우주설(無限宇宙說)과 같은 자신의 과학 지식과 사상을 한껏 펼쳐보였다.
특히 지구는 둥글다는 지구설에 근거해 ‘중화(中華)와 오랑캐가 따로 있지 않다’고 논하면서, 모든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이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빠져 있던 조선의 사대부나 지식인들의 편협한 사고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인식에 일대 경종을 울린 지성사적 쾌거였다.
오늘날 홍대용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자 과학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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