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제주에서 미군정이 ‘점령군’이었던 이유 세 가지

道雨 2021. 7. 6. 10:28

제주에서 미군정이 ‘점령군’이었던 이유 세 가지

 

제주 4.3 사건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

 

 

 

이재명 경기지사의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발언에 대해, 원희룡 제주지사가 “충격을 넘어 경악스러운 역사인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지난 7월 1일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한 이 지사는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새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원 지사는 페이스북에 이 지사를 가리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의 역사인식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원 지사는 3일과 4일, 5일에도 각각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 지사를 공격했습니다. 원 지사는 “이재명 지사가 주변의 운동권 참모들에게 주워들은 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각으로 지적 콤플렉스를 탈피해보려다 큰 사고를 쳤다”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원 지사는 해방 이후 한국에 온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① 친일 세력과 손 잡고 제주도를 망가뜨린 미군정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일제는 패망이 짙어지자 제주를 최후의 군사기지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은 수탈과 노역으로 광복 직전까지도 고통받았습니다.

광복이 되자 제주 도민들은 더는 누군가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제주 마을마다 항일 투쟁을 했던 인물들과 일본으로 끌려갔던 엘리트 지식인들의 주도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됐고, 치안 활동과 자치 행정까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제주도에 도착하면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고문하고 도민들을 수탈했던 친일파 출신 인사들을 기용해 인민위원회를 탄압했고, 우익들이 주장해오던 도 승격(섬도島에서 행정구역 道)을 허용했습니다.

전라남도 소속이었던 제주가 도로 승격되면서 식량지원이 끊기고, 물가는 폭등했습니다. 당시 제주는 광복 직후 6만명이 넘는 귀환인구가 돌아오면서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고, 식량과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946년에는 콜레라로 무려 350여명이 사망하는 등 고통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②  제주 4·3 사건 발생 원인 중 하나는 미군정

 

                       ▲기마경찰이 어린아이를 치고 가려고 하자 제주도민들이 항의하는 모습 ⓒ강요배

 

미군정의 강압적인 점령 정책으로 삶이 피폐해진 도민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습니다. 도내 단체들로 구성된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1947년 3·1절 기념식을 모든 도민이 참여하는 행사로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시위 절대 불허 지시를 내렸지만 도민들은 행사를 강행했습니다.

3·1절 기념식을 마친 도민들은 미군정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두시위에 나섰고, 관덕정 부근에 있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아이를 팽개치고 떠나려고 하자, 도민들은 사과와 대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군정경찰들은 오히려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젖먹이 아이와 15세 초등학생 등 총 6명이 사망했습니다.

미군정은 도민들이 군정경찰의 총에 숨진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친일파 출신 육지 경찰을 대거 동원해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했습니다.

3월 10일 제주 도내 관청과 회사, 학교 등 166개 기관 단체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도민들은 물론이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미군정은 파업 주모 혐의로 간부들을 연행했고 무차별적으로 도민들을 잡아다 가뒀습니다.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거됐습니다. 당시 3.3평 유치장에 무려 35명이나 수감되는 등 도민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광복이 됐지만 도민들은 미군정의 강압적인 점령 정책에 또다시 고통받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도민들은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인권 유린에 견디다 못해 4월 3일 일제히 무장봉기했습니다.

 

③ 물거품 된 평화협상,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

 

▲9연대장과 무장대 사이 평화협상은 우익 청년단의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결렬됐다. 미군정은 항공 촬영을 한 영상을 공개하며 ‘폭도들이 방화를 했다’고 거짓 선동을 했다.

 

4·3 무장봉기가 시작되자, 미군정은 9연대에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논의했고 ‘72시간 동안 전투중지’와 ‘무장 해제 등’을 골자로 평화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전투가 중지되자, 우익청년단원은 평화협상을 결렬시키기 위해 오라리 마을에 불을 냈습니다. 미군정과 경찰은 우익청년단원의 방화를 ‘폭도들이 했다’고 왜곡하면서 불타는 마을을 촬영해 공개했습니다.

강경진압에 반대한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문책을 받아 해임됐고, 미군정은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브라운 제주 주둔 미군 사령관)

 

미군 정보 보고서를 보면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군정이 광복 이후 제주에서 보여준 행위는 점령군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제주도민의 70%가 좌익 동조자’라며, 제주를 ‘빨갱이의 섬’(Red Island)라고 불렀습니다.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은 묵인이나 방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압을 지시했고, 학살을 조장한 가해자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4·3에 관심이 있거나 4·3 평화공원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원희룡 제주지사는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수십 번 4·3 평화공원을 방문했지만, 그저 행사에 참석하고 사진을 찍기에만 바빴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원 지사는 2008년 한나라당 의원 시절 ‘4.3 위원회 폐지 법안’을 공동 발의했고,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전에는 제주에서 열리는 4·3 기념식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원희룡 제주지사가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막말을 하고 남을 깎아내리려는 등 네거티브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4·3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하는 제주도지사라면 최소한 미군이 점령군이 아니었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 임병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