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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록이 인민군복을 입고 클린턴을 만난 까닭은?

道雨 2022. 4. 5. 11:09

조명록이 인민군복을 입고 클린턴을 만난 까닭은?

 

[이제훈의 1991~2021] _2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은 2000년 10월10일 오전 인민군복 차림으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워싱턴 백악관에서 만나 김정일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9월4일 오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 전 베를린에 도착한 김영남 위원장은 이 공항에서 아메리칸 항공 AA175편을 타고 미국 뉴욕으로 가 ‘유엔 새천년 정상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뉴욕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이 예정돼 있고,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주최하는 연회에 초청을 받은 터라, 자연스레 북-미 정상(급) 회동도 기대됐다. 유엔 새천년 정상회의를 계기로, 석달 전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일으킨 ‘한반도 평화’의 바람이 오랜 북-미 적대 관계에도 훈풍이 되리라는 기대가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 항공 보안 관리”(US aviation security official)라는 이들이 김 위원장 일행의 미국행을 가로막은 것이다. “탑승 수속을 받는데 보안요원들이 나타나 옷과 신발을 벗도록 요구하고, 인체의 국부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고 비행기 좌석을 취소했다.”

김 위원장을 수행한 최수헌 외무성 부상이 전한 사연이다. 주권국 고위 외교사절을 대상으로 상상할 수 없는 난폭한 검색이 자행된 것이다.

 

뉴욕에서 남·북·미 3각 정상(급) 외교를 고대하던 남과 북, 미국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최수헌 부상은 5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미국은 이런 야만적인 행위에 공식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며, 김 위원장의 방미 계획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그즈음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백남순 북 외무상한테 유감 표명 전문을 보낸다며 “귀국하지 말고 뉴욕으로 와서 새천년 정상회의에 꼭 참석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을 신속하게 북에 전하고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김영남 위원장 일행은 다시 5일 저녁 뉴욕행 루프트한자 비행편을 예약하긴 했으나, “평양의 지시”를 받고는 6일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뉴욕 회담은 무산됐다.

국제정치학자 차머스 존슨은 이 사태를 두고 “(1999년 5월) 미국 공군기의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에 버금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사태를 수습하려 무진 애를 썼다.

6일 백악관과 국무부 대변인 명의의 공식 ‘유감 표명’에 이어, 7일 클린턴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북이 유엔 정상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튿날 올브라이트 장관은 백남순 외무상한테 ‘사과 편지’를 보낸 사실을 공개하며 “북한이 미국의 사과 편지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실제 그날 북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는 미국 측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공식 사과의 뜻을 표명해온 데 대해 주목한다”며, 사실상 ‘수용’ 의사를 밝히곤 더는 미국을 비난하지 않았다.

 

2000년 가을 북-미 관계 개선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프랑크푸르트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그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인 수습 노력이 보여주듯, 미국 정부의 ‘작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사정을 모른 보안요원이 저지른 ‘사고’라 하기도 어렵다. 당시 독일 외교부는 아메리칸 항공 쪽에 김 위원장을 포함한 북 대표단의 지위와 중요성을 미리 통보했다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보도했다.

이 사태 수습에 깊이 관여한 고위 외교 소식통은 “북-미 관계 개선을 바라지 않은 미 공화당 쪽의 방해 공작”이라 짚었다.

김영남 위원장의 방미 무산에 이어, 백남순 외무상도 유엔 총회 참석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2000년 가을 북-미 관계 개선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 것일까. 그럴 리가. 뜻이 있으면 길도 있는 게 세상 이치.

클린턴 정부의 적극적인 해명과 수습 노력, 김대중 정부의 사려 깊고 발 빠른 중재·소통, 무엇보다 ‘워싱턴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강한 의지라는 3박자가 어우러져 돌발 악재를 신속하게 해소했다.

 

프랑크푸르트 사태가 수습 국면에 들어선 9월7일, 김계관 북 외무성 부상은 뉴욕에서 찰스 카트먼 미 한반도평화회담 담당 대사를 만나 “워싱턴에 특사를 파견할 준비가 돼 있으며 ‘조-미 공동 콤뮤니케(코뮈니케)’ 채택에도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미 양국 정부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인물이 10월 초에 워싱턴으로 찾아왔다.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이자 군부를 대표하는 실력자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다. 워싱턴에 온 조명록은 스스로를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특사”라고 소개했다.

조명록은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일인 2000년 10월10일 오전, 조선인민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김정일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조명록은 그날 아침 올브라이트를 만날 땐 짙은 회색 양복을 입었는데, 백악관으로 출발하기 전 국무부에서 일부러 인민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선군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김정일 체제에서, 권력 서열 2위이자 군부 서열 1위인 조명록의 인민군복은 그 자체로 강렬한 대미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클린턴-조명록 만남에 배석한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은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외무성뿐 아니라 군부도 함께하고 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조명록은 백악관을 방문한 첫 북한 관리였다.(조명록은 워싱턴에 오기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윌리엄 페리 초대 대북정책조정관을 만나고, 세계 정보기술산업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를 둘러봤다.)

그날 저녁 국무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올브라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 “얼었던 것은 녹을 수 있으며, 다툼의 땅은 시간이 지나면 화합의 땅이 될 수 있다. 미·북 두 나라가 안보와 정치·경제상의 차이점을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외교관으로서 전적으로 실격자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명록의 답사는 비장했다. “김정일 동지는 우리 공화국의 자주권과 영토 보전과 안전에 대한 미국의 담보만 확인되면, 대립과 적의의 조-미 관계를 평화와 친선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릴 것이다. 나는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조-미 사이의 관계 개선을 하는 데 대한 의사를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 조명록의 방미를 계기로, 북·미 양국 정부는 오랜 적대 관계 청산 의지를 담은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2000년 10월12일 발표했다.

조명록을 수행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셔먼 조정관한테 “(1999년 5월) 평양에서 윌리엄 페리(당시 대북정책조정관)가 제안한 (포괄적 해결) 방안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현안인 미사일 문제 협상을 일단락 짓고, 조-미 사이의 전면적인 외교 관계를 조속히 수립하자”는 뜻을 밝히고 집중 협의한 결과물이다.

북-미는 이 합의문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어느 정부도 타방에 대해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조선반도에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제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 “4자회담 등 여러 방도들이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고 밝혔다.

세계를 놀라게 한 파격인 ‘북-미 공동 코뮈니케’의 화룡점정은 맨 마지막 문장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께 윌리암 클린톤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며, 미합중국 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덜레인 알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준비하러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에 간다는 뜻이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온 셈이다. 미국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2000년 10월22일 0시(현지시각)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전용기에 올랐다. 출장 목적지는 평양.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미 국무부 고위관리는 이렇게 읊조렸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냉전적 적대가 끝나가는 역사적 순간에 직면해 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