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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나이 많다고 '임금피크'는 차별" 첫 판단

道雨 2022. 5. 26. 13:45

대법 "나이 많다고 '임금피크'는 차별" 첫 판단...기업 "혼란 올 것"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년은 그대로 둔 채 나이만을 잣대로 직원의 임금을 깎는 성과연급제(임금피크제)는 현행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해 무효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대다수 기업이 나이를 기준으로 제도를 운용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의 이번 무효 판정으로 기업 일선에서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경영 제고 목적인데 왜 나이 많은 직원 임금만 깎나”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퇴직자 A(67)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옛 전자부품연구원(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삭감했던 임금 차액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6일 밝혔다.

A씨는 1991년 연구원에 입사한 뒤 2014년 명예퇴직했다. 연구원은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2009년 1월에 61세 정년은 유지한 채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고, A씨는 2011년부터 적용 대상이 됐다.

A씨는 임금피크제로 인해 직급이 2단계, 역량등급이 49단계 강등된 수준으로 기본급을 받았다며, 2014년 퇴직하면서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연구원의 임금피크제가 임금이나 복리후생 분야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노동자를 차별하지 못하게 한 고령자고용법 4조의4를 위반했는지 여부였다.

1심과 2심은 “고령자고용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정했다. 대법원도 동일한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임금피크제는 연구원의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 제고를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라며 “이러한 목적은 55세 이상 직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 삭감 조치를 정당화할 만한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피고(연구원)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51세 이상 55세 미만 정규직 직원들의 수주 목표 대비 실적 달성률이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에 비하여 떨어지는데, 오히려 55세 이상 직원들의 임금만 감액됐다”고 부연했다.

연구원 측은 앞서 1·2심에서 고령자고용법에는 모집과 채용에서의 차별에만 벌칙 규정이 있으므로 임금에 관한 차별 금지 규정은 강행 규정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폈다.

대법원은 하지만 “연령 차별을 당한 사람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그 내용을 진정할 수 있고, 구제 조치와 시정 명령이 내려질 수 있으며, 시정 명령불이행 시 과태료가 부과되는 점, 고용의 영역에서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여 헌법상 평등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려는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강행 규정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정 연령 이상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라고 이번 판결 의의를 전했다.

 

지난해 6월 서울 종로구 경노사위 사무실 앞에서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공공기관의 일방적 임금체계 개편 중단과 임금피크제 지침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기업 시행 임금피크제…개별 사안별로 다르게 판단”

 

다만 대법원은 “다른 기업이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효력은 개별 사안 별로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기준으로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정당성 및 필요성 ▶실질적 임금삭감의 폭이나 기간 ▶대상 조치의 적정성(임금 삭감에 준하는 업무량 또는 업무 강도의 저감) ▶감액된 재원이 도입 목적에 따라 사용됐는 지 등을 들었다. 모든 임금피크제를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취지다.

그럼에도 이번 선고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기업 일선에선 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임금피크제는 지난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처음 도입한 이후, 2015년 모든 공공기관에 적용됐다. 일반 기업으로도 도입 사례가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상용 노동자 1인 이상 정년제 실시 사업체 중 21.7%가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특히 대법원이 “개별 사안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했지만,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온 만큼, 이번 판결 이후 향후 유사한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재계에선 이번 판결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기업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는 고용 유지뿐만 아니라 신규 일자리 창출 문제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기업들은 향후에도 이어질 임금피크제 소송 및 그에 대한 사법부 결정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는 고령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장년층의 퇴직과 실업에 대한 문제를 감소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며 “이번 법원 판단으로 제도 운용에 대한 혼란이 더 커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향후 관련 판결들이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과 법의 취지,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 신중하게 내려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노동계는 이날 판결을 반겼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이날 논평에서 “지금 같은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지속돼서는 안 된다”며 “대법원 판결은 당연한 결과로, 적극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 판결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며“노조 차원에서 임금피크제 무효화 및 폐지에 나서도록 독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금피크제 ‘합리적 이유’ 불명확”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이번 판결로 공공기관은 물론, 임금피크제를 운용 중인 일반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대다수 기업이 주로 나이를 기준으로 임금피크제를 운용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제시한 ‘합리적인 이유’에 대해 기준이 다소 불명확해, 향후 다른 소송의 결과를 봐야 ‘합리적인 이유’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예컨대 이번 사례와 달리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시행한다면 합리적 이유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짚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