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후보 시절의 흑역사... 지금 이웃나라들은 초비상
[이봉렬 in 싱가포르] 식량 무기화 되고 있는데... 한국 식량안보지수, OECD 최하위 수준
2016년 7월, 싱가포르의 한 노점 식당이 미슐랭가이드 별 하나를 받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비싼 가격의 고급 음식점만 받을 수 있는 줄 알았던 미슐랭 별을, 밥이나 국수 위에 닭고기 살을 올려 3천원에 파는 평범한 노점이 받는 건 세계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운 나라이다 보니 집에서 음식을 조리해서 먹기 보다는 집 근처 푸드코트에서 사먹는 게 일반적인 싱가포르의 특성을 고려한 미슐랭가이드의 파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미슐랭 별을 받은 식당의 주 메뉴가 닭고기 요리라는 것도 싱가포르 서민 음식을 제대로 파악한 결과입니다. 밥 위에 찌거나 조린 닭고기를 얹어 나오는 치킨라이스는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국민 음식입니다. 대부분의 푸드코트마다 치킨라이스 가게가 있어서 싱가포르 서민의 한 끼 식사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김치찌개나 짜장면 정도의 위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싱가포르의 치킨라이스 모습. 생닭을 요리해서 걸어 놓고 주문을 받으면 잘라서 내놓습니다. ⓒ 이봉렬
그런데 이 미슐랭 별을 받은 치킨라이스를 앞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레이시아가 치솟는 닭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6월 1일부터 수출을 전면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치솟은 사료 값이 닭 생산 원가를 올려 버린 게 닭 가격의 상승을 불러온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닭고기 가격의 상한제와 생산 농가에 대한 보조금까지 지급하면서 가격을 안정화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수출 금지라는 초강수를 둔 것입니다.
전체 닭고기 수입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특히 노점에서 서민들에게 내놓기 위해 필요한 생닭의 경우 거의 전량을 말레이시아산에 의지하는 상황에서, 말레이시아의 수출금지 조치는 싱가포르 식생활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싱가포르는 전시 상황
닭고기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육류입니다. 한국의 1인당 닭 소비량이 연간 15kg 정도인데, 싱가포르는 그 2배가 넘는 36kg입니다.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에서 이슬람계는 돼지고기를, 인도계는 소고기를 터부시하기 때문에 닭고기에 대한 의존이 그만큼 더 높습니다.
이제껏 닭고기를 공급해 왔던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다리로 이어져 있는 아주 가까운 나라입니다. 생닭의 경우 말레이시아에서 산채로 트럭에 실려 싱가포르로 수출된 후, 싱가포르에서 도축 및 손질을 거쳐 시장에 바로 공급됩니다. 말레이시아가 아니면 생닭을 공급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가공을 거친 냉장 혹은 냉동 닭을 브라질과 미국 등에서 공급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 싱가포르의 한 슈퍼마켓에 닭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미리 확보해 둔 덕에 아직은 닭을 살 수 있습니다. ⓒ 이봉렬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싱가포르 정부는 태국과 협의하여 냉장 닭고기를 대량으로 수입해서 판매하고, 소매점에서 생닭 대신 냉장 닭고기를 이용하도록 권장하고 있지만, 말레이시아의 수출 금지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시장에서의 혼란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닭고기만 문제가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번에는 닭고기지만, 다음에는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인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밀 수출을 금지하고 설탕 수출량도 제한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식용유 가격이 급등하자 팜유 수출을 한 때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식량이 무기가 되었고, 식품의 90%를 수입에 의존하는 싱가포르에서는 이 상황이 전시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진행되고 있는 식량 무기화 추세에 한국도 안전지대일 수는 없습니다. 세계 7대 곡물수입국인 한국의 곡물자급률(2020년 기준)은 20.2%, 식량자급률은 45.8%입니다. 주식인 쌀의 경우 자급이 가능한 수준이지만 그 다음으로 소비가 많은 밀은 0.8%에 불과하고, 콩은 30.4%입니다. 수급 상황에 따라 우리 식생활에 큰 충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 식량안보 OECD 최하위 수준
이런 상황에 대해 정부는 제대로 대처를 하고 있을까요? 올 해 4월 식량자급률에 대한 언론의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농림식품축산부는 보도자료를 내서 "밀·콩 자급률 제고 등 식량안보 강화를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의 "식량안보 강화"를 위한 노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확인해 봤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산하 경제분석기관(EIU)에서 식량안보 불안요인 등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고자, 2012년부터 전 세계 113개국을 대상으로 평가, 발표하고 있는 "세계식량안보지수"라는 게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식량안보의 핵심요소로 천명한 식량의 부담능력, 식량의 공급능력, 식품의 품질과 안전, 천연자원 및 회복력 등 4개 항목과 각각의 세부항목을 바탕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 <곡물 수급안정 사업·정책 분석 보고서> 인용)
▲ 세계 식량안보지수 추이 -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 자료를 바탕으로 국회예산정책처재작성 ⓒ 국회예산정책처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은 72.1점을 받아 29위를 차지했습니다. 9위 일본이나 20위 싱가포르보다 더 낮은 순위이며, 30위 권내 국가들이 대부분 OECD 가입국가임을 감안했을 때, 우리나라의 식량안보지수는 OECD 가입국 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곡물 수급안정 사업·정책 분석 보고서>는 이 같은 낮은 점수에 대해 "여러 항목 가운데 우리나라는 일본 농림수산성의 식량정책안보실과 같은 식량안보 전담 부서가 없고, 일반 국민이 접근 가능한 식량안보 정책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점 등에 기인하여 점수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식량안보에 대해 어떤 방안을 가지고 있을까요? 2월에 열린 대선 후보 2차 TV토론회에서 이재명 후보가 질문한 "식량안보"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동문서답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이제는 그 의미를 알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나 해서 설명하자면 식량안보는 국가가 인구 증가나 재해·재난, 전쟁 등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일정한 양의 식량을 항상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보 자격으로 토론회 나갔을 때는 몰라도 됐지만, 대통령이 된 지금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전쟁 또는 재난 상황에 준하는 식량 위기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 정부의 식량안보를 위한 대책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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