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그 많던 연설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道雨 2022. 7. 6. 10:54

“그 많던 연설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고명섭의 카이로스]

 

* 루벤스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1614).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동맥을 끊고 죽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로마제국 시대 초기의 역사가 타키투스(55~117)는 <대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이전 시대에는 재능 있고 명성 높은 연설가들이 그리도 많았는데, 어째서 우리 시대는 웅변의 영광이 이리도 피폐해져, 연설가라는 이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가?” 타키투스가 그리워한 것은 자유로운 말로써 대중을 설득하던 앞 시대 공화주의 정치였다.

 

서양에 연설가가 있었다면, 비슷한 시기 중국엔 유세객이 있었다. 연설가가 대중을 설득하는 사람이듯이, 유세객은 군주를 설득하는 사람이다. 유세객의 대표자로 꼽을 만한 사람이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비(기원전 280~233)다. 말더듬이였던 한비는 말을 익히듯 글을 익혀 당대 제일의 문장력을 갖추었고 학문을 연마해 제왕학의 거두가 됐다. 하지만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홀로 울분을 삼켰다. 그 울분 속에 쓴 글들이 훗날 <한비자>라는 책으로 묶였다. <한비자>에 실린 글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세난’일 것이다. ‘세난’은 말 그대로 ‘유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한비는 말한다.

“군주가 일을 잘못했을 때 유세객이 공개적으로 예의를 논하면서 그 잘못을 드러낸다면 곧 신변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 군주에게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멈출 수 없는 어떤 일을 억지로 저지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세난’에는 그 유명한 ‘역린’도 나온다.

“용이라는 동물은 유순해서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 밑에 직경 한자쯤 되는 역린(거꾸로 선 비늘)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어,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아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한비자>는 어떤 모순적인 긴장을 내장한 책이다. 군주가 엄정한 법률과 형벌로써 신민을 다스려야 한다는 법가 사상을 가르치는 책이자, 군주를 설득해 올바른 통치의 길로 이끄는 유세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다. 한비가 말하는 법치는 ‘법의 지배’, 곧 법이 만민을 평등하게 통치한다는 뜻이 아니라, ‘법을 통한 지배’, 곧 군주가 강력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왕은 법 밖에 있는 자이자 법 위에 있는 자다. 그런 왕을 설득하는 것이 유세다. 설득에 실패한 유세객은 왕이 내린 형벌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한비 자신이 바로 그런 형벌의 희생자가 됐다.

처음에 한비의 글을 읽고 ‘이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했던 진나라 왕 영정(진시황)은 한비를 직접 만나본 뒤 실망해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객경 이사의 말에 넘어가 한비를 가두고 사약을 내렸다. 한비의 죽음은 ‘세난’의 표본이다.

 

한비보다 100여년 전에 살았던 아테네인 가운데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라는 사람이 있다. 데모스테네스 시대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마지막 불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연설가는 그 민주주의 불꽃의 심지였다. 한비처럼 데모스테네스도 어려서 말더듬이였고 혀가 짧았다. 데모스테네스는 타고난 악조건을 피나는 수련으로 이겨내고, ‘그리스 역사상 최고의 연설가’가 됐다. 이 연설가는 말의 힘을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에 바쳤다.

데모스테네스 시대는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전역을 복속시키려고 야심을 키우던 때였다. 당시 아테네에는 필리포스의 ‘범그리스주의’를 우산으로 삼아 페르시아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 데모스테네스가 보기에 필리포스의 범그리스주의 아래 들어가는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데모크라티아, 곧 ‘민중의 통치’는 ‘제왕의 지배’와 함께 갈 수 없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기원전 351년 민회 연설에서 아테네 시민의 둔감을 질타하며, 필리포스의 남하에 맞서 군사적 대응을 서둘러야 한다고 호소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대체 언제 여러분은 해야 할 일들을 할 겁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겁니까?”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은 아테네 시민의 마음을 깨우지 못했다. 필리포스 군대는 폴리스들을 장악하며 남진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그 뒤 세차례 더 ‘필리포스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리스 최고의 언변도 시대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338년 필리포스는 아테네-테베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 본토 지배권을 굳혔다. 이 지배권을 쥐고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데모스테네스는 322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안티파트로스에게 체포될 순간, 갈대 펜에 넣어둔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데모스테네스의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조종이었다.

 

<비교 열전>에서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짝지어 서술한 플루타르코스는 데모스테네스의 상대역으로 키케로(기원전 106~43)를 내세웠다. 데모스테네스가 아테네 민주정의 마지막을 지킨 연설가라면,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의 최후와 함께한 연설가다.

키케로 시대는 카이사르가 이끄는 제1차 삼두정치, 안토니우스가 주도하는 제2차 삼두정치를 거치며 로마가 제국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데모스테네스가 민회의 시민들을 설득하는 사람이었듯이, 키케로는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키케로의 모범은 데모스테네스였다. 기원전 44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네차례나 계속한 반안토니우스 연설을 키케로는 ‘필리포스 연설’이라고 불렀다. 데모스테네스의 적이 필리포스였듯, 키케로의 적은 안토니우스였다. 키케로는 법의 지배를 무력화하고 독재의 길로 가는 안토니우스를 저지해 공화국(‘레스 푸블리카’)의 자유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키케로의 말은 독재자의 야망을 꺾지 못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에게 목과 오른손이 잘렸다. 공화주의의 죽음이었다.

공화주의의 죽음은 정치 연설의 죽음도 불렀다. 그런 사정을 로마 제정 초기의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년 네로의 개인 교사였던 세네카는, 네로가 제5대 황제가 된 뒤 <관용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 네로에게 바쳤다. 이미 앞 시대에 티베리우스-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라는 폭군을 경험한 로마는 말의 자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연설가는 사라지고 정적을 황제의 반역자로 몰아 돈을 챙기는 고발인들이 들끓었다.

세네카는 새 황제에게 관용(clementia)의 중요성을 조심스럽고도 절박하게 이야기했다. “설득할 때 힘써야 할 것은, 상대방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칭찬해주고 부끄러워하는 부분은 감싸주는 것”이라는 한비의 충고를 이어받기라도 한 듯, <관용에 관하여>는 황제에게 아부하는 말로 시작한다. 세네카는 네로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고 대신 이야기해준다.

“그렇다. 나는 온 민족의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자다. 저마다 운명과 상황이 어떻게 될지, 그 결정권은 내 손안에 있다. 나의 말이 온 국민과 모든 도시의 기쁨의 바탕이 된다.”

이어 세네카는 심중의 생각을 꺼낸다. “오늘 당신의 시민들은 모두 자신들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이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 말고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특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한결같이 칭송하는 것은 당신의 관용입니다.”

세네카는 꿀벌의 비유도 끌어들인다. “꿀벌의 왕은 가장 넓은 방을 중앙의 가장 안전한 곳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위대한 군주에게 모범이 됩니다.”

꿀벌의 왕에게 침이 없는 것은 ‘관용으로 다스리라’는 자연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세네카의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실제의 여왕벌이 침을 지니고 있고 그것도 여러차례 쏠 수 있듯이, 네로도 독이 든 침을 무수히 쏘았다. 세네카의 글을 받은 그해에 네로는 벌써 이복동생을 죽이고, 4년 뒤에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였다. 그리고 머잖아 반역의 혐의를 씌워 스승 세네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네로 자신도 그 3년 뒤 왕좌에서 쫓겨나 자살로 삶을 끝냈다.

한비가 꿈꾼 나라는 법으로써 다스리는 법치 국가였다. 세네카가 살다 간 나라도 명목상 법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군주에게 법은 통제의 수단, 지배의 도구일 뿐이었다.

권력이 법을 초월하는 곳에서 말의 자유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데모크라티아’도 ‘레스 푸블리카’도 껍데기만 남는다. 일인이든 소수든 법 밖에서 혹은 법 위에서 나라를 좌우할 때 폭정은 시작된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