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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서 없는 세금’ 인플레, 윤 정부의 헛다리

道雨 2022. 7. 15. 10:11

‘고지서 없는 세금’ 인플레, 윤 정부의 헛다리

 

최근 타계한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까지 지낸 그가 과거 인플레이션에 관해 한 발언이 새삼 관심을 끈다. 그는 소비자물가가 5%대까지 올랐던 2008년 6월 언론 인터뷰에서 물가 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플레는) 세금 중에서 고약한 세금입니다. 왜 내가 세금을 내는지 모르고 내는 세금이 바로 인플레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 인플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 고지서다. 사람들이 보유한 화폐의 가치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이 연 6%라면 1년 뒤 100만원으로는 현재 94만원의 가치를 가진 상품 또는 서비스를 살 수 있을 뿐이다. 6%의 세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플레는 개별 상품·서비스의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컨대, 휘발유 가격이나 전기요금이 큰폭으로 올랐다고 그걸 인플레라고 하지는 않는다. 인플레는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금처럼, 주변의 거의 모든 물가가 상승하는 걸 일컫는다. 인플레가 발생하면 국민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장바구니 물가가 뛰고 실질소득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조 명예교수는 당시 “지금은 국민이 성나 있다”며, 국민의 마음을 달래는 데 정책을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인플레는 잔인한 세금이기도 하다. 부자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탓이다. 이렇다 할 재산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지갑에 현금이 조금 들어 있을 뿐인데, 인플레는 바로 이 현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반면에 부유층은 인플레를 견딜 수 있는 여력이 있으며, 금 같은 실물자산에 투자하는 등 헤지를 할 수도 있다.

또한 서민들은 식료품·에너지·전월세 등 생활물가 지출 비중이 매우 높다. 올해 1분기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는 소득의 64%를 생활필수품(식료품비, 주거·수도·광열비, 의료비)에 지출해야 하지만,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가구는 그 비율이 13%에 그친다. 저소득층은 비싸지는 생필품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하니 삶이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출까지 많은 가구라면 그야말로 ‘퍼펙트 스톰’이다. 한은의 ‘빅스텝’(0.5%포인트 인상) 결정으로 이자 상환 부담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플레가 심각한 상황이니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지만, 이른바 ‘오버킬’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의사의 과잉 처방이 환자에게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처럼, 과도한 통화 긴축이 경기를 위축시키고 가계 부채 뇌관을 건드릴 수 있다는 얘기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이 용어가 널리 퍼진 바 있는데, 24년 만에 처음으로 이 용어를 다시 떠올렸다. 재정에서 충분한 완충 역할을 해줘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정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어 재정 적자를 국내총생산의 3% 이내로, 국가 채무 비율을 50%대 중반으로 관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재정운용방향을 공개했다. 재정 긴축을 하겠다는 것이다. 통화정책이 속도 조절을 해가며 긴축의 고삐를 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재정마저 긴축 기조로 선회하는 건 납득하기가 어렵다. 외환위기 때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재정·통화 정책 모두 긴축을 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런 채권자도 없는데 왜 이런 정책을 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대기업·부유층에 대한 감세와 대대적인 규제완화까지 꺼내들고 있는데, 신자유주의 정책의 재판을 보는 듯하다. 윤 대통령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놓은 시카고학파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의 신봉자이기도 하지만, 올드보이 모피아(재정·금융 관료)의 영향도 커 보인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추경호 경제부총리, 그리고 대통령실의 김대기 비서실장, 최상목 경제수석 모두 신자유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렸던 1980~90년대 미국에서 경제 공부를 한 이들이다.

현 정부는 대기업과 부유층에 법인세·종합부동산세·상속세 등 대규모 감세 약속으로 재정 여력을 줄이면서 민생을 챙기겠다고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정작 대규모 재정이 투입돼야 할 취약계층 물가 대책은 빈약한 이유다.

인플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민심 이반 현상은 불 보듯 뻔하다. 새로운 시각을 가진 경제 참모를 긴급 수혈해서라도 재정정책의 새판을 짜길 바란다.

 

박현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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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금 10.4% 오를때, 임시일용직은 3.1% 인상 그쳐

 

물가→임금→물가’ 악순환 최대 피해자는
기업 인건비 소비자가격에 전가땐 취약층 고물가 고통 심화 불보듯
정부, 취약층 소득보전 방안 필요
미국은 저임금 일자리부터 인상. 레저·접객 업종 시급 13% 올라

 

고물가로 ‘물가상승→임금인상→물가재상승’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도 올 들어 임금이 조금씩 오르는 모습이지만, 주로 대기업 및 상용직 등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자리의 임금만 들썩이는 분위기다. 상위계층의 임금이 오르는 가운데, 기업들이 늘어난 인건비를 소비자가격에 전가하면, 취약계층의 고물가 고통은 훨씬 심해질 수밖에 없다.

14일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를 보면, 올해 1~4월 근로자 1인당 평균 임금총액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6.1%로, 1년 전(4.1%)보다 높았다. 이 기간 대기업 및 중견기업(종사자 300인 이상)의 임금 증가율은 10.4%였으나, 중소기업(종사자 1∼299인)의 증가율은 4.6%에 그쳤다. 임금 인상이 대부분 큰 기업과 상용직 위주로 이뤄진 것이다.

산업별로 보면, 제조업(8.7%), 금융 및 보험업(8.0%), 전문 및 과학·기술 서비스업(7.6%) 등의 임금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서비스업인 숙박 및 음식점업 임금 증가율(4.1%)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숙박·음식점업은 저임금·비정규직이 다수인 일자리다. 종사자 지위별로는 상용직 임금이 6.5% 오르는 동안 임시일용직 임금은 3.1% 인상되는 데 그쳤다.

최근 임금이 오른 배경에는 연초 성과급 지급 등 특별급여의 영향이 존재한다. 한국은행의 지난 4월 ‘이슈노트’를 보면, 기본급 및 수당 등 지속성이 높은 정액급여도 지난해 말부터 들썩이고 있다. 고물가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가 일정 부분 반영되고 있다는 뜻이다.

 

 

고물가 시대에 상위계층의 임금만 오른다면 임금발 인플레이션 고통이 심화하게 된다. 기업들은 늘어난 고용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가격 인상에 나서게 되고, 물가는 추가로 치솟는다. 상위계층은 임금이라도 늘었으나 소득이 제자리걸음인 하위계층은 더욱 심해진 고물가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상위 기업이 높은 임금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과도한 임금 인상은 고물가 상황을 심화시키고, 임금 격차를 확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임금 상황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물가상승률이 9%대까지 치솟은 미국은 한국과 반대로 저임금 일자리부터 임금 인상이 시작돼 다른 업종으로 퍼지고 있다. <한겨레>가 미국 노동통계국의 업종별 평균 임금을 분석해 본 결과, 대표적인 저임금 일자리인 레저·접객 업종의 시급은 올해 1월 기준 전년 대비 13% 증가했다. 중임금 일자리인 교육·의료 업종(6.8%), 고임금 일자리인 전문가 비즈니스 업종(6.9%) 임금 증가율의 약 2배다.

이는 한국과 미국의 노동시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올해 5월 기준 구인 1명당 구직을 원하는 실업자 수는 0.5명에 그쳤다. 뒤집어 말하면 구인 건수가 구직의 2배인 셈이다. 고물가와 구인난을 함께 겪으며 노동자 우위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올해 5월 구인배수(신규 구인인원/신규 구직건수)가 0.75로 구인보다 구직 수요가 더 많았다.

대기업 및 상용직의 과도한 임금 인상으로 물가가 재상승하는 악순환을 막는 것이 한국 정책당국의 주요한 과제다. 임금 인상 요구에 영향을 끼치는 일반인 기대인플레이션(향후 1년에 대한 물가 인식)이 너무 오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숙제라면, 정부는 고물가에 취약한 하위계층에 대해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과 소득 보전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지난 5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한 금통위원은 “과도한 임금 인상은 기업의 비용 압박 요인으로 작용해 인플레이션 악순환을 초래하지만, 어느 정도의 임금 증가는 가계의 실질소득 하락 압력을 완화할 수 있다”며 “적정 수준의 임금 증가 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슬기 기자 sg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