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부시·네오콘은 왜 2차 한반도 핵위기를 만들었나?

道雨 2022. 8. 9. 09:52

부시·네오콘은 왜 2차 한반도 핵위기를 만들었나?

 

 

 

[이제훈의 1991~2021] _34

 

 

                      * 한반도의 탈냉전 흐름을 극력 저지해온 네오콘의 ‘행동대원’인 존 볼턴, 그리고 볼턴을 포함해 네오콘들을 정부 요직에 중용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2002년 부시와 네오콘이 한반도 평화의 기반이던 북·미 제네바기본합의(AF)를 파기하고, 제2차 한반도 핵위기를 만들어낸 건 “악과 협상하지 않는다”(딕 체니)는 그들의 전매특허인 ‘강경도덕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누려온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패권 전략이다. 네오콘식 일방적 도덕주의의 가면을 벗기면, 미국식 패권 전략의 민낯이 드러난다.

 

편견에 사로잡힌 비난이라고?

우선 부시·네오콘의 행태를 한국·일본 정부가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보자.

 

“네오콘 그 사람들은, 말하자면 중국을 앞으로 미래 가상의 적으로 생각하고, 지금 미사일방어(MD) 체제 같은 군비확장을 하려고 하는데, 그럼 뭔가 구실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게 바로 북한이오.”

 

고 김대중 대통령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창간호 회견(2006년 9월15일)에서 한 말이다.

 

실제 미국의 초당파적 기관인 군비통제협회(Arms Control Association)는 부시 행정부가 미사일방어 체제 구축의 명분을 얻으려고, 북한의 미사일 위협의 유지를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비판한 바 있다.

 

“(1990년 9월) 가네마루 (방북) 때는 (미 국무장관) 베이커가 핵 문제를 꺼냈다. 결국 미국의 말이 옳았음을 나중에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면 왜 좀 더 일찍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가 움직이면 미국은 반드시 제지하려 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을 실무적으로 준비한 일본 외무성의 후지이 아라타 북동아시아 과장이 후나바시 요이치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김정일 최후의 도박>, 126쪽).

 

“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노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 사회당의 공동선언”(1990년 9월28일) 직후 1차 핵위기가 터지고, 고이즈미 방북과 “조일 평양선언” 채택 직후 2차 핵위기가 터진 건, ‘역사의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말을 모나게 하지 않으려는 외교관의 습성과 일본 문화를 고려할 때, “우리가 움직이면 미국은 반드시 제지하려 든다”는 이 증언은, 매우 강한 불만의 정조를 품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HEUP) 의혹을 한·일 정부에 처음으로 제기한 때는 2002년 8월29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강연을 구실로 서울에 와서, (2002년) 8월29일 국방장관과 외교통상부 차관을 만나, ‘북한이 1997년부터 추진해온 고농축우라늄계획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면서, ‘이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장애 요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어두었다. ‘그’는 존 볼턴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다. 일본 정부에도 같은 날 같은 내용이 통보됐다.

 

대표적 네오콘인 볼턴의 고농축우라늄계획 의혹 통보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월29일은 일본 정부가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 및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 계획을 공식 발표(8월30일)하기 하루 전이다.

서울에선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2차 회의(8월27~30일)가 열리던 때다. 이 회의에선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공사 남북 동시 착공 등 8개 항의 합의가 있었다.

 

9월17일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 “유감스러운 일로 솔직히 사과하고 싶다”고 했고, 고이즈미 총리는 식민지배와 관련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과의 뜻을 표명”하고 “경제협력 실시”를 약속했다(조일 평양선언 1조).

남북은 9월18일 한반도의 끊어진 혈맥을 이을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착공식을 했다.

 

세계적 탈냉전 조류에도 ‘냉전의 외딴섬’으로 남아 있던 한반도와 동북아의 냉전적 적대 해소와 화해협력·평화에 강력한 추동력이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즈음 북한 당국은 ‘개혁·개방’으로 간주될 만한 전향적 조처들을 쏟아냈다. ‘7·1경제관리개선조처’(7월1일), 신의주특별행정구 기본법 채택 및 신의주특구 지정 발표(9월12일), 남북 군사직통전화 개통(9월24일), 금강산관광지구 지정(10월23일)과 관광지구법 채택(11월13일), 경제시찰단(단장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 등 18명) 방남(10월26일~11월3일), 개성공업지구 지정(11월13일)과 개성공업지구법 채택(11월20일) 등이 대표적이다.

 

7·1경제관리개선조처와 신의주특구 지정 등을 두곤, 김정일 위원장이 북-일 관계 정상화와 맞물릴 100억달러 규모에 이를 일본의 경제원조 및 차관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는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행보를 두고, ‘북이 사상 최초로 한·미·일 모두에 공격적일 정도로 관여하고 있다’고 짚기도 했다.

 

2002년 가을 남북한과 일본의 역사적 화해협력 움직임이 뜻대로 풀려나갔다면, 동북아 탈냉전은 몽상이 아닌 현실이 될 터였다.

 

하여 2002년 8월29일 볼턴의 ‘고농축우라늄계획’ 의혹 통보는 문제적이다. 이즈음 부시 행정부가 한·일 정부에 통보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새로운 ‘정보판단’의 요지는 이렇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시설을 지하에 건설 중인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한다.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2004년 후반기부터는 연간 2~3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의 ‘고농축우라늄’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다.”(임동원 <피스메이커>, 517쪽)

 

리처드 아미티지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은 “2002년 9월, 북한이 더는 연구개발 프로그램이 아닌, 생산 프로그램 단계에 이미 진입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했다(2003년 2월4일 상원 외교위원회).

부시 행정부는 북이 고농축우라늄 생산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며,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부시 대통령 특사’로 임명해 평양에 보내(2002년 10월3~5일)는 등의 요식 절차를 거쳐, 북·미 제네바기본합의 틀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체니·볼턴 등 강경 네오콘들의 주장과 달리,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결정적 증거’라 선전된 이 정보의 정확성을 두고 정부 안에서 “합의 불가능한 논쟁”이 지속됐다고, 회고록 <최고의 영예>에 적어놨다.

 

무엇보다 1994년 10월~2002년 12월 한반도 평화의 주요 기반이던 북·미 제네바기본합의 체제가 작동 불능의 수렁에 빠지고, 남북한과 일본의 맹렬한 화해협력 노력마저 좌초하자, 부시·네오콘들은 더는 북의 ‘고농축우라늄계획’ 의혹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았다.

 

네오콘들의 수선스러움과 달리, 미 중앙정보국이 의회에 제출한 2003~2005년치 정보평가보고서의 북한 핵기술 관련 부분엔 고농축우라늄 관련 언급이 전혀 없다. 심지어 조지프 디트라니 중앙정보국 북한담당관은 2007년 2월27일 상원 군사위에 나와 “북한의 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이 현존하는지 중간 수준의 신뢰도(at the mid-confidence level)를 갖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전의 “높은 확신”(high confidence)에서 정보평가 수준을 크게 낮춘 것이다.

 

‘중간 수준의 신뢰도’란 정보기관 자체 개념 규정에 따르면, “(특정한 한가지 경우로만 해석할 수 없고) 대안적 평가와 다양한 경로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정보”다. 요컨대 정보분석 전문가인 디트라니의 의회 증언은 ‘(2007년 2월 현재) 북한에 고농축우라늄계획이 현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고백으로 읽어도 과하지 않다.

 

2차 핵위기 발발을 막으려 동분서주한 임동원은 당시 볼턴 등 네오콘의 행태를 두고 “그해(2002년) 여름부터 대북관계 개선이 활성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두 정부에 대해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기 위한 정보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짚었다.

 

그러곤 2차 핵위기 발발과 관련해 이런 회한에 찬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강경파들이 구축한 ‘신냉전의 방벽’을 극복하기에는 힘에 부쳤고, 핵개발로 강경 대응하려는 북한을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국내의 고질적인 냉전적 사고와 보수우경화 추세, 그리고 ‘무조건 미국을 추종해야 한다’는 사대주의적 조류 또한 극복하지 못했다.”(<피스메이커>, 546쪽)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