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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신조선책략’

道雨 2022. 8. 26. 08:48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신조선책략’

 

 

 

“각 당사국은 다른 쪽 당사국의 상품에 대하여 내국민 대우를 부여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2조에 명시된 문구다. 이 협정의 정의를 규정한 1조를 제외하면 사실상 협정의 첫번째 원칙에 해당한다. 협정문은 ‘내국민 대우’에 대해 “동종의, 직접적으로 경쟁적인 상품에 대하여 (해당 정부가) 부여하는 가장 유리한 대우보다 불리하지 아니한 대우를 말한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미 모두 상대국 상품에 대해 차별 대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미국이 지난 16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인플레 감축법’의 전기차 보조금 지원 규정은 이 원칙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다. 이 법은 북미(미국·멕시코·캐나다)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를 구입한 소비자에게만 최대 7500달러(약 1천만원)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항은 법 시행일부터 즉시 적용하게 돼 있어, 한국산 전기차는 곧바로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조항은 특정 국가에 부여한 혜택을 다른 국가에도 동일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최혜국 대우 원칙에도 위배된다.

 

자유무역의 수호자였던 미국이 국제 통상규범을 무너뜨리는 ‘질서 파괴자’로 변해가고 있다. 미국이 현재의 국제 통상질서를 만든 주도국이었지만, 더이상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이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보여준다.

 

미국은 지난 9일 발효된 ‘반도체 지원법’에서는 미국 정부 보조금을 받는 전세계 반도체 회사들의 중국 내 첨단공장 신·증설을 금지하는 조항까지 넣었는데, 이번엔 자동차 산업에까지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중국이 전기차·배터리 등 미래 자동차 산업 생태계를 장악해 들어가자, 더 이상 지금 조건에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 이런 미-중 대결의 유탄을 직접적으로 맞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아차는 올해 미국 내 전기차 시장점유율 2위로 치고 올라갔으나, 이번 보조금 배제로 인해 가격경쟁력에서 크게 밀릴 처지에 빠졌다. 반도체는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특성상 삼성전자·에스케이(SK)하이닉스도 적기에 중국 공장의 신·증설을 하지 않으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한-미 동맹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경제안보동맹’으로 격상됐다고 자랑도 했다. 그런데 이번 미국의 결정은 현 정부의 대미 외교정책이 빈껍데기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정부의 대중국 정책도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페이스북에 ‘사드 추가 배치’라는 한줄 공약을 올렸는데, 중국은 이달 초 ‘3불 1한’까지 들먹이며 압박하고 나섰다. 박근혜 정부가 섣부르게 결정한 사드 배치를 문재인 정부가 어렵사리 봉합해놨으나, 지금 정부가 다시 화를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사드 문제도 기본적으로 미-중 패권 다툼의 유탄이다.

 

한국은 요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신세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는 숙명적으로 강대국의 각축장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구한말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와 지금은 천지개벽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올바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엔 우리가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에서 미·중도 무시하지 못할 레버리지(지렛대)를 갖고 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에 있는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기술협력을 요청한 것은 우리가 지금껏 보지 못한 장면이다. 미국의 ‘칩4’(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추진에 대해 중국이 한국에 ‘중재자’ 역할을 주문하는 기류도 보기 드문 장면이다.

 

1880년 청나라 외교관 황쭌셴(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계”(친중 결일 연미)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것을 권고했다. 강대국 간에 힘의 균형을 만들라는 얘기였다. 아무리 그럴듯한 방도라도 스스로 힘이 없으면 강대국의 희생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그 뒤의 역사는 말해준다.

 

지금은 미-중 신냉전과 높아진 우리의 위상을 고려한 ‘신조선책략’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다. 세가지를 핵심 축으로 삼아야 한다.

 

첫째는 어느 강대국과도 소원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황쭌셴 식으로 표현하자면 ‘연미 화중 통일’이다. 미국과 연대하고 중국과 친화하며 일본과 소통해야 한다.

 

둘째는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경제와 안보의 분리를 추구하며 미·중 모두에 통상규범 준수를 요구해야 한다. 미-중 충돌 시 중국과의 경제 단절을 우려하는 나라는 우리뿐만이 아니다. 세계 60개 나라가 중국을 최대 무역파트너로 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애플을 비롯한 중국 사업이 많은 미국의 기업·금융기관들도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을 원치 않는다. 이들 나라 및 미국 기업들과 연대해 미-중의 완충 역할을 해야 한다.

워싱턴의 영향력 있는 경제전문가인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명예이사는 저서 <미국 대 중국>에서 “미-중 경제를 디커플링(분리)할 게 아니라, 경제 이슈들을 민감한 안보 이슈들과 디커플링해야 한다”며 “독일을 비롯한 미국의 핵심 동맹국들이 이 전략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셋째, 우리가 동아시아 평화질서 구축의 주도자로 나서야 한다. 냉전 시기 유럽 국가들이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창설해 냉전적 대결을 완화하고 공존을 달성했던 것처럼, 동아시아판 안보협력기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대만해협 위기 등 미-중간 첨예한 갈등이 빚어질 경우 우리나라도 연루될 위험이 있는 만큼, 지역 안보협력체를 통해 최악의 사태로 비화하는 걸 막아야 한다.

 

피동적으로 있어서는 또다시 강대국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약소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실력으로는 버거워 보인다. 내치도 엉망인데, 고도의 외교 역량이 필요한 외치에서 이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

 

 

박현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