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초대 경찰국장의 수상한 행각

道雨 2022. 8. 27. 08:37

초대 경찰국장의 수상한 행각

 

 

 

[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초대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 치안감의 지난 행각이 의혹을 낳고 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별안간 잠적했고 '대공(對共)' 관련 특별 채용으로 경찰로 변신한다. '프락치'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학살의 주역들이 대놓고 사람들을 깔아뭉개던 1980년대의 대한민국이었지만 용감한 젊은이들의 싸움이 멈춘 적은 없었다. 권력자들이 ‘이만하면 잠잠하겠지’ 한숨을 돌리는 그 순간 데모가 터졌고, ‘이 정도면 겁먹겠지’ 하고 안심한 등 뒤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끈질긴 저항을 분쇄하고 싶은 정권도 온갖 수법을 동원했는데, 그중에는 ‘프락치 공작’도 있었지. 프락치란 상대 진영인 양 위장하여 활동하며 정보를 빼내거나 조직을 교란했던 이들이야.

한국외국어대 85학번 윤석양은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1990년 5월 입대했다. 철원으로 자대 배치를 받은 뒤 정신없는 이등병 생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출이 왔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요원들이었어. “너 혁노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에 있었지? 다 알고 있어.”

이후 그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어. 보안사 요원들의 요구는 자기들의 프락치가 되라는 것이었지. 서빙고 분실을 경험한 이들에 따르면, 보안사 요원들은 사람을 실컷 고문하다가 한강물 소리가 들리는 방에 데리고 가서 이렇게 협박했다고 해. “너 죽여서 한강물에 던져버리면 귀신도 모르게 그냥 바다에 흘러가서 고기밥 되는 거야.”

 

 

자신의 존재가 소리 소문 없이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럴 힘을 가진 사람들이 코앞에서 눈을 부라리는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버거운 공포일 거야. 윤석양도 굴복했다. 조직원을 불었고 보안사가 비밀리에 운용하던 카페에서 동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찍어’주었다. 윤석양은 완벽한 보안사의 ‘프락치’가 된 셈이었어.

일설에 따르면, 윤석양은 그가 활동하던 조직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 실질적 의미는 없는 분노의 표현이었지만 그만큼 윤석양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는 뜻이겠지. 보안사 처지에서 윤석양은 이미 ‘잡힌 고기’였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온 사람이었다. ‘이왕 버린 몸’, 더 열성적으로 과거의 동지들을 잡아들일 소지가 다분한 유망주였다.

 

 

 

그런데 1990년 9월23일 새벽 2시, 그 보안사의 유망주가, 자신이 속했던 조직을 와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프락치가 몰래 부대의 담장을 넘는다. 그의 품 안에는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폭탄이 들어 있었지. 그 폭탄의 정체는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정치인들과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 등 1300여 명의 개인정보와 사찰 기록이 담긴 디스크와 관련 서류였어.

1990년 10월4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윤석양 이병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실이 드러났을 때, 대한민국은 엄청난 폭풍에 휘말린다. 정권 타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이 즉각 날아갔으며, 보안사는 그 명패조차 바꿔 ‘국군기무사령부’로 변신하게 된다.

 

윤석양은 양심선언 당시 보안사가 프락치 40여 명을 관리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즉각 제대 후 6급 군무원 채용’(보안사 간부가 윤석양에게 했던 회유) 같은 당근에 혹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생사람을 납치해 프락치 활동을 하지 않으면 생매장해버리겠다는 협박(1989년 보안사 요원의 김정환 납치 사건)에 굴복한 경우도 있겠고, 아르바이트하듯 공권력으로부터 용돈을 받는 가짜 대학생도 있었을 거야.

당시 공안 당국은 조선 후기의 관리들이 가톨릭 배교자들을 끄나풀로 활용해 가톨릭 교인들을 때려잡았듯,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을 잡아채 어떻게든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수법을 좋아했다. 가장 파괴적이고 효율적인 프락치 운용 방식이었으니까. 그 모든 젊은 영혼들에게 보안사, 나아가 독재정권이라는 괴물은 하늘까지 닿는 키의 거인이자, 온몸을 갈가리 찢어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윤석양은 정확히 탈영 2년 후, 1992년 9월23일 헌병대에 체포된다. 수형 생활 중에 만난 왕년의 동지는 윤석양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부었다고 해. 출옥한 뒤에도 어떤 옛 동료는 그에게 극언을 쏟아내며 무시하고 질타했을 정도였지. 윤석양 역시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이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피할 수 없어서 오랫동안 은둔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단다.

 

 

‘밀정(密偵)국장’이라면 모를까

 

윤석양은 프락치 노릇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무너져가던 양심의 대들보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인간의 존엄함을 구현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어.

 

양심의 소리는 아주 작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조차 거북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라는 토로에서, 윤석양의 고뇌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끝내 그 소리에 귀를 막을 수 없던 그가 보안사를 탈출하던 날은, 인간의 존엄함의 빛이 어둠을 가르는 순간이었고, 인간의 존엄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가 승리한 시간이었어. 인간의 영혼을 도구로 삼는 어둠의 세력에게 끝내 왜 너희들이 어둠인가를 가르쳐준 날이며, 한때 거인에게 꿇어 엎드렸던 다윗이 기어코 돌팔매를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시킨 ‘디데이’였다.

 

윤석열 정부는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겠다면서 행정안전부 산하에 ‘경찰국’을 신설했다. 그 초대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이는 김순호 치안감이야. 그런데 1989년 경찰에 특채되기 전 그의 행각이 수많은 의혹을 낳고 있어.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대에 강제징집됐으며, 전역 후에도 운동을 계속하다가 별안간 잠적했고, ‘대공(對共)’ 관련 특별 채용으로 경찰로 변신한다. ‘프락치’ 혐의를 지우기 어려운 행각이지.

 

김순호 본인의 해명이다. “주체사상에 물들어가는 운동권에 회의를 느껴서 고향으로 내려갔고 1989년 7월 대공분실을 찾아가 자백했다. 체포 대신 ‘대공 특채’를 소개해줘 새 삶을 살게 됐다.”

아빠는 그가 주체사상에 반대할 수 있고 그것에 ‘물드는’ 동료들을 배신해서라도 대한민국을 구해야겠다 생각할 수는 있다고 봐. 동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배신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경찰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이라면, 신념을 떠나 본인의 행적을 평가받아야 해. ‘반주사파’ 활동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누구의 지시에 따라 무슨 일을 했는지. 경찰 특채라는, 파격적인 특혜를 ‘자백’만으로 받은 배경은 과연 무엇인지, 숨김과 보탬이 없는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밝혀야 할 의무가 있어.

 

단순한 ‘대공’ 전문가가 아니라, 14만 경찰을 통제하고 지휘할 직위를 지닌 이가 경찰 입문 과정부터 석연치 않은 과거를 지녔고, 그 과정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다면 어찌 경찰국장일 수 있단 말이냐. ‘밀정(密偵)국장’이라면 모를까.

 

과거 대한민국의 어두운 세월 내내 프락치라는 단어는 뭇 사람들의 신경을 강철검처럼 날카롭게 곤두세우게 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수많은 이들은 자신의 영혼이 쥐에 쏠리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그 영혼의 점진적인 파괴를 경험해야 했고, 정권의 불법적인 공작과 터무니없는 월권 속에 존엄한 인간의 권리들이 어이없이 갈려 나갔다.

 

그 어둠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경찰국장 김순호는 그래서 그의 과거에 책임을 져야 한다. ‘밀정국장’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단지 그의 옛 동료들, 그리고 14만 경찰, 나아가 그 역사를 함께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자신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의 직무는 그 진실 위에서만 굳건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본인의 솔직한 고백과 냉철한 평가 위에서 순탄할 수 있을 테니까.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