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주적만 바뀐 채 계속되는 미국의 동아시아 100년 전쟁

道雨 2022. 12. 23. 12:10

동상이몽

 

 

주적만 바뀐 채 계속되는 미국의 동아시아 100년 전쟁

 

 

 

오랜 세월 일체 종이신문을 보지않고 살았다. 아주 잠깐 궁금하고 답답함을 느꼈으나 점점 더 후련하고 상쾌한 마음이 커졌다. 종이신문(특히 조중동)은 독약 아니면 마약이다. 이 나라 종이신문은 백해무익이다.

그런데 최근 뉴스 다루는 일에 다시 몸 담으면서 어쩔 수 없이 또 종이신문을 보게 됐다.(독약을 먹게 됐다) 다시 옛날의 울화병이 도지는 것 같다.

 

오늘(21일) 아침, 한반도 상공을 나는 미 F-22 스텔스기와 B-52H 전략폭격기 사진이 약속이나 한 듯 조중동(한국일보는 그냥 덤)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어떤 이들은 이 사진을 보며 통쾌함과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공포를 느끼고 불쾌해졌다가 결국은 화가 난다.

 

통쾌함을 느끼는 저들이 어리석은 것인가, 공포심을 갖는 내가 불필요하게 민감한 것인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푸틴과 젤렌스키는 각 나라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이 미국(무기상과 석유상,금융자본가들)은 떼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용감한가, 어리석은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 간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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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만 바뀐 채 계속되는 미국의 동아시아 100년 전쟁

 

[창간기획: 신냉전, 판을 바꾸자] ④-2 샌프란시스코 1.0체제

 

 

              * 미국 사우스 다코타 주의 러시모어 산 암벽에 조각돼 있는 미국 역사상의 위인들. 왼쪽부터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일본에게 한국은 우리에겐 쿠바”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일본은 이틀 뒤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전 달인 1월에 일본군은 덕수궁에 쳐들어가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 황실을 겁박해 조선을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그때 일본이 들이민 이른바 한일의정서는 ‘일본을 믿고 시정 개선에 대한 충고를 듣겠다’는 항복문서였다.

 

얼마 뒤인 3월 15일, 일찍부터 일본 지지를 표명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조선침략의 총지휘자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 스에마쓰 겐죠가 찾아갔다.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 방문길에 자신을 찾아 온 스에마쓰가 일본의 한국 지배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자, 루스벨트는 이렇게 맞장구쳤다.

“바로 우리(미국)와 쿠바의 관계처럼 말이지요.”

 

루스벨트는 5월 9일 슈테른베르크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일본에 속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 미국이 이의를 제기할 일은 없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일본이 한국에서 미국에게 제공된 여러 권리들을 존중해 주는 것뿐이다.”

다음해인 1905년 1월 1일에 일본군은 중국 뤼순의 러시아군 요새를 점령했고, 그해 5월에는 부산 앞바다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궤멸시켰다. 두 달 뒤인 7월 29일 미국 일본 두 나라는 ‘가츠라-태프트 협정(밀약)’을 맺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악연’의 뿌리를 더듬어 보기 위해 일본 역사학자 나가타 아키후미 조지대 교수의 책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한국>(미라이사, 1996)을 토대로 그 악연의 조각들을 좀 더 살펴보자.

 

                            * 미국 27대 대통령으로 1905년 태프트-카츠라 밀약의 주인공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자료=주한미국대사관)

 

 

태프트=루스벨트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는 동양의 항구적 평화에 기여”

 

밀약을 맺은 7월 29일,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필리핀 초대 총독, 1909년에 미국 대통령)는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낸다.

“가츠라 다로 백작(당시 총리)과 태프트 장관은 7월 27일 오전, 오랜 시간 비밀회담을 했다. 회담 중에 오간 화제(話題) 중에 필리핀 제도, 한국, 극동에서의 전반적인 평화유지를 위한 여러 문제들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교환했다.”

 

 

그 보고 전문 세 번째 조목에 한국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한국문제에 관해 가츠라 백작은, 한국은 우리와 러시아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반도(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전쟁 뒤에도 한국을 그 자신에게 맡겨 놓는다면, 이 나라는 전쟁 전에 존재한 것과 같은 국제적 분규를 부주의하게 되살리는 습성으로 되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앞서 얘기한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은 한국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감으로써, 일본이 다른 대외 전쟁에 돌입할 필요 아래 다시 놓이게 만들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확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태프트 장관은 가츠라 백작의 관찰이 정당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인적 의견으로는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요구할 정도까지의, 일본국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 수립은 지금 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동양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 기여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견해를 진술했다.”

 

 

다음 달인 8월 미국과 영국의 협의, 제2차 영일동맹, ‘가츠라-태프트 협정’으로, 특히 한국 문제를 중심으로 한 극동 문제에 대해 미국, 영국, 일본은 ‘삼위일체’가 돼 합의를 완성했다.

그해 11월 1일 루스벨트가 영국 외교관 스프링 라이스(나중에 주미 영국대사)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돼 있다.

 

“나는 제2차 영일동맹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 이것을 교섭하는 것이 기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아시아의 평화, 따라서 세계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 이상의 내용을 영일 양국에 회신하면서 알렸다. (…) 그때 태프트는 영일동맹에서 제안되고 포츠머스 조약(러일전쟁 강화조약)에서 승인된 것과 같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에 우리가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특별히 언급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과 일본이 서로 보장해 주고 영국이 이를 보증하는, 이런 말도 안되는 범죄행위가 장황하고 역겨운 국제법의 이름으로 ‘한국과 필리핀, 아시아의 평화, 세계평화를 위해’ 저질러졌다.

 

          *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수립 70주년을 맞아 방한한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씨가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의사 대형 좌상을 바라보고 있다. 2018.8.14(연합뉴스 자료사진)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일본 우익의 자기 고백

 

그 4년 뒤인 1909년 10월 26일, 스에마쓰의 장인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105년이 지난 2014년 1월 20일 기자회견장에서, 아베 신조 정부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는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 하얼빈의 그 역사적인 자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 한중 양국에 몇 번이나 우리나라의 견해를 전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지극히 유감”이라며, “일방적인 평가를 근거로 한국과 중국이 손잡고 국제적으로 전개하는 듯한 움직임은 지역의 평화와 협력 관계 구축에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는 기괴한 논리를 폈다.

 

누구를 위한 평화와 협력관계란 말인가.

일본 외무성 이하라 준이치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그 전날 한중의 주일 대사관 공사에게 전화해 “지극히 유감”이라며 항의했다.

 

일본 정부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제국주의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 및 안 의사를 처형한 당시의 군국일본 정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컨대 나치 독일의 히틀러 암살 공작 가담자들을 지금의 독일 정부가 테러리스트라고 공개 비판하는 게 가능할까.

 

일본과 독일의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한 쪽은 과거를 부정,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했다는 의식의 소산이고, 다른 한 쪽은 과거를 찬양하며 계승한,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식의 소산이다.

 

여기에도 미국이 깊숙이 관여돼 있다.

두 패전국 전쟁범죄 처리에 미국은 모두 관여했지만, 독일은 나라가 분단되고 수도 베를린이 전승국들에 분할통치당할 정도로 전쟁 관련 과거를 완전히 부정당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전범처리 주도국인 점령국 미국이 전쟁범죄 책임을 거의 묻지 않았고, 전범들을 일부만 처형하고 전범 최고책임자인 천황을 비롯한 대다수 전범들을 한때 공직에서 추방했다가 모두 복권시켜,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재기용했다. 가해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대신 미국은 일본을 독점하고 냉전의 교두보로 키웠다.

 

 

                     *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피격된 지점에서 일본 경찰이 수색을 벌이고 있다. 2022.7.8(JIJI PRESS=연합)

 

 

 

 

동아시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우파 정부가 100년 전의 제국 일본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이런 정신(심리) 상태는 이런 사정 탓도 있지만, 지금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판단할 경우에나 가능하다. 이토 히로부미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그들이 안중근의 나라와 지금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식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래 100년이 넘도록 동아시아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남북한만 ‘정전’이란 이름 아래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베 신조 사망 뒤에 쏟아진 그에 대한 찬사들 중에는 “국가관을 지닌 정치가”, 자위대의 위헌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신념과 결단의 인물”, 전후 70년 담화에서 이른바 ‘자학사관’과 결별을 고한 “일본인의 긍지를 되살린 사람” 등이 있다. 대체로 자민당 주류 우파 정치세력의 사고 및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일본인 다수도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베 신조의 전쟁, 통일교의 뿌리

 

월간 <세카이>(세계)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평론가 데라시마 지츠로는, 아베의 말 중에는 국가와 국체는 있지만 기묘할 정도로 민주주의에 관한 발언이 없다는 데에 주목했다.(2023년 1월호)

 

“결국 아베의 정치에는 ‘전후 민주주의는 병균(세균)으로 제거해 버리고 싶다’는 속내가 명멸한다. 그것은 항상 ‘통치자로서의 관점에서 본 정치론’이기 때문이다. ‘관저 주도 정치’로 내각 인사국이 성청(정부 부처)의 고위 인사를 장악함으로써 손타쿠(미리 알아서 처신하기) 관료 무리들을 양산하고, 검찰이나 일본(중앙)은행 인사까지 과잉 개입해 민주정치의 근간인 권력 분립과 상호 견제를 무너뜨렸다. 아베 정치가 내건 ‘일본을 되살리자’는 구호가 전후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쟁 전의 일본으로 회귀하려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2017년 3월의 ‘각의 결정’으로 교육칙어를 학교의 부(副)독본으로 만든 것이다.

1948년 6월에 중참 양원에서 ‘교육칙어 등의 배제, 실효(失效)확인 결의’로 없애 버린 것을 각의 결정으로 뒤집어 엎은 것이다. 이는 (…) 8할 이상이 유교적 가치에 근거한 덕목으로, ‘의용(義勇)공봉(公奉)으로 천양무궁(天壤無窮)의 황운(皇運)에 부익(扶翼)해야 한다’는 국민의식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이 전쟁 전의 천황제 국가의 기본 이념을 ‘부독본’으로나마 의회의 승인도 없이 각의 결정으로 다시 교재로 삼기로 결의한 것이다. 집단적 자위권 용인도 각의 결정을 통해 해석개헌으로 강행한 것으로, 의회주의를 공동화(空洞化)시켜 버린 것이다.”

 

 

                    *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2005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통일교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AP=연합)

 

 

 

아베 사망 이후 지금 일본 정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가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정치 개입 문제다.

1954년에 문선명 목사가 세운 통일교가 일본에서 인증을 받은 것은 그 10년 뒤인 1964년이다.

1984년에 문선명 목사가 미국에서 탈세 죄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 판결을 받고 코네티컷 교도소에 수감돼 13개월을 복역했다.

 

그런데 그해 11월,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문 목사의 석방을 탄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문 목사를 반공의 굳건한 동지(盟友)로서 도우려 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그의 우파 반공주의 노선에 부응한 대표적인 미국 매체 중의 하나가 <워싱턴 타임스>로, 통일교가 운영한 신문이다.

 

그때 일본 총리가 ‘일본 불침항모’론으로 유명한 나카소네 야스히로였는데, 이른바 ‘론-야스’ 관계로 호명되던 미일 유착 시절의 당시 나카소네 정부에서 3년 8개월간 외무대신(외상)을 지낸 사람이 아베 신타로다. 아베 신타로는 아베 신조의 아버지고,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 일본 최장수 총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사토 에이사쿠다. 따라서 기시와 사토는 모두 아베의 외조부다.

이들의 관계는 미국과 일본이 얼마나 깊숙이 서로 얽혀 있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례다.

 

 

아베 외조부 A급전범 기시 노부스케, CIA 돈으로 일본 ‘55년 체제’ 주도

 

기시 노부스케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총무청 차장, 도조 히데키 전쟁내각 등에서 군수차관과 상공장관 등을 지낸 A급 전범으로, 일본 패전 뒤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12월 23일 도조 등 7명의 A급 전범들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기시는 그 다음날 석방됐다. 석방된 그가 찾아간 곳이 전후 일본의 틀을 잡은 요시다 시게루 정부 관방장관을 하고 있던 사토 에이사쿠였다.

미국이 왜 같은 A급 전범인 그만 살려 석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일본은 패전 뒤부터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리고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고 1952년 4월에 그 조약 발효될 때까지 미 점령군 통치를 받았다) 기시는 그 뒤 정계에 복귀해 총리(1957.2~1960.7)까지 했다.

 

일본 정치를 자유민주당과 사회당으로 정립시켜 사회당을 늘 3분의 1 의석을 지닌, 영구히 집권이 불가능한 체제로 만든 보수 합동의 ‘55년 체제’를 만드는데 기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55년 체제를 만들 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기획하고 돈을 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공 냉전전략의 일환이었다.

 

1960년의 ‘안보투쟁’, 1970년의 안보·전공투 운동 등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맹렬했던 진보적인 학생운동 시대에 등장한 것이, 한국 중앙정보부(KCIA) 지령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국제승공(勝共)연합’이었다. 이 승공연합이 통일교 및 기시 노부스케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아베 신조 사망 직후에 통일교가 그 사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통일교가 아베의 외조부 기시가 키운 조직이며, 집권 자민당 정치인 다수가 통일교의 돈을 받거나 선거 때 도움을 받아 당선됐다는 사실들이 보도됐다.

 

                   * 1985년 1월 2일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일본 나카소네 총리가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가지며 함께 웃고 있다. (AP=연합)

 

 

 

친미반공 전두환 5공체제를 구출한 한미일 공조

 

레이건과 ‘론-야스’관계로 불렸던 나카소네가 총리가 된 뒤 맨 처음 방문한 나라가 한국이고, 바로 다음에 간 나라가 미국이었다.

나카소네는 당시 폭압적 유혈 집권 과정과 정권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전두환 정권이 내세운 ‘극일’ 등의 난제들로 얽혀 있던 한일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세지마 류조를 서울에 밀사로 보냈다. 삼성 등 한국 재계의 주선으로 서울에 간 세지마는 40억 달러의 차관 제공 문제를 해결하고, 나카소네의 방한도 성사시켰다.

 

일제 대본영과 관동군 참모였던 세지마는, 패전 뒤 소련군에게 포로가 돼 11년 동안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돌아온 뒤, 재벌 이토추상사 회장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를 모델로 한 소설이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불모지대>인데, 그의 회고록 <이쿠산카>에 그런 비화들이 담겨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급사와 그해의 12·12 신군부 권력 찬탈사태, 1980년의 비극적인 ‘광주사태’를 거치면서 흔들리던 냉전의 최전선 반공국가 한국의 친미 군부정권의 위기 사태는, 일본의 돈과 미국의 군사력으로 일단 해소됐다. 그야말로 삼위일체의 냉전시대 한미일 삼각공조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되풀이돼 온 패턴으로, 미국 주도의 전형적인 냉전전략이며, 미국이 만든 한민족 이산의 분단선을 그 중심축으로 삼아 유지되고 있다.

 

             *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담에 참석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2022.11.12(AP=연합뉴스)

 

 

적기지 공격능력으로 전수방위 내버린 일본의 재무장, 그 뒤엔 미국

 

지난 16일 기시다 후미오 정부가 각의 결정으로 통과시킨 안보 관련 3문서의 핵심내용도, 미국 주도의 냉전전략의 새로운 형태(신냉전전략)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담긴 적기지 공격능력(자민당은 이를 ‘반격능력’이라는 말로 얼버무렸지만)과 공격적인 통합방공미사일체제(IAMD)는, 미군이 ‘창’ 역할을 하고 일본 자위대가 ‘방패’ 역할을 했던 미일동맹의 기존 안보군사체제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일본 자위대가 이제부터는 ‘일본군’으로 미국이 맡아 온 창 역할을 일부 떠맡게 됨으로써, ‘전수방위’ 원칙은 물론 일본 헌법이 ‘평화’헌법으로 불리게 만든 제9조의 군대 보유와 전쟁, 집단적 자위권 포기를 사실상 모두 날려버렸다.

이를 위해 일본은 방위비(군사예산)를 1.5~2배로 늘린다. 미국은 주도면밀하고 집요하게 이런 군사안보전략 전환을 요구해 왔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한국은 또다시 3국 군사력이 일체화된 신냉전적 안보군사 전략에 자동 통합될 공산이 커졌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 배제당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국 이익 위해 변조

 

저명한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 하타다 다카시가 1962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불과 몇 년간의 전쟁 중에 입힌 손해에 대해 일본은 버마(미얀마), 필리핀, (남)베트남 등에 배상했는데, 30여년이나 고통을 준 조선(한반도)에 대해 어찌 책임을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라는 분노가 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남북을 통한 조선사람 공통의 감정이다.”(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일본은 미얀마에 2억 달러, 필리핀에 5억 5000만 달러, 인도네시아에 2억 2308만 달러, 베트남에 39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겠다는 협정을 맺었다. 총 10억 1208만 달러의 이 배상금 지불은 1976년 7월 필리핀에 대한 지불을 끝으로 완료됐다.

 

하타다의 지적대로 2차 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게 일시 점령당했던 나라들은 이처럼 배상을 받았다. 배상금을 받았다는 것은 이들 나라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정식으로 초청돼 조약 서명국 자격을 얻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일제 침략·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들인 남북한과 중국(베이징과 대만 모두)은 강화회의에 초청받지도 서명국이 되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배상도 받지 못했다.

배상금은 아니지만 ‘독립축하금’ ‘경제협력자금’ 따위의 이름으로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를 받은 것은, 장기간에 걸친 굴욕적인 협상을 거친 뒤인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였다.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사진=일본국립공문서관)

 

 

왜 한국과 중국은 전쟁을 마감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초청도 받지 못했는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강화회의 개최와 조약 체결 특명을 받은 존 포스트 덜레스 고문(나중에 국무장관) 등 미국과 영국 관리들은, 한국이 교전국으로 연합국 지위가 아니었고, 일본 패전 뒤에야 비로소 독립했다며, 실질적인 대일 교전국만이 조약 서명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필리핀이나 미얀마, 인도네시아도 독립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맞서 싸운 것이지, 모두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정부 자격으로 싸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방 연합국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잠시 일본군에 점령됐다가 서명국이 되고,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반환 명단에서 사라진 독도

 

한국이 서명국이 되지 못하고 배상도 받지 못한 것은, 서방 제국의 식민지가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 뒤에 체결됐기 때문이다.

그 두 사건을 거치면서 당시 소련 등 사회주의권에 대한 냉전적 대결체제를 본격화한 미국은, 공산화된 중국과 북한을 서명국 명단에서 배제했다.

 

미국은 처음엔 조약 초안에 한국이 일본 패전 때까지 줄기차게 맞서 싸웠다는 점을 평가하고, 전쟁 중인 반공국가라는 점도 고려해 연합국·서명국 명단에 넣었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빼 버렸다.

일본의 줄기찬 반대와 북한 및 중소와의 관계 등을 계산한 영국의 반대로, 미국은 초기 입장을 바꿔 한국을 희생시키고, 냉전 동맹들의 결속을 다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바람에 애초에 한국에 돌려줄 땅으로 명기됐던 독도도 반환 영토 명단에서 사라져 버렸다.

 

쿠릴열도 남단의 4개 섬에서 독도, 오키나와,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남중국해의 필리핀 인근 남사, 서사, 동사 군도에 이르는 섬들이 처음에는 모두 돌려 줄 주인들이 있었으나, 냉전과 함께 반환 명단에서 사라졌다.

모두 일본열도와 아시아 대륙 사이를 가르는 띠처럼 열을 지어 있는 이들 섬을 두고, 하라 기미에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는 서방세계가 일본을 지키는 ‘쐐기’처럼, 또는 공산주의 세력권으로부터 일본을 갈라놓는 ‘벽’처럼 보인다고 했다.

 

“조약상의 모호한 자구들은 부주의 탓도 실수 탓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미해결인 채로 남겨진 것이었다”고 한 그의 말은, 그런 맥락 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주적만 바뀌었을 뿐인 미국의 동아시아 100년전쟁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미국 동아시아 전략, 그리고 한국관은 2차 세계대전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되살아났고,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주적만 소련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미국은 결국 또 다시 일본을 선택하고, 한국에겐 그 일본을 지키는 종속적 기지 지위를 맡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미국 공식방문 중 루스벨트 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해 루스벨트 대통령 동상을 살펴보고 있다. 2021.5.21(연합뉴스 자료사진)

 

 

 

좀 길어졌지만, 루스벨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인 1913년에 낸 자서전에 남긴 구절 일부를 소개한다.

 

“일본은 (영국이 이집트를 취했을 때에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는데, 내가 보기엔 이 사례에서 약속을 지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치도 자위도 전혀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 한국은, 실제로 금방 일본에 병합돼 버렸다….”

 

루스벨트 등 제국주의자들이 남긴 말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피해자들이 당한 것은 전적으로 피해자들이 무능하거나 자충수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주장을 펴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담합을 정당화하고, 책임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심을 찌르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 다음해인 1914년 9월에 루스벨트는 중립을 선언한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을 비난하면서, 우드로 윌슨 정부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달라며 <아웃 룩>에 글을 기고했는데, 그 중에서 한국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것이다. 한국이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조약을 통해 장엄하게 서약을 했다. 한국은 조약을 실시하기에는 그 자체가 무력하고, 스스로 중대한 이해를 갖지 않은 다른 나라가 한국인이 자신들을 위해 전혀 하지 않는 일을 그들을 위해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조약은 한국이 스스로 잘 통치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한국이 어떤 의미에서도 전혀 스스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드러나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 다른 대국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자손에 대한 의무가 조약상의 여러 의무들보다 우선한다고 봤다. 그 때문에 정말 좋은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때, 일본은 조용히 조약을 파기하고 러시아와의 거래에서 이미 보여 주었고, 나중에 독일과의 거래에서도 보여 준 실무적이고 세련된 효율성으로 한국을 취했던 것이다. (그것이) 시도됐을 때 조약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저절로 증명하면서, 이보다 더 소용없는 것이 없을 정도까지 갔다.”

 

 

인종적 편견이 강했던 루스벨트는, 같은 백인 국가 벨기에가 독일에 침공당한 것은 마음이 좀 아팠던 모양이다. 여기서도 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은 무능한 한국 탓이라고 거듭 주장하며 자신의 담합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을 병합해 중국으로 확장해 갈 경우, 미국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일본은 아직 그럴 힘이 없었고, 당시의 그는 일본이 러시아의 확장을 막아주기를 바랐다.

그가 걱정했던 대로 조선을 차지한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확장을 계속하다, 결국 미국을 쳤다.

 

사우스 다코타 주 러시모어산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4명의 미국 위인들 중엔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들어 있다. 그 바위처럼 미국이 세계를 보는 눈은 시어도어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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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 / 한승동 / 2022-12-18)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