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사회

道雨 2023. 2. 3. 09:16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사회

 

 

 

 

 

계묘년 새해가 왔다.

올해가 마침 토끼해라고 하니 토끼의 가장 큰 특징인 귀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떼기로 하자.

“사람이 왜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둘인지 아느냐? 그건 내 말을 하기 전에 우선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예부터 종종 들어왔다.

한갓 속담인지 아니면 어떤 현인의 말씀인지 모르겠으나, 가끔 혼자 생각하며 되새겨본다. 과연 나는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인가, 하고.

독선과 아집이라는 말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들리는 요즘 세상에 우리 모두 한번쯤 새겨야 할 말 아닌가 싶다.

 

모두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세상이다. 여기엔 내 편, 네 편이 따로 없다. 모두가 자기만 가장 아프고 괴롭고 옳다고 한다. 만인이 다 아는 대통령부터 이름 없는 필부에 이르기까지, 이 점에서는 분열 없는 ‘국민통합’이 이뤄져 있다.

나아가 자기와 생각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만 뭉쳐 서로 공감하고 의기투합하면서, 생각이나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말도 안 섞는 것은 물론, 조롱과 혐오와 배척의 언어를 맘껏 던지며 사실상 전쟁 상태를 기꺼이 유지하고 있다.

‘내로남불’은 만고의 보편법칙이 되며, 내 편이 하는 일은 팥으로 메주를 쒀도 아름다운 연금술이고, 상대편이 하는 일은 콩을 심어 콩을 수확해도 음모와 의혹의 협잡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떤 규준과 척도도 나에게 불리하고 남에게 유리하면 한갓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전락한다. 게다가 상대주의나 다원주의를 넘어 이제는 탈진실의 시대 아닌가. 객관적 진실이나 진리 같은 것은 애당초 없다는 듯, 그저 내가 알고 믿고 좋아하는 것만 절대적 진실이고 진리이니, 남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을 이해하는 데에 공들일 이유가 없다.

 

이처럼 목하 한국 사회는 오로지 입만 하나 살아 있고 두 귀는 없는 이상한 사람들의 세상이 돼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자로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비슷한 이해관계나 의사를 가진 사람들과 집단, 당파를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경쟁하고 충돌하고 심지어 적대하는 것은, 사회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한쪽의 생각과 이해의 절대성이라는 것은, 다른 쪽의 생각과 이해의 절대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존중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이 ‘상대적 절대성’이라는 모순과 배리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성립한다. 좋은 세상이란 아마도 언젠가 기적처럼 도래할 어떤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런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여러개의 다름과 차이들이 무한히 경합하고 충돌하면서 어떤 잠정적 합의 상태를 거듭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살아 있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이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다. 모두가 들을 귀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돈을 갈구하는 정치가들이나 장사꾼들, 생각하는 것보다 먹고사는 것이 먼저인 보통의 대중들이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래서는 안 되는 부류인 언필칭 지식인들조차 이렇게 ‘입만 있고 귀는 없는’ 불통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대학의 기능화, 아카데미즘의 고립화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로 인해 지식과 담론의 사회적 유통과 교환, 검증 체계가 붕괴한 탓이 크겠지만, 지식사회의 담론 지형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를 관찰하면 이런 현상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모두가 메아리 없는 산속에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대화와 토론 대신 무시와 매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2019년 ‘조국 사태’를 고비로 이른바 범진보 지식인 사회가 심각한 분열을 겪은 뒤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하고 있는 것 같다.

 

지식장의 분열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 다양성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새로운 지식과 담론의 탄생은, 그럴 만한 사회적 변화의 반영이며 닫힌 사회의 숨통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그 기원이 의심스럽고 논리가 부실하다고 해도, 다른 견해나 담론의 존재, 탄생을 매도하고 적대하는 것은 지적 파시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 사회적 진영논리가 지식장까지 강력하게 침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신자, 관종, 파시스트, 어용, 대깨문, 명빠, 토착왜구…. 정제되지 않은 낙인찍기가 정당한 논거나 증빙도 무시된 채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난무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칫하면 이런 매도를 당할지 모른다는 거리낌이 생각 있는 지식인들의 말문까지 닫게 하고 있다. 이는 또 다른 야만이며 무형의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다.

 

대화와 소통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동어반복의 지적 마스터베이션은 잠시 멈추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불편한 자리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

마침 귀가 큰 토끼의 해가 시작됐으니 이제 먼저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부터 시작하자.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고, 그다음에 내 입을 열도록 하자. 그리고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가늠하고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토론하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접점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이 공감의 접점들을 확대해 공동의 담론으로 만들어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며, 이렇게 마련된 공동의 담론은 이 무한 적대의 시대를 넘어서는 매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제도언론이나 학술기관이 나서도 좋고, 가능하면 어떤 사회적 기구 같은 게 만들어지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형식으로든, 이를테면 과거사 인식, 정치 양극화, 586 기득권, 공정성 담론, 남북 관계, 한-일 관계, 노동 문제, 젠더 갈등, 세대 갈등, 기후위기 같은 지식장의 분열과 적대를 낳는 여러 민감한 주제들과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체제 구축과 같은 주제들에 관한 대립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계급장을 떼고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와 유의미한 접근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낭비적이고 위험한 적대적 정체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