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어른거리는 트럼프의 그림자
우리가 민주주의에 환호하는 이유는 차이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동의하지 않을 자유, 비판의 자유는 혼잣말에 그칠 뿐이다.
사람들의 믿음과 태도를 좌우하는 사고와 감정은 편향될 수밖에 없다. 토론과 소통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많은 쟁점에 이견을 드러내야 더 좋은 답이 나온다.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깔끔할 수도 조용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토론과 소통 과정에서 표출되는 긴장과 갈등을 껴안기 위해 고안된 제도가 민주주의다.
윤석열 정부가 10일 출범 1년을 맞는다. 때맞춰 많은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는 특별히 지난 1년 우리 사회 민주주의가 어떤 변화를 맞고 있는지 주목했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60%는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평가했다. 답변 태도는 대체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지하는지 여부에 따라 갈렸다. 하지만 유독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소통·포용 노력’에 대해선 세대와 이념성향을 떠나 부정적 평가(70%)가 많았다.
정작 윤 대통령은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한 윤 대통령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지난 2일 출입기자들과 한 오찬간담회 때 있었다.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 재개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여러분은 섭섭할지 몰라도 나는 살이 찌더라”는 농담과 함께 “맥주나 한잔하면서 얘기하는 간담회를 했으면 한다”고 했다.
“용산어린이정원에 임기 내내 아이들이 뛰어놀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누군가는 소탈하고 솔직한 윤 대통령의 성정이 읽힌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윤 대통령에게 소통은 기자들과의 환담 정도면 충분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여전히 정치적 반대자와 비판 언론을 마주할 용의는 없어 보인다. 탈권위와 소통을 내세우며 수천억원의 예산을 써서 용산 시대를 열었지만, 대통령실 주변을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가 넘쳐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도 찾아보기 힘들다.
윤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 ‘법과 원칙’의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합법과 불법, 유죄와 무죄의 경계가 또렷한 양자택일의 세상이다. 그런 그에게 정치권은 상반되는 주장과 이견이 오가는 혼돈의 회색지대로 보였을 것이다. 반대자에 대한 관용과 권력행사의 절제라는 정치인의 덕목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피의자 신분인 제1야당 대표에게 검사 피가 흐르는 대통령이 한 테이블에 앉는 걸 허락할 리 없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법전에나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야당 대표를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젊은 여당 대표의 쓴소리는 내부총질이자 배신으로 봤다. 그새 여당은 대통령의 스피커로 전락했다.
노동조합은 깡패짓이나 하는 범죄집단이었다. 무차별적인 건폭(건설 현장 폭력) 수사는 결국 한 노동자의 비극을 불러왔다.
비판적 언론은 가짜뉴스로 대통령의 평판이나 깎아내리는 고약한 존재였다. 그 언론사는 대통령 전용기를 타지 못했고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지난 1년 대화와 소통, 협상과 타협은 법과 원칙에 자리를 내줬다. 맨 앞자리에 검찰이 동원됐다. 때론 법치의 이름으로 법치가 파괴됐고 정치는 형해화됐다. 법의 지배는 한때 민주주의를 확장했지만, 내 편이 아닌 정치적 반대자를 향한 언어가 되면서 민주주의의 적이 돼가고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정치의 사법화, 양극화가 그 확실한 징후다.
“상대 정당을 범죄집단으로 몰아세우며 정치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정부 및 정치조직을 비난하는 시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주요 신호다.”(<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 심화하는 정치 양극화로 미국 민주주의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음을 몇몇 지표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 트럼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하면 과도한 진단일까?
정치가 법치에 앞서는 미덕은, 양자택일이 아닌 양립의 해법을 통해 최상의 결과를 얻는 데 있다.
민주주의의 적은 이견이나 혼란 자체가 아니라,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이재명 : 기획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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