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윤석열 정권도 역사가 된다

道雨 2023. 7. 14. 10:23

윤석열 정권도 역사가 된다

 

 

 

 

 

 

 

 

대통령의 위압적인 발언이 거듭되고 있다.

더욱이 전에 없던 유튜브와 에스엔에스(SNS)까지 더해지니 주위가 참으로 어수선하다.

 

나라 밖에서는 남미 콜롬비아 아마존 정글 지대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실종됐던 어린이 4명이 40일 만에 구조됐다. 아이들 어머니와 조종사 등 어른 3명은 사고 당시 숨졌고, 13살 맏이 레슬리와 9살, 4살, 생후 11개월 막내까지 4남매는 밀림의 계속되는 폭우, 야생동물과 해충의 위험을 이겨내고, 과일과 씨앗, 뿌리 등을 먹으며 40일 동안 버티며 생존해 기적적으로 생환한 것이다.

4남매 구조작전을 이끈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은 “레슬리의 정글 지식과 보살핌 덕분에 세 동생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4남매가 위기를 극복하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맏이 레슬리의 리더십이었다. 레슬리의 지혜로운 역량, 곧 뛰어난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험난한 밀림에서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 등이 40일이나 버텨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이 “13살 레슬리의 용기와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찬사를 보낸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탁월한 리더십이 절실한 경우가 어찌 이런 때뿐이겠는가. 13살 레슬리의 리더십을 전하는 기사는 민망스레, 한국의 정치 지도자 특히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력을 연상시키며 뇌리를 무겁게 짓누른다.

시민이 159명이나 희생된 이태원 참사 책임을 외면하는 윤 대통령의 모습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 입에 붙은 비속어들 그리고 연설문에서조차 “북한 공산집단에 대하여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 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소통의 정치력은 찾아볼 수 없다.

 

언급된 사안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읍소하고’ ‘노래 부르고’ ‘돈과 출세 때문에 반국가적 작태를 일삼는’이라는 표현을 연설 원고에 넣어 꼭 대통령의 목소리로 내뱉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과거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이 계엄령이나 긴급조치를 발령하면서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던 시절의 공안기관들이나 구사했을 언어다.

 

앞서 레슬리의 경우 콜롬비아 국방부 장관이 언급한 것처럼, 열대우림에서 생활했던 경험과 그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기를 극복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폭넓은 경륜보다 잘못을 찾아 벌주는 검찰관 이미지를 과시한다. 인사 정책을 검사나 그 관련 인물들 위주로 수행하고, 권력 행사는 피의자 신문하듯 전횡한다면, 책임정치도 신뢰의 리더십도 없다.

 

정부의 정치하는 문법(文法)은 서초동 검찰의 수사하는 수법(手法)과 차원이 다르며, 검찰 의식만으로 국정철학을 담아내기 어렵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난제인 대학입시제도도 단칼로 휘둘러서 처리하려 한다. 그 무모함에 우려가 커지자, 집권당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검사로 수십년간 수많은 입시부정 사건을 다뤘기 때문에 대입 제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해박한 전문가’라고 윤 대통령을 추어올렸다.

씁쓸하게도 이 발언은 윤석열 정권의 성격을 설명하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어서, 장차 역사에서 요긴하게 잘 인용되는 사료가 될 것 같다.

 

전근대사회에서 군주의 발언을 ‘윤발’(綸綍)이라 했는데, 이는 군주의 지시·명령은 실처럼 가늘어도 ‘인끈’(병권을 가진 무관이 매어 차던 사슴 가죽 끈)처럼 귀중하고 동아줄같이 튼튼하다는 의미다.

통치자의 발언은 역사에 기록되고, 흐른 땀을 다시 피부 안으로 밀어 넣지 못하듯이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신중해야 한다고 경계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그를 옹위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실처럼 빈약한 발언들이 어떻게 동아줄처럼 막강해지는지, 그리고 왜 최고 통치자의 발언을 역사에 기록해야 하는지,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는 다른 유형을 살피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수사를 통해서 역시 대통령직에 관한 해박한 전문가가 돼서인지, 윤 대통령은 역사의식 같은 건 유념하지 않는 듯하다.

역사는 물론이고 발언이나 연설할 때 당장 눈앞에 있는 청중들만 염두에 둘 뿐, 카메라 너머 시청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외교 무대에서 비속어로 막말을 하고도, 오히려 이를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며, 적반하장으로 덤터기를 씌운다.

좁은 안목과 짧은 이해력으로 헛다리 짚은 정책을 내세우다가 반대 여론의 후폭풍에 직면해도, 그 모두를 다른 사람 탓으로 둘러씌운다.

정권이 바뀌고 한 해가 지나도록 툭하면 지난 정부 탓을 하고, 부처 관료들에게 잘못을 전가해 책임을 묻곤 한다.

결코 잘못이나 오류를 시인하거나 진솔하게 성찰하지 않는다.

남 “탓을 하는 인생은 이미 루저다”(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데, 이 정부는 지난 정부 탓밖에 할 줄 모르는 이미 실패한 정부라는 말인가.

 

대통령이라는 위상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은, 강압적인 권력이 아니라 신뢰받는 리더십이다. 또 권력을 앞세운 보복으로 강제하는 침묵이 아니라, 갈등과 다양한 의견을 조화롭게 융합해 저력을 든든히 하는 정치력이어야 한다.

 

정상 외교차 출국하면서 <문화방송>(MBC) 취재진을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하고, <한국방송>(KBS)에 대한 응징으로 시청료 분리 징수를 강행하는 옹졸함으로 대통령의 위상이 높아지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주화운동희생자추모제 후원을 트집 잡아 6월항쟁 기념식 주최를 취소하고 불참하는 일이, 정부 차원에서 농담처럼 자행되는 것도, 제대로 된 국가의 권위와는 먼 치졸한 모습이다.

 

폐쇄적 조직의 보스들은 여의치 않을 때 말을 바꿔 상황을 호도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과거 이승만의 특무대, 박정희의 중앙정보부, 전두환의 보안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정권의 근간이었다. 지금은 검찰이 그 구실을 한다.

‘정치는 잘했다’는 전두환을 따라 정권의 희생양을 만들고, 이승만기념관을 만들어 1950년대 극단의 반공 정책을 이어받으려고 한다.

 

윤석열 정권의 행보는 지나간 역사의 익숙한 기억들을 소환한다.

그렇게 루저의 기시감을 주는 윤석열 정권도 지나간 역사가 된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