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입틀막’, 예산보다 깊은 상처

道雨 2024. 3. 8. 09:32

‘입틀막’, 예산보다 깊은 상처

 

 

* 2월16일 대전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석사 졸업생인 신민기씨가 “알앤디 예산 복원하십시오”라고 소리치는 순간 경호원이 입을 틀어막으며 제지하고 있다. 대전충남사진공동취재단

 

 

 

2월16일 카이스트 졸업식 사태를 보도한 사진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졸업생 신민기씨를 제압하는 대통령 경호원의 굳센 팔뚝과 손이었다. 단호하게 뻗은 그의 팔뚝에는 국가 원수의 안위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더 놀라웠던 것은, 잔뜩 힘을 준 그 손이 향한 곳이 신민기씨의 몸통이나 팔이 아니라 입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통령의 신체가 다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싫어할 발언을 막으려는 팔뚝, ‘그 입 다물라’는 손이었다.

 

경호원의 굳센 팔과 손이 ‘연구개발 예산을 복원하라’는 주장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 방침이 잘못됐다는 불만은 지난해부터 여러 곳에서 터져 나왔고, 신민기씨의 입을 막는다고 해서 그러한 목소리가 공론장에서 사라질 리도 없다. 카이스트 졸업식 이후에 연구개발 예산 삭감의 영향을 받는 연구 현장의 소식이 계속 보도되고 있고, 신민기씨도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경호원의 손이 틀어막은 것은 신민기씨의 구체적 주장이 아니라, 한 과학도의 자유로운 정신 자체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학도에게 자유란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힘주어 설파했던 ‘자유’와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남과 다른 생각을 말할 자유, 자연과 사회를 통틀어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고 발견하고 실험할 자유이며, 따라서 권력자의 눈에는 반항으로 보일 수도 있는 생각과 행동을 할 자유다. 노벨상 수상자의 발표에도 틀린 것이 있다면 학생이든 누구든 손을 들어 질문하고 오류를 지적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오랜 자부심이다.

 

카이스트가 학교의 핵심 가치로 삼아 그토록 함양하고 싶어 하는 ‘창의’와 ‘도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과학자는 기존의 생각, 특히 이른바 석학과 권위자와 권력자의 생각에 도전하며 새로운 무엇을 싹틔우려는 의지, 그것을 테스트하기 위해 번쩍 손을 들고 질문하는 용기, 이후 토론과 검증을 통해 더 나은 지식, 해법, 세상을 찾아나가는 끈기를 통해 성장한다.

 

‘코리아’의 K를 ‘퀘스천’(질문)의 Q로 바꾸어 ‘QAIST’라는 표어를 만들 정도로, 과감하게 “질문하는 인재”를 키우려 했던 카이스트의 정신은, 경호원의 굵은 팔뚝에 무참히 짓눌리고 말았다.

팔뚝의 메시지는 “질문하는 인재”가 되려면 입이 틀어막힐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질문을 하더라도 따지는 질문은 삼가고 ‘교수님,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혹시 한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같은 유순한 질문만 하라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주어진 조건 내에서 잘 푸는 것’. 이것은 과학이 단단한 토대를 구축하며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 더욱 중요했던 것은, 주어진 문제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 자체를 의심하는 태도, 문제를 재정의하거나 없던 문제를 새로 설정하려는 시도였다.

창의와 도전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괜히 문제를 만들려 하지 말고 주어진 문제, 위에서 던져주는 문제나 잘 풀라는 훈계, 내려주는 연구비에 토 달지 말고 빨리 풀기나 하라는 압력은, 이 모든 창의와 도전의 정신을 억누른다. 경호원의 굳센 팔뚝과 손은 그 압력의 물리적 실현이었다.

 

졸업생들을 축하하러 왔다가 연단의 지도자와 다른 생각을 말하려다 들려 나가는 과학도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제 과학자가 되려는 자녀나 친구에게 입조심하라는 당부를 할 것이다. 입이 틀어막힌 채 졸업하는 선배를 본 카이스트 학생들은, 이제 권위자 앞에서 ‘당신의 알고리즘은 틀렸습니다. 저의 데이터와 분석에 따르면…’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또 총장, 학장, 학과장, 연구소장, 연구과제 책임자, 지도교수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 그 입이 틀어막힐까 봐 주저할 것이다.

 

과학도들이 자유로운 정신에 상처를 입은 채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다음 학생들은 그 정신이 위축된 채로 카이스트에 입학한다면, 이제 카이스트는 어떤 대학이 될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도 어디선가 굳센 팔이 뻗어올 것이 두려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과학도들이 늘어날 때 한국 과학은 어떻게 될까. 올해 카이스트 졸업식 사태가 한국 과학에 남긴 심리적 상처는 연구개발 예산 삭감액보다 더 크고 깊다.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

 

 

이젠 스스로 입을 틀어막는다

 

* 대전 카이스트 교정에 내걸린, 학위수여식 강제퇴장 사건에 대한 학교 쪽의 공식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펼침막. 이윤종 제공

 

 

지난달 24일 찾은 대전 카이스트(총장 이광형) 캠퍼스. 봄이 곧 올 거라는 성급한 기대를 비웃듯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휑한 캠퍼스에는 마치 근조 메시지처럼 흰 천에 검은 글씨가 적힌 펼침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학위수여식 사건에 대한 카이스트의 공식 입장을 촉구한다.”(학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2022년 가을 학기에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날은 2024년 봄학기 개강일. 새벽 기차를 타고 대전에 왔다. 서대전역에서 만나 택시를 함께 타고 온 동기가 비를 맞고 있는 펼침막을 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경호처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얼마 전에 국회의원 그렇게 쫓아냈다가 엄청 욕먹었는데 어떻게 똑같은 짓을 한대요?”

“대통령이 질책했으면 또 했겠어? 대통령이 잘했다고 하고, 흡족해하니까 똑같이 움직인 거겠지.”

 

 

이 대학원에선 다섯가지 기술 수업(정보·환경·바이오·나노·융합)을 전공필수로 들어야 한다. 한 과정당 통상 8명의 교수가 3시간씩 강의한다.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선진국들이 사활을 걸고 기술 개발에 각축을 벌이고 있는 양상은 분명히 각인된다.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미국의 기술패권이 다르파(DARPA,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로 상징되는 국가적 연구개발 지원에서 비롯됐음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를 추격만 할 게 아니라 선도자가 될 수 있는 혁신적 원천 기술 개발을 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교수들이 많다. 미래 먹거리를 개발하겠다는 공학자의 열정과 애국심이 느껴진다.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국가 연구개발 예산 삭감을 밀어붙이고, 2024년 2월의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 나타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알앤디 예산을 복원하라”는 구호가 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경호처 직원들은 석사학위를 받아야 할 학생의 입을 틀어막았고, 사지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한 학기 일찍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면 내가 참석했을 현장이기도 했다.

당시 학위수여식에 참석했던 이들은 “대통령 축사 중에 갑자기 학생 한명이 일어나 뭐라고 말했다. 행사장이 커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더라. 누가 싸운 줄 알았다. 사건의 내용은 나중에 기사로 알게 됐다”고 말한다.

강성희 진보당 의원이 윤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근접 거리에서 “국정 기조를 바꾸시라”고 조언한 상황과도 차이가 크다. 신민기씨의 외침은 대통령에게 가닿지도 않았다. 대통령에게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대통령실은 신민기씨가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이라는 점을 부각하며 ‘정치적 기획·선동’이라고 역공했다. 그러나 그는 정당인 이전에 학위수여식의 주인공인 카이스트 대학원생이다. 신민기씨가 아닌 다른 졸업생이 예산 삭감에 항의했더라도 똑같이 입을 틀어막고 끌고 나갔을 경호처다.

행사 당일엔 대통령 경호를 위해 좌석 확보가 필요했던지, 학위수여식에 참석하려던 학부모가 입장하지 못하고 진행요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남의 잔칫집에 찾아와 사달을 낸 대통령실에 구성원들은 분노했다. 재학생과 교수, 직원 4456명은 “명백한 인권침해”라며 대통령실에 사과를 요구했다. 카이스트 동문들도 대통령 경호처장 등을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학교 차원의 입장 표명은 없다. 교수협의회 집행부가 추진한 카이스트 교수 전체의 유감 표명도 교수들의 과반 동의를 얻지 못해 ‘없던 일’이 됐다고 한다. 

원천 기술을 개발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열정과 대통령실의 폭거를 향한 분노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일까.

 

신민기씨는 “교수님들 역시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계시지만, 제자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분이 많다”고 ‘선해’했다.

대통령실에 누구보다도 유감을 표명해야 할 학교 쪽도 미동도 않고 있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대통령실이 강성희 의원의 입을 틀어막은 게 지난 1월18일이었고, 약 한달 뒤 카이스트에서 신민기씨의 입이 틀어막혔다. 그로부터 또 한달이 다 돼가지만, 목소리를 내야 할 이들이 스스로 입을 막았다.

 

 독재화가 진행 중인 이 땅에서 ‘입틀막’ 효과가 뚜렷하다. 흐뭇한가.

 

 

 

김태규 | 토요판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