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각자도생은 국가적 DNA였다

道雨 2024. 3. 11. 10:19

각자도생은 국가적 DNA였다

 

 

 

(1) 사외이사들이 기업들로부터 고액 연봉, 골프회원권, 해외 출장 등 과도한 혜택을 받으며, ‘허수아비 거수기’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학계에선 ‘사외이사 되는 법’ 같은 강좌가 개설되는 등,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분위기도 생겨나고 있다.(조선일보, 1월24일치 기사)

 

(2) 사외이사 연봉 1억원 넘는 기업이 삼성전자·에스케이(SK)·에스케이텔레콤 등 13곳에 달한다. 이쯤 되면 부업인지,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 인맥을 총동원해 기업에 줄을 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기업이 갑이 돼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중앙일보, 2월27일치 고현곤 칼럼)

 

 

(3) 고위 관료 출신의 선임은, 노후를 보장해주는 대신, 대주주·경영진 바람막이로 활용하기 위한 ‘낙하산 인사’에 다름 아니다. 이들에게 사외이사 자리는 이미 고급 사교 클럽에다 추후 정무직 자리를 기다리는 정거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국민일보, 2월28일치 사설)

 

올해 들어 나온 언론의 사외이사 비판 가운데 3개만 골라 소개한 것이다. 내가 사외이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 전 “서울대교수 92명 사외이사 겸직…한해 평균 4234만원 받아”라는 제목의 한겨레 기사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당시 나의 관심은 교수와 관련된 지식사회학이었지만, 나중엔 사외이사 관련 기사들이 매년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걸 눈여겨보는 언론사회학으로 발전했다.

 

그간 사외이사의 문제와 관련해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거수기’일 게다. 지난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것은 0.4%에 불과했다고 하니, 거수기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 거수기 비판은 매년 반복되지만, 달라지는 건 전혀 없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모든 언론이 거수기 노릇은 나쁘다고 지적했으면, 달라지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기업들, 아니 그들이 고른 사외이사들은 꿈쩍도 안 하지? 언론은 그걸 궁금하게 여기긴 하는 걸까? 그냥 의례적으로 했던 비판 아닌가? 어차피 담당 기자는 바뀔 테니, 다음엔 다른 기자가 새로운 자세와 기분으로 사외이사의 거수기 노릇을 비판할 게 아닌가. 물레방아처럼 돌고 도는 세상인데 세상만사 둥글둥글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따지려 드는 게 오히려 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언론이 연례행사처럼 비판은 매년 반복하지만 전혀 바뀌지 않는 건 사외이사 문제만은 아니다. 주요 문제들이 다 그런 식이다.

 

이른바 ‘전관예우’는 어떤가?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스스로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가세해서 받아먹으려고 애쓰는 ‘꿀단지’가 아닌가. 이는 깊이 파고들면 사실상 ‘착취’의 문제와 연결되지만, 모두 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몫을 챙기겠다고 혈안이 돼 있다.

그 심리는 이렇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다른 사람들 놀고 즐길 때 나는 피땀을 흘리면서 목숨 걸고 공부했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어렵게 쟁취한 이 자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내가 누릴 만해서 누리는 걸 과거에 놀았거나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배 아파하면서 똑같아지겠다고 시비를 거는 건 내가 흘린 피와 땀에 대한 모욕이야.”

 

그런 생각을 ‘추한 능력주의’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 그런 목표를 추구하면서 열심히 살아왔고, 국가적 차원에선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을 가리켜 ‘엘리트’라고 부른 지 오래다.

그 엘리트의 범주에 들어갈 가능성조차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했으니, 그건 바로 결혼과 출산의 회피 또는 거부다.

“그래 그렇게 잘난 당신들만 대를 이어 부귀영화를 누리시구려.”

 

역대 정권과 정치인들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표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골치 아픈 문제는 한사코 피해서 도망 다녔다.

문제 해결 요구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언론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면책될 수는 없다.

종기는 곪아서 터질 것 같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에 터트려야 한다지만, 사회적 문제는 그렇게 하면 재앙이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뒤늦게나마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되었다면,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이때 대립하는 양쪽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증오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책임을 연대책임으로 돌리는 건 후안무치한 일이지만, 연대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각자도생은 그간 국가적 디엔에이(DNA)가 아니었던가.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