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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립서비스 안 되려면

道雨 2024. 3. 11. 09:47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립서비스 안 되려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최근 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초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책으로 제기했지만, 법무부의 반대로 흐지부지됐던 사안이다. 정부의 ‘기업 밸류업 지원안’에 맹탕이라는 부정적 반응이 쏟아지자, 무척 다급했던 것 같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려면, 지배주주(총수)의 회사 이익 빼돌리기로부터 일반주주를 보호하기 위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선결 과제이다.

 

정부 태도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면, 상법 개정을 속단하기는 이르다. 이번에도 총선용 립서비스에 그칠 수 있다. 더구나 이 원장은 ‘기업의 경영권 확보나 경영권 승계장치’를 전제조건으로 걸었다. 경제계가 요구하는 복수의결권(1주당 여러 의결권을 부여) 허용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경영권 방어장치를 이사의 주주 보호 책임과 연계시키는 것 자체가 생뚱맞다. 오히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역행할 위험성이 크다.

 

 

올 들어 미국·일본 등 주요국 증시가 사상 최고가 행진을 벌이는데, 한국만 제자리걸음이다. 그 원인 중 하나로 기업의 실적 부진이 꼽힌다. 시장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발표하는 ‘어닝 서프라이즈’ 기업의 비율이 지난해 4분기 기준으로 한국(코스피·코스닥)은 미국(S&P500)과 일본(닛케이 평균)의 1/3~1/7에 불과하다.

한국 기업의 장기 수익성도 뒤처진다. 기업 성과는 단기적으로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익성이 장기적으로 경쟁국보다 크게 낮고 개선 조짐마저 없다면,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최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했다. 신세계는 지난해 최악의 경영실적을 기록했다. 쿠팡의 약진으로 상징되는 유통 산업의 급속한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책임을 물어 지난해 9월 사장단의 40%를 교체했다. 하지만 정작 권한과 책임이 가장 큰 최고경영자는 승진했다.

 

에스케이(SK)그룹의 에스케이온은 국내 2차전지 제조사 3곳 중 유일하게 적자를 내고 있다. 지난해 말 전문경영인 사장이 교체됐다. 회사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인 최태원 회장의 동생은 건재하다. 투자자들이 얼마나 공감할지 의문이다.

 

지배주주 일가가 경영 성과가 아무리 나빠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 경영’은 재벌의 오랜 관행이다. 평균 4%의 지분만으로 기업 주인을 자처하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회피한다. 이는 회사의 수익성 저하로 귀결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가로막는다.

 

 

메모리 반도체의 최강자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총아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서 하이닉스에 기선을 뺏긴 것은 의외다.

최근 반도체 담당 사장이 그 이유를 털어놨다. 인공지능이 급부상할지 예상을 못 해, 투자 결정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경영진이 투자 건의를 계속 외면하자, 핵심 엔지니어들이 한꺼번에 하이닉스로 옮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최근에는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참여, 마이크론의 5세대 에이치비엠 양산 선언까지 겹치며 ‘삼성 위기론’까지 불거진다.

삼성은 과거 어려운 고비가 닥치면 특유의 ‘위기경영’으로 돌파했다, 그 중심에는 이건희 전 회장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예전과 같은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위기 돌파의 선봉장이 되어야 할 이재용 회장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재벌 특유의 ‘오너경영 체제’는 창업자 시절에는 강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장기투자로 강점을 발휘했다. 2세들은 창업자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금수저’로 태어난 3·4세들이 조부나 부친과 같은 역량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현대차 정의선 회장처럼 혁신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사례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성공 확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배주주의 ‘권한-책임 불일치’ ‘무책임 경영’은 지배주주의 회사 이익 빼돌리기와 함께 후진적 지배구조의 산물이다. 지배주주 일가도 전문경영인과 같이 경영 성과에 대해 철저히 책임지는 혁신이 시급하다. 결과에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과욕을 버리고, 소유-경영 분산을 통해 유능한 전문경영인과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정부·여당은 말로만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외칠 게 아니라 일반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을 조건 없이 추진해야 한다. 경영권을 지켜주는 것은 주식 지분이 아니라 경영 역량과 성과이다. 경영권 방어장치 같은 엉터리 처방은 당장 멈춰야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배치되는 공매도 금지로 시장 혼선만 자초하는 헛발질을 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