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뉼런드의 퇴장이 말하는 한국의 딜레마

道雨 2024. 3. 19. 09:14

뉼런드의 퇴장이 말하는 한국의 딜레마

 

 

 

지난 5일 발표된 빅토리아 뉼런드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의 퇴임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이라는 두개의 전쟁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 대외정책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뉼런드는 그의 퇴임을 발표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말처럼,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전면적 침공과의 대결에서 필수불가결한” 작업을 이끈, 미 외교가에서 최고의 대러시아 강경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낳은 미-러 관계에서 뉼런드는 핵심 인물이다.

그는 대표적인 대러 강경파인 스트로브 탤벗이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국무장관을 할 때 그의 비서실장으로 공직을 시작해, 지난 30년 동안 대외정책 요직을 수행했다.

 

 

러시아 등 경쟁국이나 동맹국에 대한 거칠고 적나라한 언사로 유명한 그는, 워싱턴에 여전한 네오콘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최고위 공직자로 평가됐다.

 

집안 역시 ‘네오콘 명가’이다.

남편이 네오콘의 최고 이데올로그이자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자로 유명한 로버트 케이건이다.

로버트 케이건의 동생 프레더릭 케이건은 보수적 전쟁사가로, 미국의 대표적 보수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유력한 선임연구원이다.

프레더릭 케이건의 부인인 킴벌리 케이건은 서방 언론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을 인용하는 워싱턴의 전쟁연구소(ISW) 창립자이자 의장이다.

뉼런드와 케이건은 미 대외정책의 요직을 장악한 유대계이기도 하다.

 

뉼런드를 빼놓고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설명이 안 된다. 그는 조지 부시 행정부 때는 딕 체니 부통령의 부안보보좌관, 나토 대사 등을 거치며,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나토 확장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나토 대사였던 그는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씨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절차와 일정을 규정한 ‘회원국행동계획’(MAPs)을 독일과 프랑스의 반대를 제압하고 관철했다. 이에 반발한 러시아는 조지아 전쟁을 감행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는 미-러 관계 악화의 출발이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그는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차관보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시발점인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정권을 붕괴시킨 유로마이단 사태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시위 사태의 현장에서 시위대들에게 샌드위치를 나눠 주며 독려했다.

그는 당시 제프리 파이엇 우크라이나 주재 미 대사와의 통화에서 미온적인 유럽연합에 비속어로 욕을 퍼붓고, 우크라이나의 후임 대통령을 누구로 해야 할지를 말하는 녹음 파일이 폭로되기도 했다. 러시아가 그를 ‘어둠의 공주’라며, 미국이 쿠데타를 사주했다고 비난하는 이유다.

 

그는 웬디 셔먼 부국무장관의 사임 뒤 직무대행을 하면서 후임으로 유력했다. 하지만 커트 캠벨 인도·태평양 조정관이 부장관으로 지명되자, 그는 밀려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이 러시아로 기울고, 블라디미르 푸틴은 압도적으로 5선 대통령으로 당선된 시점이라서, 그의 사퇴는 더욱 미묘하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지난해 연말부터 점령지 굳히기에 이어, 새해 들어서는 그 확대를 위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러시아가 점령지를 굳히는 ‘동결된 전쟁’으로 가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출구 전략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인도·태평양 전략과 한·미·일 동맹의 열렬한 옹호자인 캠벨이 부장관으로 부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는 이미 한반도를 덮었다. 윤석열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포탄 등 무기를 제공해, 북·러의 전략관계 격상에 박차를 가해줬다.

캠벨을 부국무장관에 임명한 미국은 이제 전선을 인도·태평양으로 이동할 것이고, 그 전략에서 한국의 동조화를 더욱 재촉할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로 북한에 대한 접점을 더욱 잃어버린 한국으로서는 선택지가 더 좁아지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러와의 대결을 겨냥해 동맹국들을 조직하려는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미국 밖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18일부터 열리고 있다. 미국 대외정책에 대한 한국의 동조화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국 내에서도 야당인 민주당은 비례대표 의원 후보 선정에서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인 사드 배치 반대 시위를 한 농민운동가를 탈락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우세를 보이고, 가자 전쟁에서는 비난 여론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하는 딜레마에 허우적거리는 미국만을, 지금 한국은 바라보고 있다.

 

 

 

정의길│국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