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비리가 아니다

道雨 2024. 3. 18. 10:15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비리가 아니다

 

 

 

‘법’ 하면 ‘처벌’만이 떠오를 때, 법은 감시와 억압의 도구가 된다. 누구라도 법을 완벽하게 해석하고 준수할 자신은 없을 것이므로 법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여, 각자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고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법을 인식하면 많은 것이 바뀐다.

법을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부터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법이 존중과 보호의 체계가 된다.

 

물론 현실적으론 동의한 적 없는 법을 따라야 하고, 현실과 괴리가 발생해 부당해진 법을 폐지하거나 변경하는 것이 더디고, 꼭 필요한 법을 쉽게 만들지도 못하고, 구시대의 편견과 오류를 그대로 담은 법이 누군가의 존엄을 해하기도 한다. 법의 이상을 공허하게 느끼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판사라고 다르지 않다. 파도 치듯 끊임없이 법대 앞에 놓이는 사건들을 재판하며 당장의 해답을 내놓으려 고군분투하다 보면, 시대적 변화라든지 인간의 존엄성을 담아낸 법의 해석 같은 것을 고민할 여유가 사라진다.

그럼에도 시대 변화를 반영하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 위해 법 해석이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안들이 존재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규범적 승인처럼.

양심적 병역거부 사안은 대한민국 사례가 국제인권규범의 해석 변화에 일조했다는 점 때문에 더 인상 깊다.

 

우리나라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했다. 처벌받은 이들은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진정했다(개인통보제도). 위원회는 원래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 여부가 당사국의 국내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2006년 양심적 병역거부자 윤아무개씨와 최아무개씨에 대한 형사처벌 사안 결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자유권규약 제18조(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에 따라 보장되는 권리라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양심을 표명할 자유’로서 공공의 안전 등 일정한 조건 아래 제한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제18조 제3항의 제한), 2011년 정아무개씨 등 10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진정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양심·종교의 자유에 내재된 권리로 해석하면서 제18조 제3항의 제한도 불가능하다고 했고, 2014년 김아무개씨 등 43명이 역시 국가를 상대로 낸 진정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징역형이 자의적 구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자유권규약위원회의 해석은 유럽인권재판소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쳐,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유럽인권협약상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에서 파생되는 권리라는 법리를 확립시켰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국제인권규범에서 도출되는 권리로 인정되기까지는 ‘대한민국 병역 현실이 가지는 인권적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공감대, 우리나라 국민들이 신청한 개인통보에서 이뤄진 자유권규약위원회의 견해 발전, 이를 주목한 유럽인권재판소의 설시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발전한’ 과정이 존재했던 것이다(장원정,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 ‘국제인권법의 이론과 실무 2023’).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규범적으로 승인한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개인적으로 타성과 회의에 시달릴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읽어보는 판결이기도 한데, 일부를 소개한다. 법이 존중과 보호의 체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다. 일방적인 형사처벌만으로 규범의 충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확인됐다. 그 신념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들을 관용하고 포용할 수는 있어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2018년 비로소 사법에 의해 규범적으로 승인됐으나, 양심에 대한 판단 기준의 적절성, 대체복무 제도의 군복무적 성격, 차별성 및 처벌성 등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예 인정조차 받지 못했던 시대만큼은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생각이 사치였던가 싶어 아연할 따름이다.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