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전 장준하의 죽음, 그리고 돌아온 ‘반국가세력’
1973년 박정희 담화문 "불순분자들 국민 선동"
2024 윤석열 "반국가세력들 곳곳에서 암약"
장준하의 죽음은 진행형…부끄런 후손 되지 말자
1973년 12월 29일, ‘유신 독재자’ 박정희는 대한민국 독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말만 ‘담화문’이지, 사실은 대국민 ‘협박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1972년 10월 유신헌법으로 국민을 독재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고도, 민심이 항거해 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해 12월 24일,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을 중심으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들불처럼 번져가는 반유신 운동으로 박정희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국민의 저항에 놀란 독재자 박정희의 ‘협박문’
도대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이 무엇이기에 박정희는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까. 장준하 선생이 주도한 이 운동은, 쉽게 말해서 1972년 10월 공포한 유신헌법을 “이전의 헌법으로 돌려놓으라”는 청원이었다. 즉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도록 만든 헌법을 국민이 직접투표로 선출할 수 있게 개헌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운동을 시작한 지 10일 만에 무려 30만 명의 국민이 서명에 동참했다는 보고가, 중앙정보부에서 청와대로 비밀리에 올라온 것. 그러니 박정희가 대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보고에 박정희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의 담화문이 발표되기 3일 전인 1973년 12월 26일의 일이다.
그날 밤 퇴근 후, TV와 라디오를 듣고 있던 국민들은 예정된 정규방송이 끊기고 갑자기 등장한 한 인물의 목소리에 긴장하게 된다. 5.16 군사쿠데타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자 유신정권의 2인자였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이었다. 그는 밤 9시부터 무려 1시간 40분 동안이나 특별 방송 형식으로 대국민 설득(?)에 나선 것이다. 주요 내용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의 즉각적 중단’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일체의 선동을 엄히 다스리겠다는’ 서슬퍼런 엄포였다.
따지고 보면 고작 30여 명 남짓한 재야인사가 모여 시작한 ‘초라한’ 서명운동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랬을까.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김종필의 이날 방송은 오히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모르고 있던 국민까지 알게 하는 홍보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이전보다 서명 속도가 더 빨라졌고, 추진 운동본부 역시 자신감을 얻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민주니 자유니 국민을 선동하고 다니는 불순분자들”
그러자 결국 3일 후, 박정희가 나선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김성진이 대독하는 방식으로 발표한 이날의 박정희 담화문은 거리에도 뿌려졌다. 당시 경제 여건상 TV와 라디오가 없는 대다수 국민에게도 알리기 위해 신문 호외로도 뿌린 것이다.
그 호외에 굵고 진한 활자로 담긴 1973년 12월 29일의 박정희 담화문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박정희가 당시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던 그 내용 중 일부이다.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서 가지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선동과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동조세력을 규합하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3~4월 위기 운운하며 민심을 불안케 하고 혼란을 더욱 조장할 뿐더러, 각계 인사를 찾아다니면서 소위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언필칭 민주니 자유니 하고 국민을 선동하고 다니는 그들의 저의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나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 자칫 국가 안위에까지 누를 미칠까 염려하여, 그들에게 한 번 더 냉철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는 동시에,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현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뒤집어 엎으려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군사재판 15년형 병보석 후 결국 의문의 죽음 맞은 장준하
이러한 박정희의 경고에 장준하 선생이 주도한 ‘개헌청원 서명운동본부’의 응답은 간결했고, 또 주저가 없었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인 1974년 1월 5일,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작성한 장준하 선생 관련 ‘중요상황 보고’에 그 응답이 적혀 있다.
<개헌청원 운동본부 성명 발표>
- 오늘의 정치 정세 전망은 밝지 못하다.
- 말과 비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 따라서 대통령에게 이를 청원하는 것이고, 당국은 이를 막지 말라.
어쩌면 1974년 1월 5일, 이 날이 장준하 선생의 생사가 갈린 날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해 왔다. 이 일이 있고 3일 후인 1월 8일, 박정희는 유신악법의 결정체인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체포한 이가 장준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진 군사재판에서 장준하 선생은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행히 장준하 선생은 15년 징역을 다 살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구속 11개월 만인 1974년 12월 3일,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추락사로 발표했으나 ‘당시 누구도’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수많은 타살 의혹이 존재했지만 당시 박정희 권력이 제대로 밝혀줄 리 없으니 그대로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금해할 뿐이다. 왜 박정희는 장준하 선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 2003년부터 1년 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규명 담당 조사관으로 일해 온 나에게 적지않은 이들이 종종 이 질문을 해 온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나는 윤석열 대통령의 입에서 그 답을 듣게 된다. 잔인하고 끔찍한 답이다.
‘반국가세력’에 담긴 절대권력의 반대 세력에 대한 증오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9일 을지연습 국무회의에서 그는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해 폭력과 여론몰이, 그리고 선전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론 분열을 꾀할 것”이라며 말한 것은, 놀라움을 넘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실로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시민사회가 반발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발언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자, 대통령실은 “우리 사회에 반국가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국내 세력이 아니라 북한을 향한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대통령실의 해명은 논리에 맞지도 않고 명쾌하지 않다.
대통령의 ‘반국가세력’ 발언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고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2023년 6월 한국 자유총연맹 창립 기념식에서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들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라고 했다.
같은 해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며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다”고 했다.
심지어 2023년 9월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에서는 “지금 우리의 자유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아직도 공산 전체주의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세력 그리고 반국가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반국가세력’ 발언, 50여 년 전 박정희와 닮았다
그렇다. 잠깐 살펴본 윤 대통령의 이같은 ‘반국가세력’ 발언과 1973년 12월 29일 ‘박정희 담화문’이 거의 일치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특히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는 대목 등은 옮겨 적은 것처럼 유사하다.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바로 그들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장준하는 그래서, 박정희에게 있어 제거 대상이었던 것이다. 특히 긴급조치 1호로 체포한 후,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하여 감옥 안에서 옥사시키려 했는데,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풀려나온 장준하 선생이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보석으로 풀려 나온 장 선생이 곧바로 반유신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것이 ‘제2차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이었다.
그러니 박정희로서는 장준하 선생을 살릴 수도, 가만히 둘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이듬해 여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은 두개골에 직경 6센티의 가격흔을 남긴 채 절명한다. 그날이 1975년 8월 17일이었다. 오늘로부터 만 49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9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장 선생의 사인은 명쾌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독선적인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반대세력을 향해 반국가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증오하는 윤석열 정권은, 그때의 박정희 권력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49년 전 장준하 선생은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말자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화답해야 한다. 부끄러운 후손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해 보라. 지금처럼 개인 휴대폰이나 인터넷은 고사하고 집집마다 전화기도 없던 그때, 단 10일 만에 ‘무시무시한 정권의 공갈과 탄압 속에서도’ 무려 30만 명의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돌려달라며 서명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윤석열 정권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광복절을 지우려 한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독도 상징물도 치우고, 뉴라이트 인사가 정권의 주요 자리들을 장악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오히려 놀랄 정도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는 판이다. 김태효 대통령실 안보 1차장은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고 발언할 정도이다.
윤 대통령은 이를 비판하는 국민을 싸잡아 ‘반국가세력’ 이라며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건전하고 상식적인 국민을 향해, 그리고 집권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국민을 반국가세력이라고 매도하는 괴물이 바로 ‘반국가세력’ 아닌가. ‘반국가세력’이란 단어는 그렇게 윤석열 대통령에게 돌아갈 부메랑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시고 불과 4년 후. 박정희의 최후가 어찌 되었는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탄압해도 결국 국민을 이기는 독재는 없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순리대로 이겼다. 지금 친일에 기반한 뉴라이트가 기승을 부리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한줌 세력이 있다 해도 결국은 이 나라 민족정기를 지키는 대한민국 국민이 ‘반민주세력’을 척결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이 이긴다.
고상만 인권운동가mindle@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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