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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문법에 따라 일상을 꾸려갈 때 삶이 아름답고, 행복해 진다

道雨 2024. 9. 10. 09: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4일)

 

 

 

일상의 문법에 따라 일상을 꾸려갈 때 삶이 아름답고, 행복해 진다

 

행복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신체·정신적 즐거움의 합

 

 

 

 

 

 

지난 8월 28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연세대 심리학과의 서은국 교수는 ‘행복은 즐거움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창시해 낸 미국 심리학자 에드 디너의 제자다.

 

그는 “‘불행이 제거되면 보너스처럼 생기는 것이 행복’이라는 가정이 오래된 심리학계의 잘못된 가정이었다”며 “행복은 걱정이 없고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즐거움의 유무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행복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신체·정신적 즐거움의 합”이라며 “어디서 즐거움을 느끼든 ’자주 느껴야’ 행복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즐거움을 주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을 일상에 많이 배치해야 자연스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니까 행복은 일상의 배치, 일상의 문법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게 오늘의 화두이다.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일상의 문법에 따라 일상을 꾸려갈 때 삶이 아름답고, 행복해 진다는 거다.

 

나는 ‘배치’라는 말을 좋아한다. 또는 ‘배열’이라고 한다. 이걸 우리는 문법(文法)이라고 한다. 이 문법을 그리스어는 ‘그라마(gramma)’라 한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카드모스(Cadmos)라는 페니키아인이 그리스에 최초로 알파벳을 전달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이 페니키아 문자를 ‘그라마티케 테크네(grammatike tekhne)’라고 표현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글자를 배치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그람마’란 단순히 단어들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그 단어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기술이다. 그런 배치에는 순서가 있고 강조를 위한 침묵의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람마’란 최적의 배열이다. 그래야 그 문장이 감동적이며 아름답다. 고대 그리스에서 새로운 언어의 체계를 ‘그람마(gramma)’ 라고 불렀고, 그걸 동양에서는 ’문법’이라고 한다.

 

‘문법’은 어떤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갈고 닦은 원칙이다. 문법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언어만의 내공이며 무늬다. 단어들은 문법을 통해 언어로 완성되어 우리에게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전달한다.

이때 ‘법’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문자들을 지배하는 도덕이며 규율이다. ‘법’없이 그 내용물인 ‘문자’들이 존재할 수 없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그람마’는 인도-유럽어 어근 ‘gerb’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새겨 넣다’이다. 그러므로 “ ‘문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근면’과 ‘정직’을 새겨 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교양의 시작은 자신과 관계없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최선의 문법을 만드는 과정”(배철현)이라는 거다.

 

배교수에 의하면, 문법학을 배우면, 우리 삶의 중요한 두 가치인 “근면(勤勉)과 정직(正直)”을 얻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 “근면”은 “내가 매일매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건 근면한 배움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 아름답다. 아무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직”하게 배워야 한다. 예컨대, 내가 만일 1과를 배웠다면, 2과에 나오는 연습 문제를 풀지 못한다. 나는 2과 연습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남을 속일 수 없다. 정직하게 배워야 한다. 문법학을 통해 언어를 배우면 배울수록, 그와 비례하여 항상 모르는 것이 등장한다. 그러기에 ‘자만’은 금물이다.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그 만큼 모르는 것들이 비례해서 많아지는 것을 통해 정직을 배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교육인 ’아르테스 리베랄리스(artes liberalis)’에서 가르치던 트리비움 교육에 대해 다시 공유한다. 그 당시에 시민들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교육으로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여기서 인문학이 시작된다), 즉 ‘교양 교육’이 있었다. 이 ‘교양 교육’이 ‘트리비움(trivium)’이다.

‘트리비움’이란 축자적으로는 ‘세 갈래(tri) 길(vium)’이 만나는 ‘공공(公共)의 장소’ 혹은 ‘광장(廣場)’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는 공공장소인 시장, 즉 ‘아고라’가 있었고, 고대 로마에는 다양한 공공의 의견을 교환하고 대화하는 ‘포럼’forum이 있었다.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개진하고, 최선의 생각에 승복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이 세 가지의 배치가 그리스 민주주의를 낳는다.
▪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개진한다.
▪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다.
▪ 합의된 최선의 생각에 승복한다.
 
영어로 ‘하찮은; 사소(些少)한’이란 의미를 지닌 ‘트리비얼(trivial)’이란 말은 라틴어 ‘트리비움에서 유래했다. 공기나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너무 흔해 우리들이 하찮게 여기지만, 우리들의 삶에는 원칙과 문법이 되는 핵심적인 가치가 있다. 아름다운 시는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단어의 선택과 배치인 것처럼 말이다.

 

단어의 선택에는 그 시인의 혼을 드러내는 개성이 담겨져 있고, 단어의 배치는 우리들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원칙과 문법의 표현이다. 로마인은 그걸 흔하지만 중요한 가치를 고취하는 교육 과정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트리비움’이다.

이 ‘트리비움’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지식이다. 너무 흔해 하찮게 보이지만, 공기처럼, 어머니의 사랑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덕목들이다.

 

이 ‘트리비움’을 구성하는 세 가지는 문법학(文法學), 논리학(論理學), 설득(說得)을 위한 수사학(修辭學)이다.
▪ 여기서 문법학은 철학서를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 읽기와 문해 력을 키우는 일이다.
▪ 논리학은 철학서에서 터득한 철학자의 사고법을 도구 삼아 내 생각을 하는 것, 즉 내 논리를 만드는 것이다. 즉 생각, 아니 사유하는 법을 기르는 일이다.
▪ 수사학은 내 생각을 글로 쓰고 나누는 것이다. 즉 글쓰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되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 정신을 이어받아, 로마인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교육 과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라고 불렀다. 여기서 ‘리버랄리스’는 ‘자유로운’이란 의미이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선별해 알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연스럽고 의연(毅然-의지가 굳세어서 끄덕 없는)한 사람, 즉 ‘자유인(自由人)’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방금 이야기 했던 ‘자유’라는 말과 ‘아르테스’라는 단어의 뜻은 내일로 넘긴다.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행복 하려면, 일상을 즐겁게 잘 배치하여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배치가 다른 말로 문법인데, 삶도 문법이 있어야 기품이 생긴다.

 

예컨대,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고마운 사람에게 인사하고, 미안한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소중한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사하지 않는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매너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개 숙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만 시작하면 다투는 사람은 말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배웠지만, 여전히 인사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에 미숙한 사람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가치를 제대로 실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마운 사람에게 인사하고, 자신의 실수에 고개 숙이고, 상대의 말을 마음을 다해 듣는 사람은 인간의 품격과 가치를 가진 사람이고, 삶의 문법, 아니 배치를 배운 사람이다. 오늘 공유하는 글  같은 사람이다.

 

누구의 글인 줄 모른다. 언젠가 SNS에서 만나서 적어두었던 글이다.

오늘 공유하는 사진도 어느 날 시내를 산책하다, 색과 배치가 아름다운 가게를 찍은 거다.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지은 실수보다
남이 지은 실수를
더 너그러이 보아주실 줄 아는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흘리고 있는 눈물보다
남이 흘리고 있는 눈물을
먼저 닦아 주실 줄 아는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조금 더 가진 것을
자신보다 조금 부족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실 줄 아는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지고 가는 짐도 무겁지만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의
짐을 함께 들어 주실 줄 아는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도 바쁘지만
자신보다 먼저 그 길을 가야 하는 이를 위해
손 흔들며 길을 내어 주실 줄 아는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제 나도 당신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이 각박하다 탓하기 전에
이미 거친 세상의 거름이 되고 계신 당신
그 웃음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 박한표 ]  인문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