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27일)
경쟁과 시기는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고 우리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오늘은 <인문 일지>로 우리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는 인간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모욕은, 문명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아무리 개인의 성공과 행복의 이상을 “그 무엇도 아닌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한들, 현실을 무시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평범한 삶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품은 원대한 야망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해도, 우리가 열망하는 진리와 성공은 대개 타인의 성공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경쟁과 시기는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고 우리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억누르고 무디어지게 한다.
경쟁과 시기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인 동시에 죄악이고 불행이다. 우리는 시기심을 행복의 적이고, 우리의 숨통을 막으려는 사악한 악마로 봐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기뻐하라. 남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해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나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보다 뒤쳐져 있는지 생각하라.
인간은 자신보다 사정이 나아 보이는 사람보다 사정이 나쁜 사람을 살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만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나는 모든 것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행복의 특성이 있다. 결국 행복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조금이나마 믿을 만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아닌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따르는 고충, 불이익, 위험, 불쾌감은 아주 크고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을 자신에게 줘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많을수록, 기쁨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찾을수록 우리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이의 것이다.
어울리려고 애쓰지 마라. 나이 들수록 혼자가 더 행복하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시기와 질투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이어간다. 장자 식으로 말하여,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心齋), 나를 장례 시키고(吾喪我),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며 미워하는 마음이다. 비슷한 말로 ‘시새움’이 있다.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다. 줄여서 ‘시샘’이라고도 한다.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 내리려 하는 행위이다.
러시아 민화 하나를 소개한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농부는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아서 그들이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농부의 얘길 듣던 지니가 “옆집처럼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으니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질투와 시기심을 말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원인은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살고,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이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의 교육문법이 잘 못되어, 깊이 사유하는 훈련을 시키지 않고, 경쟁 속에서 지식만을 암기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패배감을 느끼면, 우리는 자존감을 잃게 된다.
미국 시인 윌리스 스티븐슨의 다음 시 구절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같은 빛 속에서, 영혼의 중심에서/저녁의 대기 속에 하나의 거처를 마련하리니,/그 안에서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우리는 “함께 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그저 존재하는 것’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영혼의 중심을 교감하며 그저 ‘함께 하는 것’이다.
아니면, 독기 어린 경쟁과 시기에 집착하는 대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완벽함을 추구하는 거다.
예를 들어, 이제 대중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 연주자는 매일 8시간씩 연습에 몰두한다. 그러면서 그는 대중으로부터 얻는 영광 대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성취를 통해 충만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연주하는 즐거움이, 점차 자신만을 위해 연주하는 즐거움으로 바뀐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으로서 오롯이 자신만의 기쁨을 만끽하던 그 연주자는, 다양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결코 대중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탁월함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레테’뿐만 아니라 행복도 이런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계산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아레테’는 타인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대신,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탁월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모든 인간이 세상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신분은 공동체인 도시에서 자기 나름의 고유임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각자 그 고유 임무에 따라 각자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스어로 ‘아레테’라 한다. 우리는 흔히 이걸 덕(德)으로 번역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단어이다.
아레테는 그리스 어에서 ‘선, 탁월함, 남성 다움, 힘, 용기, 성격, 명성, 영광, 위엄’이란 의미 뿐만 아니라, ‘기적, 경의, 경배의 대상’이란 의미도 있다. 이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의 공통점은 ‘고유(固有)’이다.
우리 모두는 고유(固有)하기 때문에, 세상에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다. 어떠한 일을 하든, 진심으로 헌신하고 노력한다면,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하고 귀중한, 즉 고귀(高貴)한 일이 된다.
나만이 완수할 수 있는 고유한 임무를 인도인들은 ‘다르마’라고 한다. 그게 중국으로 와서 ‘법(法)’으로 번역 되었다.
‘법’이란, 강물의 물처럼,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버리며, 당연하게 그리고 도도하게 나아가는 삶의 규범을 말한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다르마를 발견하고 발휘한다면 행복하다.
나는 나의 고유한 임무라는 것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내 것이 아닌 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다. 오늘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 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 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우리가 읽고 있는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vertus miniscules)>>에서 저자 마리나 반 주일렌을 통해, 나는 파울 플레밍(Paul Fleming)이라는 사상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소소한 사건들 뒤에 가려져 있어 등한시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탐구하면서, 드러나지 않는 소소한 일상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한다.
* 자신의 저서에서 그가 언급한 인물들은 “위대함과 소박함, 비범함과 평범함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 누군가를 판단하려면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큰 사건들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흔적을 남겨야 하지만, 소소한 사건들은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 사건의 영향력과 본질이 하나”라고 썼다.
잘 생각해 보면, 그저 존재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
사실 누군가의 더디지만 만족할 만한 발전을 가능한 한 가장 세심하게 표현하는 것,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난해한 시를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이다.
대개 눈에 띄지 않는 그 세상에 접근하는 방법은, 아주 사소한 감정,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것이다.
파울 플레밍도 “우리가 평범함을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을 때, 평범한 사람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거기에서 거부감과 공감이 뒤섞인 삶의 미학이 발견될 수 있다.
처음에는 익숙하고 단조로운 시시한 세계에 집중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심과 집중에서 시작되는 이런 접근 방식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한 것들에 관심을 두면, 겉보기에 대단할 것도 없고 비범하지도 않은 삶에 만족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서로 얽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가 정한 기준에 따라 이런 저런 범주로 분류한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좋은 통찰을 주는 문장이다.
박한표 : 인문운동가, 마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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