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투세 유예하려면 민주당 강령 바꿔야
우리나라 보수 정당은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바뀌었다.
보수 정당은 계층 정체성이 없다. 특정한 계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자 하는 ‘캐치올 파티’였다. 지금 국민의힘도 그렇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보수 정당을 ‘부자들의 정당’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선거 때마다 서울 서초·강남·송파 지역에서 절대 강세를 보이는 이유다.
민주당의 계층 정체성은 ‘서민과 중산층’이다.
민주당 강령 전문 첫번째 문장은 “더불어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는 선언이다.
경제 분야 강령 ‘혁신성장과 민주적 시장경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갈수록 확대되는 부동산, 금융 등 자산 불평등 심화를 막고 사람 중심의 민주적 시장경제를 실현한다.”
‘조세 정의의 확립’ 항목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부동산 세제는 투기적 수요를 억제하고 실수요자를 보호하도록 개편하고 금융 세제는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 원칙하에 합리적이고 공정한 과세 기반을 구축하여 자산 불평등을 완화한다.”
‘서민과 중산층’이라는 민주당의 계층 정체성은 김대중 대통령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세운 것이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창당한 평화민주당은 창당 선언문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계층의 권익 회복을 위해 싸워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1991년 평화민주당과 재야가 통합한 신민주연합당은 “중산층의 권익을 신장하며 서민 대중을 위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결의했다.
1995년 김대중 총재가 정치에 복귀하면서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중도 정당”을 선언했다. 새정치국민회의 당사에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커다란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는 1997년 12월18일 대통령 선거에서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 부자들의 정당을 누르고 승리한 셈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신년사에서 ‘생산적 복지’를 국정 지표로 제시했고,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의 당명과 정치인들은 바뀌었지만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이라는 계층 정체성은 바뀐 일이 없다.
그런 민주당에서 계층 정체성이 흔들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오는 24일 당내 토론을 앞두고 금융투자소득세를 또다시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은 주식 투자자들의 낙천·낙선 운동 위협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 1월2일 증시 개장식에 참석해 금투세 폐지를 선언했다. 국민의힘은 금투세 폐지를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국민의힘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그렇다면 금투세 폐지도 없던 일이 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금투세 폐지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 도무지 염치가 없다.
희한한 일은 이재명 대표가 지난 7월 초 갑자기 금투세 유예 가능성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그 이후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금투세 유예와 시행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금투세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 정의 원칙에 따라 거래세 폐지를 전제로 도입하는 세제다. 거래세는 거의 폐지됐다.
그런데 주식 투자자들은 이참에 거래세도 안 내고 소득세도 안 내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기대어 돈만 벌고 세금은 안 내겠다는 못된 심보다.
국민의 조세 저항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선언한 정당이 사실상 폐지나 다름이 없는 금투세 유예에 찬성한다면 계층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이 아니라 부자들의 정당이 되겠다는 것이다.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다. 근본을 바꾸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다. 시기상조론도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다. 나중에 하자는 것은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김대중 대통령은 후배 정치인들에게 국민의 반 발짝 앞에서 국민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금투세 유예를 주장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국민의 반 발짝 뒤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성한용 |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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