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투세 내겠소”, 듣고 싶었던 그 말
주식과 채권에 20억원을 투자해 2억원을 벌었다. 그러자 정부가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며 3300만원을 내라고 한다면?
“내가 잠을 줄여가며 연구하고 리스크를 감수해서 간신히 10% 수익을 냈는데 나라가 뭐 해줬다고 떼어가” 하며, 계좌의 돈을 빼서 떠날까?
“그렇다”는 게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반대론자의 주장이다.
연간 금융투자로 5천만원 이상을 버는 1%의 자산가에게 세금을 매기면 이들이 가진 것을 팔고 나가, 1400만 ‘개미투자자’가 피해를 본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가 표 계산을 하는 정치인들에게 먹혀들었다. 결국, 금투세 법안은 시행을 코앞에 두고 폐기될 처지가 됐다.
올해 초부터 이어진 금투세 공방에서 내내 궁금했던 것은, 새로 세금을 내야 할 이른바 ‘슈퍼개미’들의 생각이었다. 수십억~수백억원을 굴리는 그들이 웬만한 나라에 다 있는 성격의 세금을 내기 싫어 아예 증시를 떠난다는 게 납득이 안 됐다. 만일 그런 말이 금투세 도입을 막자고 부풀린 거라면, 그 논거가 너무 사악해 보였고 실망스러웠다. 정부가 세금을 허투루 쓴다거나, 법조문이 허술하다든지 하는 이유로 반대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몇백만~몇천만원 투자하는 개미투자자의 피해를 들먹이며 불안과 공포를 조성했다.
물론 슈퍼개미들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입의 혀처럼 구는 ‘각종 전문가’들이 논리도 만들고 방송과 유튜브에서 열심히 떠들어주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이 부자 걱정 해준 덕분에, 금융시장의 큰손들은 손 안 대고 코 풀었다.
부자 감세의 결과는 복지 예산 삭감으로, 소멸 위기인 지방의 교부세 삭감으로 이어져, 어려운 사람들을 더욱 고단하게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자가 다 그런 건 아닌가 보다. 금투세 폐지가 확정적이란 소식을 전한 5일치 한겨레에는 ‘세금 더 내겠다는 미국 부자들’ 이야기도 실렸다.
부유세 찬성 여론을 이끄는 ‘애국적 백만장자들’의 의장인 모리스 펄은 인터뷰에서 “제가 보유한 주식을 팔아 40만달러 수익을 내면 약 5만달러를 세금으로 냅니다. 직장인이 40만달러 연봉을 받아 내는 세금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죠”라며, 자산소득에 붙는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도 월가의 투자회사에서 부를 쌓은 사람인데 이렇게 증세 운동을 하는 건, 미국의 사회·경제 시스템 덕분에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부자가 “나 혼자 잘나서 부를 일군 게 아니다”라며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서는 일은 세계 곳곳에서 목격된다.
영국 여론조사기관 서베이션이 주요 20개국(G20)의 백만장자(주택을 제외하고 100만달러 이상의 투자자산을 보유한 사람) 2385명을 지난해 말 조사한 걸 보면, 자산에 적용하는 세율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49%로 현행 유지나 세율 인하를 원하는 답변보다 많았다.
물론 세금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내겠다는 목소리를 내는 일부 부자가 있어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연대하려는 마음도 생겨난다. 이런 모습이 사회에 퍼진 불신과 분열을 치유하고, 시민의 덕성을 고양하는 동력이 된다.
전후 세계를 번영으로 이끈 민주적 자본주의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분열과 불신이 원인이다.
최근 목격한 징후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재선이다.
과거의 미국이었다면, 수십건의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중죄인, 입만 열면 여성, 이민자, 사회적 약자에게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인물에게 나라의 운전대를 다시 맡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돌아올 수 있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불평등에 더해, 뒤처진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능력주의가 엘리트와 보통 사람의 분열선을 선명하게 했다. 이번에도 저학력 백인 남성과 저소득층은 누가 뭐래도 트럼프를 찍었다.
한국의 자산가들은 돈 모아 집 사는 일에 좌절해 금융시장에서 기회를 찾는 젊은이들을 볼모 삼아 금투세를 무산시켰다. 한국 사회도 위기임을 보여주는 징후다.
2020년 여야 합의로 금투세를 도입하고, 2024년 이를 여야 합의로 폐지하는 간격만큼 우리 사회가 뒷걸음쳤다.
“나는 금투세를 내겠소. 내가 번 것은 교사, 간호사, 소방관 등 수많은 사람이 저축한 바탕에서 이뤄진 것이오. 소수의 부자가 점점 더 부자가 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한국인은 낙담을 하고 있소.”
‘돈도 있고 가오도 있는’ 이런 말은 왜 들을 수 없는가?
이봉현|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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