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아’ 청산 못하면 사회대개혁 물거품
[이봉수 현장칼럼] 민주시민은 안중에 없는 최상목
성자가 된 시민들
‘은박비닐로 겨우 몸을 감싸고 석고상처럼 앉아 있는 시민들 머리 위로 밤새 눈이 내립니다. 전국의 법당에서 나와 상경한 젊은 부처님들과 십자가에서 내려온 어린 예수님들이 눈에 덮이고 있습니다. 우비 천사가 든 붉은 깃발이 얼어붙은 허공에서 미동도 없이 펄럭입니다, 내, 란, 수, 괴, 체, 포.’ (김주대 시인)
지난 토요일 오후 2시 안국역 앞 촛불문화제부터 광화문 앞 범시민대행진, 동화면세점 앞 탄핵 반대 집회, 그리고 한남대로 체포∙탄핵 찬반 집회까지 다 취재했지만, 결정적 순간을 놓쳤다. 우리 부부가 밤늦게 귀가해버린 탓이다. 폭설을 고스란히 맞으며 밤을 지샌 이들의 장엄한 모습을 본 것은 김주대 시인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사진을 통해서였다. 그 사진을 보고 “내 기사에 넣어도 좋으냐”고 묻자 “자기도 출처를 모르는 사진”이라더니 문인화 한 폭을 그려 올린 것이다.
한국현대사에 기록될 명장면들
일요일 밤에도 그들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 장면이 될 현장을 지키고 있었고 윤석열이 체포될 때까지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날은 야당 정치인도 대거 집회에 참석했다. 진보당 정혜경 의원이 2박3일간 도로에서 시민들과 함께 ‘체포 촉구 행동’을 하고 있는 사진이 엄청난 감동을 불러일으킨 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밤 늦게라도 귀가하는 이들은 청년들에게 핫팩 배터리 우산 은박비닐 등을 넘겨주며 미안함을 표시했고, 전국에서 컵라면 커피 김밥 어묵 같은 먹거리들이 선결제 등으로 답지했다. 일신빌딩은 1층 홀을 개방했는데 화장실이 붐비자 ‘2층에도 화장실이 있다’는 안내문을 써붙였다.
관저 인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나흘간 강당과 화장실을 제공했다. 한 수사는 본당 여자화장실에 70여명이 줄을 서있자 뒤에 있는 줄을 잘라서 다른 화장실로 안내했다. 이 사진은 소셜미디어에 수없이 퍼 날라졌는데, ‘성인이 따로 없다’, ‘없던 신앙심이 생겨 교회에 나가고 싶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달라”는 말을 남긴 가난한 약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선결제에 따른 난방버스도 늘어나 저체온증에 시달리는 집회 참가자들이 원기를 회복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한 난방버스에는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가 들어와 몸을 녹이고 음식물을 가져가려다 들통이 나기도 했다.
세계 유수언론도 다 비판한 ‘부정선거 음모론’
양 진영이 집회에 참가한 동기나 탄핵 또는 체포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무엇이 정의인지 분명한데도, 한국의 뒤틀린 언론 현실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보면 상황은 간단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
백보를 양보해 탄핵 반대 집회 쪽 주장처럼 한국 언론이 윤석열에 적대적이라 치자. 그러면 한국의 진영논리에 휘둘릴 턱이 없는 세계 유수 언론은 왜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이 체포되지 않는 이유를 한결같이 분석할까?
AFP통신은 ‘대통령 관저 앞에 모인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모호한 음모론’에 빠져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태극기 부대에게 윤 대통령 수호는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종북주의자’들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것과 동의어로 여겨진다’며, ‘윤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극우 유튜버들의 음모론이 상당히 유사하다’고 보도했다.
세계 언론의 이런 보도는 한국경제의 신뢰도가 절벽으로 추락하는 재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 ‘체포하지 말라’는 최상목의 태생적 한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경제계 신년인사회 등에 참석해 “경제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말했는데, 윤석열의 체포와 탄핵 없이 세계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의 신뢰를 어떻게 되찾겠다는 건지 묻고 싶다.
사태가 장기화하는 이유는 ‘부정선거’라는 가짜뉴스에 휘둘린 불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정의가 맞붙은 싸움인데도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는 세력이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중립은 각자 근거가 있어 다른 주장을 펴는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조정할 때 필요한 것이지 정의와 불의를 평균내 처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관료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런 비상시국에도 공감능력 제로에 보신주의와 기회주의로 처신하는 경제관료 출신 최고 권력자가 바로 최상목 대행이다. 그의 처신에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평가마저 내릴 수 없다. 그는 국회가 합의한 헌법재판관 1명을 임명하지 않았고, ‘경호처가 체포영장 집행에 응하도록 해달라’는 공수처 요청도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경호처에 경찰력을 지원하려다가 경찰청이 거부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5일에는 겨우 한다는 소리가 “시민들과 공무원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거였다. 경호처가 물리력으로 관저 진입을 막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말은 영장 집행을 하지 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12.3 내란의 밤에 최고금융당국자가 참석하는 F4회의를 소집하고, ‘국회를 대신할 비상입법기구 예비비를 마련하라’는 메모를 주고받는 등, 내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혐의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도 유력하다.
그것 말고도 나의 관점은 다른 데로 쏠려 있다. ‘모피아’로 불리는 기획재정부의 수구성이 그것이다.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그리고 두 기관이 통합된 재정경제원의 출입기자로서 알고 지내던 전직 금융위원장이 2019년 초에 상을 당해 문상하러 갔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역시 문상 온 현직 차관을 비롯한 기재부 고위관리들이 선배인 전직들에게 ‘야단’을 맞는 게 아닌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국가채무 증가에 관한 성토였다.
윤석열 정부 탄생의 공로자 ‘모피아’
기재부 관리의 균형재정 집착은 거의 종교 수준이다. 재정건전성 유지는 좋은 정책목표지만, 긴급상황에서도 복지지출에 인색한 관성은 큰 문제다. 코로나19 상황을 맞아 대통령이 첫 비상경제회의에서 “국민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게 최우선”이라고 ‘읍소’했을 때도 기재부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김동연 부총리가 소득주도성장에 반발했고, 말기에는 홍남기 부총리가 재난지원금 지출을 거부해 윤석열 정부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재정건전성이 신조였다면 새 정부에서도 재난지원금 지출을 거부했어야 하는데, 거액의 지원예산을 바로 편성했다. 나는 그런 태도 돌변의 이유를 기재부 관리들이 원래 수구적이어서 진보정권의 탄생을 싫어한 때문이라고 본다.
진보정권 초기에 개혁 성향 경제학자들이 청와대에 들어가지만, 타협하지 않으면 관료에게 밀려나는 전철을 밟는다. 김태동·이정우·장하성∙정태인이 다 그랬다. 진보정권임을 표방하고서도 진보적 가치를 포기하면 정권 창출의 효능감을 상실해 결국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
제주항공 사외이사였던 윤 정부 실세들
기재부에는 행정고시 합격자 중에서도 성적 최우수자들이 몰려, 검찰과 비슷한 엘리트주의 행태를 보인다. 상당수는 혼인 등을 통해 기득권층에 편입되고, 퇴직 후에도 노른자위 자리들을 꿰찬다.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될 때는 금융∙예산∙세제라는 경제정책 3권을 모두 다 장악해, ‘공룡 재경원 귀 막고 질주’라는 비판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 부작용 때문에 분리와 통합을 반복해왔다.
기재부 출신은 타 부처 장∙차관 자리도 과점하고 있고, 퇴직 후에는 산하 기관장이나 사외이사 등으로 진출한다. 30대 기업의 사외이사 46%가 관료 출신인데, 기재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윤석열 정권에서 검사 출신 약진이 두드러졌지만, 검찰과 기재부 출신의 공동정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번에 사고가 난 제주항공만 하더라도 김주현 민정수석은 제주항공 사외이사를 지냈다. 또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제주항공의 지주회사인 AK홀딩스 사외이사로 있었고 아들도 계열사에 입사했다.
사외이사는 원래 목적인 경영감시 기능은 거의 하지 않고 대개 로비 창구로 활용된다.
기재부에 대거 포진한 서울법대 인맥
기재부에는 이헌재∙강경식∙강만수∙윤증현∙김진표 등으로 이어지는 서울법대 인맥이 다수 포진해 있었는데, 최상목은 그 맥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국민의힘과는 서울법대 82학번인 나경원∙원희룡 등 동기들과 연결되고,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같은 과 선배다.
그들은 ‘민생’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서민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안전이나 노동환경 등에 관한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인데, 보수 정부는 기업을 편들어 규제는 무조건 나쁜 것이란 인식을 심어왔다.
법인세와 종부세 인하 등 부자감세에는 의견을 쉽게 모으지만, 양곡관리법 등 농민과 노동자의 소득을 올려주는 일에는 무심하다.
그들은 법조계와 함께 한국사회 기득권충의 최상부를 형성해 혁신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예산편성 과정을 예로 들면, 사회정책상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도 조금 깎거나 늘리는 식으로 일한다.
이번에 헌재 재판관 3명 중 진보 성향인 마은혁 후보를 임명하지 않고 1명 깎는 걸 보고 ‘그러면 그렇지’ 했다. 어느 쪽에서도 욕 먹지 않으려는 ‘예산편성식 임명’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피아' 행태 답습되면 안전도 복지도 신기루
과거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서로 견제할 때는 그나마 기획원의 혁신성이 재무부의 보수성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는데, 그건 옛날 이야기다.
지금 윤석열 체포와 탄핵을 추진하는 단체들을 아우르는 이름은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다. 퇴진운동을 사회대개혁으로 이어가려면 기재부 출신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기재부 관리들 중에도 특히 젊은 관리들은 유능한 인재들이 많지만, 그들이 내놓는 정책들이 기득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향한다면 저지돼야 마땅하다.
민주당도 보수정당에 가깝지만, 집권할 경우 다소나마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검찰개혁과 함께 세제 등 재정개혁과 기재부 혁신을 힘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모피아’의 나쁜 행태가 답습된다면 안전선진국도 복지국가도 신기루일 뿐이다.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hibongs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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