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며
--- 곡성, 구례 지역 답사
오 봉 렬
2007년 5월 24일은 석가탄신일이자, 우리에게는 결혼 25주년 기념일이다. 25주년이라서 다른 해와는 달리 뭔가 특별한(장거리)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주말을 이용하여 답사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비록 예전에 다녀온 곳이라도 다시 돌아보기로 하였는데, 답사 관련 책을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지리산 서쪽의 곡성과 구례지역으로 정하였다.
곡성은 예전에 태안사 외에는 찾아본 곳이 없어서 처음 가게 될 곳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구례 쪽은 거의가 한두 번 쯤은 가본 곳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시간이 흘렀으니 다시 찾아보자고 하였다.
비교적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지라 일요일의 답사시간을 최대한 갖기 위해 토요일 진료를 마치고, 저녁에 출발하여 남해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옥과 나들목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하였다.
정감록에서 ‘옥과는 피난처로 안성맞춤’이라고 하였다는데, 그만큼 외부에서 들어오기 어려운 오지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첫 답사지로 정한 곳은 옥과 남쪽의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인데, 큰 길에서 깊숙이 떨어진 곳에 동네가 형성되어 있었다.
동네 입구에 한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5층석탑을 먼저 보려고 그냥 지나쳤다. 마을을 돌아 한참을 더 간 뒤에야 가곡리5층석탑을 만날 수 있었다.
가곡리5층석탑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배경으로 하고 전방에 탁 트인 시야를 갖고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탑 뒤쪽으로 약간의 평지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로 보인다. 그러나 탑 외에는 이렇다 할 부재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훤칠하니 키가 크지만 기단부는 작고, 1층 몸돌은 지나치게 높아서 비례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보물 제1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답사책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소개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근래에 보물로 승격된 듯하다. 이 탑의 근방에는 사당이 새로이 조성되고 있었다.
탑을 보고 나오는 중에 차 앞의 풀섶에서 큰 꿩 한 마리가 나오더니 앞으로 막 뛰어간다. 깃털도 화려한 수컷 꿩(장끼)이 날아가지도 않고 한참을 뛰어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야생의 꿩을 본 것은 집사람이나 나나 처음이었다.
가곡리 마을 입구에는 한 쌍의 돌장승이 서 있는데, 둘 다 키가 크고 날씬하게 생겼지만, 조각은 그리 뚜렷하게 새기지 않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남녀 구분이 된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장승으로 둘 다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인상을 하고 있다.
가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율천리 마을 어귀에도 한 쌍의 돌장승이 있었다. 이 두 장승은 가곡리의 것과는 달리 크기도 작고 돌도 거의 다듬지 않고 얼굴 모습만 얕게 새겨 놓았다. 할머니 장승은 얼굴이 거의 땅에 파묻힐 정도로 작다.
이 장승들은 둘 다 엄하고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액을 쫓기 위한 것이리라. 남장승은 원래의 것이 1988년도에 도난당하여 근래에 새로 세운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장승 근처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에게서도 외부인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옥과로 돌아나와서 전남과학대학 뒤편에 있다는 옥과서낭당 목조신상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위치가 불분명하여 찾지를 못하고, 면사무소에 주차시키고 늦은 아침을 먹었다. 옥과면사무소에는 아마 근방의 것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은 듯 여러 개의 공적비(불망비)가 세워져 있었다.
옥과에서 곡성 쪽으로 가는 중간에 도림사 계곡이 좋다 하여 들어가 보았는데, 물이 맑고 시원하여 여름철 피서에 좋은 곳이었다. 절 옆에까지 올라가는 것이 그늘도 지고 더 좋아 보인다. 잠시 발만 담그고 다시 돌아 나와서 곡성 쪽으로 향하였다.
도림사에서 나와 곡성을 지나면서부터 구례와 하동 쪽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섬진강 꽃길이다. 섬진강 기차마을 안내표지판도 자주 보인다. 섬진강을 따라 길이 계속 이어지는데, 가드레일 때문에 그 좋은 경치가 가려져 아쉽다. 중간 중간에 유원지들이 더러 보이는데, 그 중에 압록유원지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압록유원지에서 우회전하면 곡성에서 가장 유명한 절집인 태안사로 갈 수 있는데, 비교적 근래에 가보았기 때문에 이번 답사여정에서는 제외하였다. 우리는 압록유원지에서 좌회전하여 다리를 건너 다시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논곡리 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유원지구역이라 운전에 조심해야 한다. 가족용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고, 말을 타는 사람도 보인다. 여름에는 래프팅도 한다고 한다. 학생들이 단체로 MT를 올만한 곳으로 적격일 듯 싶었다.
강을 등지고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탑선마을 정자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마을 뒤편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면 산자락의 끄트머리 능선부에 3층탑이 오롯이 서 있는데, 탑 옆에는 묘지가 두엇 들어서있다. 절이 들어서기에는 좁아 보이니, 아마도 마을의 비보를 위해 탑을 세운 것이려니 짐작해본다. 석탑에서 앞으로 바라보이는 경관이 훌륭하다.
석탑의 기단부 양 옆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돌사자 한 쌍이 있는데, 등에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볼 때 무엇이가를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모습은 비교적 단순한 편인데 기단의 갑석 윗부분에는 다른 석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복련과 인동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언제 되찾아왔는지 답사책에는 없어졌다고 하는 머리가 파손된 작은 석불좌상이 탑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논곡리3층석탑은 보물 제50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답사를 다니다 보니, 두 개의 탑이 있는 사이의 한 가운데라든가, 절터였음직한 자리에 만들어진 무덤을 가끔 보게 되는데, 약간 묘한 감정이 스치곤 한다. 묘를 꼭 여기에 써야만 되었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자신의 집안만 생각하는 이기심의 발로라는 생각이 스친다. 풍수적으로 볼 때도 양택지에 음택을 쓴 격이라 맞지 않을 듯 싶다.
탑에서 내려오는 길에 비탈길 길가에 자생하는 머위대가 있어서 여남은 개 잘라와서는 집에서 나물로 데쳐 먹었는데, 우리가 직접 채취해 온 것이라 그런지 더욱 맛있게 여겨졌다.
한편 탑선마을은 집이 10여 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인데, 마을의 한 가운데로 폭이 좁은 실개천이 흐른다. 이 실개천을 경계로 하여 왼쪽은 곡성군, 오른쪽은 구례군으로 경계가 나뉜다고 한다.
논곡리에서 나와 다시 압록유원지길을 내려와 이번에는 강의 반대쪽에서 구례까지 내려가는 길을 타고 갔다.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도로가 나란히 구례구까지 이어진다.
구례에서 다시 남원 쪽 방향으로 새로 난 길을 가다가 이평이라는 곳에서 빠져나가면 폐교된 학교를 지나고 조금 더 가면 방산서원에 이른다. 방산서원 뒤편으로 남원 윤씨 문중묘가 있다.
윤문효공(윤효손)은 조선 성종대의 문신으로 숭정대부에 오른 인물이다. 윤문효공의 묘 앞에는 석비, 석등(장명등), 신도비가 차례로 있다.
윤문효공의 신도비(보물 제584호)는 중종 14년(1519)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가 5m가 넘어 조선시대에 제작된 신도비 가운데 보기 드문 대작이다.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구름무늬가 있는 커다란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연화대좌가 있고, 연화대좌를 보료처럼 깔고 그 위에 귀부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수에는 화려한 용무늬의 조각이 인상적이며, 이수의 윗부분에도 탑의 상륜부와 유사한 둥근 여의주 모양의 석재가 있다.
윤문효공의 묘 앞에 있는 석비와 석등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석등은 팔작지붕 양식의 지붕돌에 상륜부까지 갖추고 있으며, 상중하 세부분 지대석의 꽃무늬 장식 등 제법 화려하다.
한편 묘소에서는 정면으로 멀리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등 배산임수의 명당요건을 갖추고 있다.
신도비를 보고 이평에서 다시 구례 방향으로 돌아오다가 천은사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해서 지리산 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답사 계획에 있던 매천사당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매천사당은 구한말의 우국지사이자 역사가인 매천 황현을 기리는 사당이다. 1910년 8월 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한 달 뒤 전해들은 황현은 절명시(絶命詩)와 유서를 남긴 채 많은 아편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책에 나와 있는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명분은 없다. 다만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마라.”
그가 지은 『매천야록』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을 때인 1864년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이 망할 때(1910년)까지 약 47년 동안의 사건들을 적은 역사서(野史)로서,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한 왕조가 어떻게 망했는지를 교훈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한국 근대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에 천은사 쪽으로 갈 기회가 있을 때는 그의 높은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매천사당을 꼭 찾아봐야 하겠다고 생각해 본다.
천은사에 이르니 예전에 없던 주차장과 큰 저수지가 들어서 있었다. 원래 이 절은 호젓한 곳이었는데, 참배객이나 답사객이 많이 찾다보니 어쩔 수 없었나보다. 우리가 갔을 때도 한 무리의 참배객들이 스님의 안내를 받아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문을 지난 경내는 아직도 조용한 산사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천은사(泉隱寺)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일주문 현판 글씨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설화를 소개해서 더욱 알려지게 된 곳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은사는 원래 감로사(甘露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뒤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언교 이광사가 ‘智異山 泉隱寺’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천은사의 사천왕상은 크기도 크려니와 그 조각이나 색채가 담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많은 절들의 사천왕상들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무심히 지나치곤 하는데, 오늘은 왠지 눈길이 간다. 어렸을 때는 이러한 신상들이 무척 무서워서 얼른 도망가곤 했는데...
극락보전 뒤편에는 적절히 단을 이루어 구분을 한, 그리 크지 않은 몇 채의 전각들이 팔상전을 중심으로 잘 어울려 배치되어있고, 그 앞에는 토속신앙적인 큰 돌을 가져다 놓았다.
또한 이 절의 아름다움은 축대에도 깃들어있다. 큰 바위와 작은 바위, 그리고 큰 돌, 작은 돌들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살려 안정감 있게 쌓은 솜씨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 짓는 절들의 축대에서는 보기 힘든 자연스런 멋이 그대로 느껴진다.
화엄사는,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명확히 밝혀졌으며,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조8년(1630)에 중수되었으며,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이 중건되면서 숙종으로부터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격이 높아져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천은사가 고즈넉한 느낌의 절이라면, 화엄사는 웅장하고 장엄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절의 규모도 크려니와 전각이나 석조물들이 큼직큼직하여 시원스런 느낌을 준다. 절의 조경에도 많이 신경 쓴 듯이 보인다. 또한 절의 명성에 어울리게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도 많다.
일주문 밖 오른쪽 한켠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남악사(南岳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리산(남악) 산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산신제당이다.
신라와 고려 때도 지리산 산신제를 지내왔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산신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순종 때(1902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폐지되었다고 하며, 1969년에 남악사를 세우고부터는 인근 주민들이 매년 곡우 때 산신제(약수제)를 지낸다고 한다.
사찰 안에는 토속신앙을 받아들인 산신각의 형태로 있는데, 위패는 없고 산신령(호랑이와 동자 포함)의 그림이나 조각상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사당은 사찰 경내 밖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사찰과는 별도의 독립 건물로 보인다.
한편 화엄사의 일주문은 기둥 옆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고, 문에는 문짝도 있는 등 다른 절집에 비해 폐쇄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이 마치 TV 화면처럼 보인다.
보수중인 보제루 건물을 옆으로 비껴 돌아서 마당으로 들어서니, 두 개의 5층석탑과 대웅전과 각황전 등의 건물이 모두 보인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인데, 각황전이 너무 크다 보니 자연히 각황전 쪽으로 눈길이 쏠린다. 만일 보제루 밑으로 올라와서 정면에서 대웅전을 본다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화엄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두 개의 5층석탑은 멀리서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쌍탑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동5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장식도 없이 수수하며, 서5층석탑은 이중기단이면서 상?하층 기단과 1층 몸돌에 십이지상, 팔부중상, 사천왕상 등을 조각해 넣어 장식성이 강하다. 그리고 동5층석탑은 보물 제132호, 서5층석탑은 보물 제133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서탑의 옆 축대 밑의 반송이 작지만 운치가 있다.
화엄사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크기도 크고 외관도 출중하며,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더욱 당당한 위용을 갖춘 각황전이라는 후배(?)의 그늘에 가려 약간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4년(1636)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각황전에 비해 석축에서 한 걸음 더 가깝게 들어서 있는데, 앞마당에서 볼 때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각황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이 각황전 앞의 계단보다 규모가 큰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한다.
서5층석탑 옆의 계단을 올라서면 거대한 각황전(국보 제67호) 건물이 시야를 가로 막으며, 역시 그에 걸맞은 크기로 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석등과 마주치게 된다. 역시 크기라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며, 그러한 큰 규모임에도 매우 안정적이고 비례가 잘 맞는 아름다움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각황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현재 각황전이 유명한 것은 그 건물의 아름다움과 규모 때문이지만, 예전에 각황전, 곧 장륙전이 유명했던 것은 이 전각 벽면을 돌에다 새긴 화엄경으로 장식했던 때문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을 세우면서 화엄사에 3층으로 된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을 화엄경을 새긴 돌판으로 둘렀다고 한다.
이 화엄석경은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렸으며, 그 파편이 현재 약 1,500여 점 정도가 남아 있어서, 대웅전 옆의 영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각황전은 외부에서 볼 때는 2층 형태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통해 있는 통층형 구조이다.
각황전은 동쪽을 향하고 있어 햇볕 때문에 정면에서 찍을 수 없었기도 했지만, 워낙 거대한 건물이라서 내 폰카메라로는 다 담을 수가 없어서 뒤쪽에서 찍었다.
각황전 앞 석등은 높이가 6.4m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고 한다.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등의 기본형인 팔각을 따르고 있지만 간주석을장구 모양의 고복형으로 만들었으며, 하대석과 상대석의 복련? 앙련 조각이나 지붕돌의 귀꽃 등은 큼직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화사석 부분이 매우 커서 가분수형으로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이다. 석등 전체가 시원시원한 스케일로 장엄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 옆의 무엇인지 불분명한, 특이하게 생긴 탑 모양의 석조물은 보물 제300호인데,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국보인 4사자3층석탑과 닮았다. 혹시나 특이한 형태의 부도는 아닐런지...
각황전 뒤의 동백숲 사이로 난 호젓한 비탈길을 올라가면 특이한 모습의 석탑과 석등을 만나게 된다.
석탑은 기본적으로는 이중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에 독립된 네 마리의 사자를 각 귀퉁이에 앉히고 그 대각선 중앙에 합장한 스님상을 세웠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 때문에 4사자3층석탑이라고 불리운다. 4사자석탑이 전국적으로 몇 개가 있지만,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석등 역시 특이하게 생겼다. 석등의 앞에 길쭉한 네모의 배례석을 놓고, 화사석을 받치는 기둥은 세 개인데, 기둥 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의 인물상을 두었다.
그리고 석탑과 석등 사이에는 석등 앞의 배례석 보다 약간 큰 또 다른 배례석을 배치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석등 안의 인물상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이고, 3층석탑의 스님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효심이 깊었던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차를 공양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일대를 효대(孝臺)라고 하는데, 대각국사 의천이 이러한 전설을 인정하고 시를 읊었던 데에서 나왔다고 한다.
석탑의 하층기단에는 갖가지 모습의 화려한 천인상이 새겨져 있고, 상층기단의 네 마리의 사자는 표정과 자세가 각각 다르게 표현되었다. 1층 몸돌에는 문짝모양과 함께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전형적인 신라 전성기의 탑 모습과 그대로 닮았다.
석탑의 건립년대는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불국사의 다보탑과 더불어 이형석탑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국보 제 35호로 지정되어있다.
화엄사에서 나와 연곡사 쪽으로 가다 보면 운조루 안내판이 보인다. 운조루는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으로 1776년 무관 유이주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운조루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금구몰니(金龜沒泥 ;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있다는 뜻)의 명당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유이주가 집터를 잡을 때 땅속에서 어린애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돌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거북이 말라 죽지 않도록 습기가 많은 부엌을 둔 것이다.
돌거북은 집안의 가보로서 대물림을 하고 있었으나, 1987년 도둑맞아 이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운조루의 앞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안에 둥글게 섬을 만들었으며, 다리가 걸려 있다.
이 연못과 운조루의 행랑채(대문)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물길을 만들었는데, 사시사철 뒷산에서 내려온 물이 풍부하게 흐른다.
운조루에서 바라보이는 맞은 편의 산이 오봉산(오산)인데, 높지도 험하지도 않지만 비경이 많고, 원효, 도선, 진각, 의상 등 네 성인이 수도하였다는 사성암이라는 암자가 있다고 한다. 오봉산과 운조루 사이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옛부터 이집은 99칸 집으로 알려져 왔으나, 건축 당시에는 78칸으로 지었고, 현재는 60여 칸이 보존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150년 이상, 30칸 이상 되는 고가 건물은 열아홉 곳 뿐이라고 하는데, 운조루는 일(一)자형의 행랑채만 해도 24칸이나 되는 큰 규모이다.
운조루는 조선후기 양반가의 대표적인 주택으로서,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민속자료가 되며, 류씨가가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많은 전적류와 고문서, 서화 및 생활사의 자료를 잘 보존하고 있다.
대문 앞에서는 류이주의 8세손이라는 분이 애써 주변의 산세와 지세를 가리키며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몇 년 전 운조루를 찾았을 때는 그 명성에 비해 매우 황폐한 느낌을 가졌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많이 손을 본 듯 괜찮게 보인다.
예전에 행랑채에 나무로 만든 큰 쌀독을 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하지 않도록 음덕을 베풀었다고 하며, 누각 밑에 있는 큰 수레바퀴는 이 집의 넉넉했던 살림규모를 말해주는 듯하다.
정(丁)자형의 사랑채 가운데 부분이 불을 때는 곳인데 여기를 통하여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고, 안채에는 현재 류이주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운조루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곡전재라고 하는 곳이 있다. 명당터 중의 하나인 금환락지(金環落地)처럼 보이도록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대숲을 만들어 놓았다. 밖에서 보기에 마치 작은 성채처럼 보인다.
솟을대문에 창을 낸 것으로 보아 다락이 설치된 듯하다.
대문간에는 방명록과 함께 구례군 관광안내 팜플렛을 비치하여 필요한 사람은 가져갈 수 있게 하였다.
마당에는 오른쪽 뒤편 연못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길을 태극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정성은 들였지만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랑채 건물 오른쪽 뒤편에 있는 연못에는 거대한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전통가옥 고가펜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단체손님인 경우 50명까지 숙박할 수 있다고 한다.
사방 주변이 모두 논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지세가 너무 낮지 않은가 생각된다.
운조루에서 나와 연곡사쪽으로 가다보면 길가에 석주관성(사적제385호)이 있다. 석주관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고,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으며,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쌓은 성터가 남아 있으며, 이때 장렬히 전사한 의사 7인의 묘가 있다.
사당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문이 잠겨있는데다 시간이 부족하여, 묘는 보지 못하고 잠시 중문까지만 들어갔다가 나와서 연곡사로 향하였다.
연곡사는 지리산 피아골에 있다. 피아골하면 떠오르는 것이 빨치산이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토벌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당시 죽은 이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피아골 단풍이 여느 단풍보다 유난스레 붉다고 한다.
연곡사 앞의 길가에도 검붉은 잎의 단풍나무가 눈길을 끈다. 그러나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식용 피(직)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이다.
연곡사는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져 있지만, 화엄사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분위기도 매우 호젓한 절집이다. 절터는 넓은 편이지만, 남아 있는 건물들은 별로 없다.
요즘의 연곡사는 부도기행으로 많이 찾는 절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는 연곡사의 동부도를 부도 중의 최고의 걸작으로 표현하였다.
대웅전에서 오른쪽 옆으로 난 호젓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를 차례대로 만날 수 있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오르는 맛이 또한 그만이다.
‘부도중의 부도’라 할 만큼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간직한 동부도는 신라말기에 만들어졌으며, 누구의 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형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를 갖춘 팔각원당형의 구조이며, 경내에 있는 여러 개의 부도 가운데 조각 솜씨가 가장 정교하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팔각 2단의 하대석이 놓이고, 하단에는 운룡문이 얕게 조각되었다. 상단에는 등근윤곽선을 돌린 각 면에 자세를 달리 하는 사자가 양각되었다. 하대석 윗면에는 각형으로 된 3단의 굄이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과 그 안쪽에 팔부중상이 조각되었다.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3단의 굄대는 중대석을 받치고 있는 굄대와 대칭을 이룬다. 상대석은 두 겹 앙련으로 연잎마다 국화 같은 꽃무늬가 돋을새김 되어 있으며, 그 위에 몸돌받침이 있다.
몸돌받침에는 난간 같은 고복형의 마디가 있는 우주가 몸체와 분리돼 있고, 여덟 개의 면이 있는데, 각 면마다 안상 안에 가릉빈가(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조) 1구씩이 조각되었다. 몸돌받침 윗면에는 낮은 3단의 굄이 돌출되어있고, 그 위에 팔각형 몸돌이 놓여 있다.
몸돌은 아래보다 위의 폭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이로 인해 부도는 좀 더 높이가 커 보인다. 몸돌 각 면에는 문비형?사천왕상? 가마 등이 조각되었다.
목조건축의 지붕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지붕돌은 아래쪽에 서까래와 부연, 위쪽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되었다. 지붕돌 끝에는 풍탁을 걸어 두었던 구명이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 하였다.
상륜부에는 앙화 위에 날개를 활짝 편 채 비상하려는 역동적인 모습의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고, 그 위에 연꽃이 장식된 앙화?복발?보륜 등이 차례로 얹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릉빈가는 머리가 모두 잘려 나갔다.
신라시대의 다른 부도보다 기단부가 높아진 듯하나 안정된 비례를 유지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높이는 3m이고, 국보 제53호로 지정되어있다.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돌의 재질이 뭔가 처연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으나,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도 한다.
동부도의 옆에 있는 동부도비는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어 주인을 알 수가 없다. 특이하게도 거북의 등에는 날개가 조각되어 있으며, 귀부의 용머리 부분은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놓았다고 한다.
귀부는 쇳덩이 같은 적갈색이고, 이수는 암갈색을 띄고 있어 돌의 재질이 서로 달라 보이며, 명문이 없어 누구의 부도비인지 알 수 없고, 동부도와의 연관성도 고증할 수 없다.
동부도비는 규모나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53호이다.
동부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북부도가 있다.
부도의 구조? 형태? 크기? 조각에 담긴 내용 등이 동부도와 거의 비슷해, 한 눈에 동부도를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대석에 복련을 새기고 귀꽃을 장식하였으며, 중대석에는 안상만을 새겨놓았고, 그 외의 대부분은 동부도와 유사하게 되어 있다. 동부도보다는 제작시기가 약간 뒤인 고려초기로 추정되며, 주인을 몰라 북부도라 부르고 있으나, 돌의 재질과 제작시기로 보아 경내 서쪽에있는 현각선사 부도비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국보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부도에서 약 100m 내려온 경내의 서쪽에 보물 제154호로 지정된 서부도가 있다. 서부도는 부도의 몸돌 뒷면에 ‘逍遙大師之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부도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부도의 몸돌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방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한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그 문하의 4대파 가운데 한 파를 이루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이다.
서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날렵한 동부도나 서부도에 비해 둔중한 편이고, 키도 조금 더 크다.
하대석에 빗물을 받는 것처럼 홈을 파놓았으며, 중대석은 둥근 모양에 아래 위 대칭으로 앙련과 복련이 조각된 독특한 모습이다. 상대석 위쪽의 받침은 각형과 호형으로 2단이며, 몸돌의 전면에는 문비, 뒷면에는 글씨, 나머지 여섯 군데에는 고부조의 신장상을 조각해놓았다.
지붕돌 귀퉁이에는 귀꽃이 큼직하게 달려 있다.
북부도는 동부도를 충실히 모방하였지만, 서부도는 동부도를 모방한 점도 있지만, 여러 군데에 변형을 가해 창의성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국보로 지정된 북부도보다 보물로 지정된 서부도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하기도 한다.
서부도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면, 귀부와 이수만 남은 현각선사 부도비가 있다. 이수의 앞면 가운데에 ‘玄覺王師碑銘’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전액이 있다.
이 부도비는 남아 있는 옛 탁본에 따르면, 고려 초 경종 4년(979)에 세워졌는데, 건국 초기의 힘과 기상을 담고 있는 듯, 귀부의 조형이 매우 거대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돌의 재질도 붉은 녹이 슨 쇳덩이 같아서 더욱 단단하고 강한 인상을 준다.
몸체에 비해 큰 머리,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콧구멍과 입, 그리고 갈기처럼 생긴 수염 등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두렵기보다는 해학적인 느낌이 들어,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수에도 고부조로 용들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는데 퍽 해학적으로 보인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고, 19세기 초반에 깨어졌다고 하는데, 구한말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로 더 철저히 파괴되었다. 흩어져 있던 거북조각을 한데 모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보물 제152호이다.
연곡사에는 이 외에도 채마밭에 보물 제151호인 3층석탑이 서 있으나, 부도와 부도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답사객들에게는 이미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만 이후라, 지나가면서 눈길만 주고 말게 되니 탑으로서는 애석한 일이라고나 할까?
*** 내가 실물로 본 부도 중에서 재미삼아 우리나라의 3대부도라고 내 나름대로 정한 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고달사터 부도 2. 연곡사 동부도 3. 쌍봉사 철감국사부도
부도와 부도비를 모두 보고 내려오는 길에 왼쪽으로 한켠에 정(丁)자형의 건물이 보인다. 작은 연못 위, 약간 비탈진 경내로 봐서 호젓한 쪽에 위치하고 있어 해우소일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외관이 너무도 잘 생겼다. 앞으로 나온 현관(?)을 들어서면, 널빤지로 만든 바닥이 일단 조심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임에도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아 정말 친환경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정말 이름 그대로 근심, 걱정을 다 풀어주는 곳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연곡사의 부도답사를 마치고 나니 해가 저물려고 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답사를 마쳐서 다행이다.
날이 더워 윤문효공 신도비를 보고 난 뒤에는 많이 지쳐서, 천은사 가는 길에 잠시 길가에 차를 대고 쉬면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로 더위를 달래기도 했지만, 많은 답사지를 거의 계획했던 대로 다 돌아본 것 같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답사 중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문화재 안내판이다. 아래의 것은 화엄사 4사자3층석탑의 안내판인데, 구례군 내에는 이와 같이 안내판이 통일되어 있었다.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간체자), 일본어의 네 가지로 설명하고 사진도 나와 있으며, 글자가 선명하게 잘 보이고 품위도 있어 보인다.
연곡사를 나와 하동 쪽으로는 계속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유홍준이 답사기에서 ‘보는 섬진강이지 말하는 섬진강이 아니다’라고 했던 그 길이다. 이 길을 확장해서 훌륭한 자연경관을 해치려 한다고 말이 많은 곳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이 길은 확장공사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된다. 길이 복잡할 때는 강의 양쪽으로 길이 나 있으므로 적절히 활용하면 될 것이다.
하동 가까이 이르니 강변으로 공원, 체육시설 등이 눈에 띈다. 강가의 넓은 모래밭이 해운대 바다의 백사장보다 폭이 넓어 보이는 곳도 있다. 누군가 해가 저물 무렵의 노을 속에 잠긴 섬진강을 보라고 했다.
사람들의 설왕설래 속에서도 여전히 섬진강은 말이 없다.
길가에 식당들이 대부분 재첩국, 참게탕을 써 붙여 놓았다. 식당주인에게 물으니 참게가 가장 많이 나는 제철은 4월이라고 한다. 비록 제철은 지났지만 우리는 참게탕을 주문하여 맛있게 먹었다.
남해고속도로는 주말이면 항상 밀린다. 느긋하게 남강휴게소에서 쉬면서 복잡한 시간을 피하여 그리 밀리지 않고 집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낸 ‘결혼 25주년 기념 답사여행’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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