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김천, 성주 지역 답사기

道雨 2007. 6. 8. 12:33
 

                 김천 · 성주지역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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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 : 2002. 12. 29                                      오 봉 렬


 김천은 소백산맥 밑에 있는 내륙지방이지만,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시내를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고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속도로를 오가거나 기차를 타고 지나쳐 가면서 김천 · 직지사 표지판 등을 많이 보았지만 거의 대부분 그냥 지나쳐 버렸고,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있는 성주지역과 함께 답사코스로 잡았다.

 


                      직지사와 성보박물관


 김천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 바로 직지사(直指寺)이다. 직지사는 신라땅에 불교가 공인되기도 전인 눌지왕 2년(418)에 신라 최초의 절인 도리사(경북 선산에 있음)에 이어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절 이름에 얽힌 내력도 많다. 직지사에서 창건주로 모시는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짓고 나서 손을 들어 멀리 서쪽의 산 하나를 곧게(直) 가리키며(指) “저 산 아래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했다고 하기도 하고, 고려태조 때 이 절을 크게 중창한 능여대사가 큰 불사를 하면서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가늠하여 일을 했기에 그런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直指人心 見性成佛’(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이라는 선가의 경귀에서 취했다는 설이 가장 타당할 듯 싶다.

 직지사는 조계종 제 8교구의 본사답게 규모가 크고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도 많다. 그러나  대웅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절 건물이 최근에 세워진 것이라 옛스런 맛은 거의 없다.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왜병들의 혹독한 보복을 받아 일주문, 사천왕문, 비로전만이 남고 모두 불타버렸던 것이다.

 경내에 있는 4개의 석탑을 포함하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은 대부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의 쌍탑(보물 제606호)과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제607호) 등 3개의 석탑은 문경의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이고, 나머지 하나(보물 제1186호)는 선산의 원동마을에 있던 것인데 선산군청에 옮겨져 있다가 다시 직지사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 4개의 석탑은 모두 모양이 비슷하며 문경지방의 특색을 지니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석탑과 대웅전의 후불탱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물들은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 공간이 좁아 교대로 전시된다고 한다. 우리가 얼마 전에 답사했던 선산의 도리사 부도에서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된 금동육각사리함과, 상주의 천인석각상을 탁본한 것이 전시되어 있어 더욱 반갑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예천의 한천사에서 출토되어 보물로 지정된 금동자물쇠는 우리나라에 두 개밖에 전하지 않는 귀중한 유산이라고 하는데 전시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들었다. 우리가 갔을 때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신중탱화는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어 탱화에 대한 공부도 많이 되었다.



                       대웅전에서의 해프닝


 대웅전 안에는 길이가 6m가 넘는 대형의 후불탱화 3점이 있는데 조선 후기 불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후불탱화를 보러 대웅전 안에 들어갔더니, 두 사람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고 가운데의 빈 방석에는 여자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대웅전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보살이 오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그 자리는 스님이 앉는 자리인데 어찌 버릇없이 네가 앉아 있느냐, 더군다나  여자가... ” 그러니까 절하던 여자(60대쯤 되어보이는, 아마 그 여자아이의 할머니로 추측된다)가 그 보살보고 얘기하였다. “아이가 뭘 안다고 아이한테 그럽니까? 그리고 우리가 매주 여기(직지사) 와서 시주함에 넣는게 얼만데 절에서 우리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되지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은 천원도 시주하는데 쩔쩔매지만 자기는 만원씩 내고 그것도 여기(대웅전)만 하는게 아니고 몇 군데(다른 법당) 시주하다보면 1달에 십 수만원이 나간다는 둥, 자기네는 그러면서 점심도 안먹고 간다는 둥, 하며 관리하는 보살을 공박하였다. 이에 보살은 우물쭈물 물러서게 되었고, 절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나를 포함하여 3명쯤 있었다) 앞에서 하는 말이 이랬다. “지가 시주하면 뭐 제 잘 되라고 시주했지, 절 잘 되라고 했겠나?”  부처님 앞에서 싸우는 모습도 그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모습도 그러하니 복이 제대로 오겠나 싶은 생각과 함께 남녀차별, 황금만능주의 병폐 등이 설핏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정성드리고 있는데 후불탱화 구경한다는 것이 미안해서 조용히 나와 버렸다.



                          황량한 갈항사터


 직지사에서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낸 뒤 찾아간 곳은 갈항사터이다. 갈항사터는 우리 석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쌍탑(갈항사터3층석탑 : 지금은 경복궁에 있다고 한다)의 고향이다. 갈항사터3층석탑은 건립연대가 밝혀진 많지 않은 신라 석탑의 하나이며, 신라시대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기단부에 금석문이 남아 있으며, 석가탑에서 완성을 본 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이 어떻게 경주를 벗어나 파급 · 확산되는지를 증명하고 있고, 그 조형미의 우수성 등으로 인해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혹자는 이 탑을 ‘석가탑 이후 가장 풍치있고 아담한 탑’이라 평가하였다. 1916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난 후 3층석탑은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석탑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절터에는 석조여래좌상과 석조 비로자나불이 남아 있다.



                          골육상쟁의 흔적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이 세종대왕 왕자태실이다. 지금까지 태실을 답사한 적이 없어 처음 보는 광경이며, 또한 조선시대 골육상쟁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더욱 그런느낌이 들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은 성주의 동북쪽으로 김천시 · 칠곡군과의 경계 근처에 있다. 양지바르고 맞춤한 작은 봉우리인데 주변이 다른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흔히 명당터에 속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골육상쟁의 역사를 볼 때 과연 명당인가 의심스럽다. 이곳에는 세종의 맏아들 문종을 제외하고 수양, 안평, 금성을 비롯한 여러 대군과 한남, 화의, 밀성을 포함한 여러 군, 그리고 세손이던 단종 등의 태를 갈무리 하고 있다. 세종 20년(1438)부터 24년까지 차례로 세워진 것이라 하며, 전국에 산재하는 많은 태실 가운데 가장 많은 태무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실을 두게 된 성주는 정3품관인 목사가 다스리는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봉우리 꼭대기에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 해서 모두 19기의 태무덤이 태비를 앞세우고 길게 두 줄로 늘어서 있는데, 앞줄에는 여러 군, 뒷줄에는 대군과 단종의 태무덤이 있어 격을 달리한 것처럼 보인다. 태무덤과 태비는 모두가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태무덤은 흡사 작은 부도같은 인상을 준다. 그런데 수양대군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태무덤은 훼손되어 주춧돌만 있고 태비는 없어지거나 부러져 있었다.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 단종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과 한남군, 화의군 등이다. 이미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태무덤까지 파괴하는 그 철저함에 다시금 진저리를 치게 되며 혹 세조의 생각과 달리 그 무리들에게 잘 보이려는 지역 수령이나 관리들의 그릇된 과잉충성이 이렇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태무덤 앞에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태비가 추가로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글씨는 알아볼 수 없게 마모되어 있다. 이는 조카(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미워한 백성들이 그 비에 오물을 퍼붓기도 하고 새겨진 글자들을 지워버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개마을과 동방사터 7층석탑


 다음으로 찾아간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의 집성촌인데, 오랜 내력을 지닌 고택이 여럿 있고, 마을의 분위기가 한가롭고 옛맛이 살아 있는 곳으로 여유롭게 마을구경한다는 생각을 갖고 찾는 것이 좋겠다.

 동방사터7층석탑은 왜관 쪽에서 성주 읍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눈에 잘 띈다. 고려시대 때 조성된 석탑으로 현재 7층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9층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주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탑의 규모나 보존상태로 볼 때 보물로 지정되어도 무방할 것 같은데 현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로 되어있다.



                         청암사와 수도암


 청암사와 그 부속암자인 수도암은 김천시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성주읍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도 약 1시간 가까이 가야 한다. 도로를 따라가면서 보니 지난 여름 수해로 인한 상처가 아직 역력하고 복구공사도 마쳐지지 않은 듯 하였다. 청암사 가까이 이르니 꽤 시간이 늦어 청암사는 제쳐두고 늦어지기 전에 수도암에 가기로 하였다. 수도암에 볼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수도암으로 가는 길은 포장과 비포장이 뒤섞이고 울퉁불퉁한데다 군데군데 그늘진 곳에는 눈까지 남아 있어 미끄럽고 위험하여 올라갈 때부터 내려올 일이 걱정되었다. 내려올 때는 해가 넘어가며 기온도 더 낮아지고 눈길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생각보다 깊숙히 들어간 곳에 위치한 수도암은 창건주 도선국사가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아 사흘 밤낮을 춤췄다고 하며, 지금도 경북 제일의 수도처로 꼽힌다고 한다. 삼층석탑 2기와 석불 2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늦은 탓에 대적광전과 약광전 안에 있는 석불은 보지 못하고 내려오게 되었다. 법당 안에서 스님이 예불 올리는 소리가 들려 감히 문을 열어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였다.

 암자가 있는 곳이 높기도 하거니와 기온이 떨어져 매우 추웠다. 차로 내려오는데 연료 경고등이 들어왔다. 길도 군데군데 얼어붙은 눈길이라 신경도 많이 쓰이는데 연료까지 바닥이라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눈길에 몇 번 미끌어지며 가까스로 주유소까지 온 뒤에야 한숨놓게 되었다.



                    별빛 속의 법수사터 삼층석탑


 날은 점점 어두워지려 하고 있지만 돌아가는 길에 법수사터를 가보기로 하였는데, 근처에 가니 벌써 어두워져 몇 번을 왔다갔다 한 후에 겨우 어둠속에 서있는 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 야간사격시 표적을 찾는 것이 도움이 된 듯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둠 속에 탑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인근가옥의 불빛과 별빛 속에서 바라보는 탑의 모습은 뭔가 고고하면서도 낭만적인 느낌을 갖게 하였다. 이 탑도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탑이라 하는데 보물이 아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홍천읍사무소에서 보았던 탑(희망리삼층석탑인데 많이 손상되고 규모도 작은 고려말기의 탑인데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과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인접한 해인사에 너무나 큰 보물들이 있어서 이 탑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너무 어두워져 근처에 있는 당간지주도 찾아보지 못하고 귀가길에 올랐다.


  이번 답사지는 범위가 넓은데다 직지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청암사, 회연서원 등은 가보지도 못했고, 수도암과 법수사터에서도 일부분만 보고 왔기에 아쉬움이 들었다. 다음 기회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