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남해땅의 민문화를 찾아서 (남해 지역 답사기)

道雨 2007. 6. 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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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땅의 민문화를 찾아서


* 답사일자 : 2003년 2월 9일                                 오  봉  렬


  남해지역은 답사의 대상에서 늘 뒤로 밀려있었기에 제대로 답사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부산민학회의 답사의 주제가 ‘남해땅의 민문화를 찾아서’였기에 맞춤으로 잘 되었다 생각하고 집사람과 함께 답사에 따라나섰다.

  일요일 아침, 부산진역 앞에서 7시 출발이기에 아침에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야만 하였다. 설이 지난지 며칠 되지 않았고, 답사지에 거창한 유물도 없어서인지 생각외로 참여인원이 적었다. 그동안의 답사 동행으로 낯이 익은 부산민학회 회원들 몇 분과 발랄해 뵈는 아가씨들 몇팀이 포함된 우리 일행은 모두 19명이었다. 정원의 반도 못되는 인원이라 아쉬움 속에 출발하였지만 답사내용은 알차고 뜻깊었다.


  안개가 자욱한 속을 헤치며 달려간 버스가 맨 처음 멈춘 곳은 충렬사(忠烈祠)였다. 충렬사에 도착하니 이곳 남해의 향토역사관 관장님과 충렬사 담당자, 남해군의 문화유산해설사(자원봉사자로서 여자분인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오셨다) 등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사당 앞의 비각 안에는 충무공의 비석(忠烈祠碑)이 있고, 사당 뒤쪽에는 대원군의 서원·향사 철폐시 위패를 묻었던 가묘(假墓)가 있다.

  경내에 충무공비(忠武公碑)와 함께 충민공비(忠愍公碑)도 세워져 있는데, 이는 충무라는 시호를 받기 전에, 남해 현령이 공을 추모해 비석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충무공으로 시호를 받은 뒤에는 땅에 묻어두었었는데, 성역화 작업시 발견되어 같이 세워놓게 되었다고 한다. 관장님 말씀으로는 다시 묻어두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가묘 옆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심었다는 큰 소나무가 있는데 한쪽으로 약간 기울고 있으며, 일본산이라고 하여 도산서원의 그것과 함께 구설수에 올랐다. 어느 분(풍수를 잘 아시는 분)은 이 나무의 재질이 배를 만들면 좋다고 하며, 다른 면으로 옹호(?)하기도 하였다. 가묘와 사당 건물 사이에 담장을 둘러 놓고 한쪽 편에 작은 쪽문을 내었는데, 이 담장이 없는 것이 풍수적으로 좋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관리인말로는 담장이 높았는데 그나마 낮춘 것이라고 한다.

  비각 안에 있는 충무공 묘비(忠烈祠碑)는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짓고,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송시열은 온갖 곳에 비문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비의 이수 부분에 단청이 되어 있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비각의 현판에는 ‘補天浴日’이라고 씌어져 있었는데(나중에 자료를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현판글씨를 썼다고 되어 있음) 무슨 뜻인지 몰라 물었더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고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라고 한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중국의 신화에서 유래한 글로 관용구처럼 씌여지는 말이었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이순신을 평하여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하고 그의 부음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 補天浴日之功 : 중국의 신화에서 유래함.

  補天은 여와씨가 하늘의 기둥이 무너져 이지러진 곳을 깁고 바로 세운 전설에서 유래하며, 浴日은 희화(羲和)가 태양을 낳아 목욕시켰다는 전설에서 유래됨. 補天과 浴日 모두 국가에 큰 공이 있음을 이르는말.


  충렬사 바로 인근에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암 김구(自庵 金絿) 선생의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다. 자암 김구는 기묘사화 때 남해로 유배되어 13년간 적거생활을 한 바 있는,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안평대군, 양사언, 한호, 김구) 중의 한 사람이며, 유배생활 중 지은 화전별곡(花田別曲)은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풍류를 즐기던 정서와 감회를 노래한 경기체가(景幾體歌)이다. 귀양생활 중에 학문적 업적을 이루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이 역시 그러한 예에 속한다 할 것이다. 화전(花田)은 남해섬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충렬사비와 김구선생적려유허비의 비문을 보면 모두 ‘有明...’으로 시작되고 있어 그 의미를 물으니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영향때문인 것 같다고 하여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충렬사 주차장 앞 바다에는 거북선 1척이 정박해 있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거북선 복원작업시 만든 것인데 꽤 큰 편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살펴보았는데 밖에서 보던 것 보다 더 넓어 보였다. 당시에 쓰던 화포와 노, 각종 신호연 등이 실물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항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거나 체험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지는 노량해전 중 이곳 관음포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관음포 앞바다를 배경으로 조성한 곳으로 이락사(李落祠)와 첨망대(瞻望臺),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능선길로 되어 있다.

  관음포는 그 앞바다인 이락파와 노량을 잇는 해역으로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최후의 해전을 치른 곳이다. 또한 쫓겨 달아나는 왜장 고니시(소서행장)를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공이 숨을 거두고 나서 그 시신은 이곳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서 초빈(草殯 : 바깥에 관을 두고 이엉 등으로 관 위를 덮어 눈·비를 가리게 하는 것)하였다가 노량 충렬사 경내에 잠시 체류한 뒤 다음 해에 아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의 ‘大星隕海’라고 쓰인 편액이 달린 비각 안에 충무공유허비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여전히 예의 그 ‘有明...’으로 시작되고 있다.

  첨망대는 관음포 앞바다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노량해전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지도 그림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누각 위에서 보기에는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앞에 보이는 바다의 전망과 전투상황의 그림을 비교해 보려면 조금 더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락사와 첨망대 사이의 능선길은 양쪽에 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좌우의 전망이 좋아 산책길로도 아주 적당한 길이다. 인공이 가해진 듯 만 듯 잘 조성되어 있어 발과 눈이 모두 편안하였다.


  한편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일대는 몽고 침입시의 팔만대장경 조판지로 추측되는 곳으로 고려시대의 와편과 조각칼을 갈던 숫돌 등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통해 뗏목을 활용하면 관음포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니 경판의 판목조달이 용이하고, 또한 남해의 따뜻한 바닷물에 담가두어야 경판이 뒤틀리지 않는다니 이곳은 경판제작에 적합한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관음포는 일제시대에 간척사업으로 인해 매립되어  매우 작아져 있는 상태인데, 지금도 홍수 때면 섬진강의 쓰레기들이 관음포에 모이게 된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안이란 사람이 사재를 희사하여 대장경의 일부를 맡아 간행하였다고 하며, 일연스님(삼국유사를 저술)을 초빙하여 남해의 어느 절에 주지로 계시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별초의 대몽항쟁시에 이곳 남해도 삼별초의 한 거점이었으며, 진도가 함락되면서 이들도 제주도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남해읍 선소리의 바닷가 암벽에는  ‘장량상 동정마애비’(張良相 東征磨崖碑)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에서 왜적을 격멸하는 노량대승첩을 거두고 순국한 이듬해인 1599년에 명나라의 유격대장 장량상이 자연석 암벽을 깎아 그들의 원정전공을 새겨 놓은 보기 드문 마애비이다. 아마도 왜군이 다 퇴각하고 없어진 가운데 기념삼아 새겨놓은 듯 하다. 마애비가 있는 암벽 바로 밑의 바닷가에는 수많은 하얀 조개껍질이 가득하여(파도에 떠밀려 온 듯하다) 발밑에 닿는 감촉과 함께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점심은 남해읍내에 있는 식당(가천숯불갈비)에서 단체로 갈비탕을 먹었는데, 가천마을의 전경을 큰 사진틀에 넣어 걸어 놓았다. 가천마을은 이곳 남해에서 금산 보리암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며, 관광자원으로 적극 홍보하고 활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 간 곳이 삼동면 미조리의 죽방렴이다. 남해와 창선을 잇는 창선대교 주변에 많은 죽방렴이 설치되어 있었다. 죽방렴이라는 것은 남해(남해와 삼천포)에서만 볼 수 있는 원시적인 고기잡이 도구로, 참나무 기둥(태풍때 쉽게 망가지기 때문에 지금은 기찻길에 쓰이는 철제 레일을 많이 쓴다고 한다)을 세우고 대나무로 발을 쳐서 고기를 잡는다. 창선대교 위에서 내려다 보면 그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자연적인 현상인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며 주로 멸치를 많이 잡는다고 한다. 이 전통적인 죽방렴이야말로 에너지 절약형이고, 환경친화적이며 자연환경을 과학적으로 이용한 조상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멸치는 그물에 걸린 것을 털어내는데 비해, 죽방렴 멸치는 저절로 가두어진 것을 들어내는 형국이라 멸치의 손상이 거의 없어 최고급으로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한다. 해설사에 의하면 죽방렴 하나에 약 1억원 정도의 재산가치가 있다고 하며, 물살이 빠른데서 활동성이 높아 내장배설물이 거의 없어 쓴 맛이 없다고 한다. 죽방렴 멸치는 1상자(2kg)에 보통 15만원정도 한다고 하니 꽤 소득이 높은 편이다. 실제로 죽방렴을 설치하여 운영하시는 분께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하루에 두 번씩(썰물 때) 고기를 거두어 들이는데 하나의 죽방렴에서 보통 1년에 약 3,000kg(1,500 상자) 정도의 멸치 수확이 있다고 한다. 남해 사람들도 죽방렴 멸치의 가격이 워낙 높아 잘 사먹지 못한다고 하는데 맛봬기로 준 것을 먹어보니 일반 멸치보다 훨씬 맛이 좋은 듯 했다. 즉석에서(멸치 창고)에서 소주잔이 기울여지고, 여러 사람들이 1상자씩 사느라고 출발이 늦어질 정도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마늘밭이 참 많았다. 겨울의 들판을 파랗게 하여 생명을 느끼게 하였다. 보통 논에 벼농사를 짓고 나서 가을에 마늘을 심어 봄에 수확을 한다고 하며, 마늘을 수확하고 난 뒤에는 다시 벼를 심는 이모작이 행해지고 있다. 남해군 전체로 봐서 쌀농사로 인한 수입보다 마늘 농사로 인한 수입이 11배 정도로 많다고 하니, 이 고장에서 마늘농사의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작년인가 중국과의 마늘협상파동 때문에 이곳이 심한 타격을 받을 것 같아 걱정이 많다고 한다.


  호구산에 자리잡고 있는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고찰이다. 용문사 올라가는 길 옆의 계곡이 아름다워 주경업 회장님(부산민학회 회장)은 그림 그리기 위해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고 한다. 남해에서 유일하게 계곡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천왕각(보통 천왕문으로 편액이 되어 있는데 이곳은 閣이라 하였다)의 사천왕상은 다른 절과 달리 특이한 점이 있다. 사천왕상은 보통 악귀를 밟고 있는데 이곳의 사천왕상은 탐관오리를 밟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해의 벼슬아치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 하고, 민초들의 저항정신이 반영된 듯 하여 흥미로웠다.

  주불전인 대웅전은 단청이 오래되어 고태가 의연한데,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내부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용문사란 절의 이름에 맞게 용의 형상을 한 조각이 여럿이고, 바닷가 절들의 특징처럼 물고기 · 게 · 거북 등을 그린 그림도 있어 용궁을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대웅전 왼쪽 뒤편에 있는 용화전 안에는 석조보살좌상이 있는데, 임진왜란 후 용문사재건시에 경내 마당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채색이 너무 조잡하게 되어 있어 보는 이의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주경업 회장님 말로는 채색이 되어 있지 않아야 보는 이들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한다고 하였다.

  대웅전 앞 왼편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이었고, 그 쪽 편에 새로 쌓은 석축은 대웅전의 석축과 비교하여 너무 산만하고 정성이 없이 보여 차이를 느끼게 하였다.


  용문사를 나와서 오늘의 마지막 답사처인 가천마을을 향해 가는 도중은 남해바다의 풍광을 바라보며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가는 도중 내내 보이는 삿갓 모양의 섬은 노도(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노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노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함)라고 하는 섬인데 조선시대의 문필가인 서포 김만중이 유배와서 생을 마친 곳이라고 한다.

  김만중은 노도에서의 유배생활 3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문소설인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지었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빠져 인현왕후를 폐위시켜 내친 일을 풍자한 내용이고, ‘구운몽’은 홀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소설로 그의 효성을 짐작케 한다.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의 부음을 들은 김만중은 ‘정경부인 윤씨행장’을 쓴 뒤 56세의 나이로 노도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한편 김만중의 후손들에 의해 노도에 김만중을 기념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였다.

  고려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30명 정도가 남해군에 유배되었기에, 이들 유배객들의 영향으로 이곳은 학구열이 높다고 하며, 지금도 자녀를 대학에 보내지 않는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가천마을은 김해 김씨 세거지인데, 가파른 길 아래 집들이 조개껍질같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계단식 논인 다랭이논이 많아 ‘다랭이마을’로도 불린다. 멀리서 본 가천마을의 정경이 아름다워 사진에 많이 등장하곤 한다. 마을의 이장님이 오셔서 안내해주시면서, 마을신앙에 대해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셨다.

  마을 안 한복판 조그만 공터에 밥무덤(밥구덕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 탑처럼 3단으로 쌓고 남쪽에는 감실을 두었으며, 이 감실 속에 황토흙을 넣고 황토흙 속에 밥을 묻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밥구덕을 마을을 지키는 신으로 모셔서 음력 10월 보름이면 밥을 새로 묻고 제사를 크게 지낸다고 한다. 또 길섶의 담벼락 안에 설치한 밥구덕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이었다. (장량상 마애동정비 인근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황토의 자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 같다.) 황토는 나쁜 기운을 없애는 역할을 한 듯 하다는 회장님의 설명이다. 실제로 한의계에서는 황토는 脾胃의 기를 도와주고 강한 성질을 완화해주는 작용이 있으며, 황토물을 걸러(地醬水) 한약을 달이는데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 안 깊숙한 곳에 넓은 공터가 있고 이곳에 남자의 성기와 여성(임신부)를 상징하는 바위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수미륵, 암미륵이라 부르며 매년 마을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수미륵은 남자의 발기된 성기를 닮았고, 암미륵은 배부른 임신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천재지변을 피하고 고기잡이 바닷길이 편안해지고 풍어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아마 지금은 자식(또는 아들)을 점지해 달라는 소망이 더 많을 듯 하다. 수바위가 조금씩 훼손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주회장님은 외부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해야 한다고 이장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가천마을은 최근 생태보호마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아마 가마우지와 참게가 서식하고 있고, 다랭이논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공기가 맑은 때문에 지정된 듯 하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훼손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바, 지정된 그대로 마을 신앙과 주변 생태가 잘 보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암수미륵이 잘 보이는 집에서 할머니께서 주신 막걸리와 무짠지 안주로 담소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고 귀가길에 올랐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 몸이 불편한 데도 불구하고 부산민학회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수고해주신 남해 향토역사관 정의연 관장님과 남해군 박영덕 문화해설사, 그리고 충렬사를 관리하시며 설명해 주신 분, 거북선 관리하시며 설명해 주신 분, 죽방렴을 운영하시며 해설해 주신 분, 가천마을의 이장님 등 여러 분들이 우리 답사를 풍성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이러한 모든 것들을 기획, 섭외하고 적은 참여인원으로 인한 적자를 무릅쓰고 답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님과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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