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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사자석탑이 언제부터 이렇게 흔해졌던가?

道雨 2007. 7. 1. 15:50

 사사자석탑이 언제부터 이렇게 흔해졌던가?

 

 

예전에는 귀하고 드문 것이라 여겼던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언제부턴가 흔해졌다. 쌍사자석등도 어딜가나 자주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라고 하면 흔히 약간씩 다른 모양(입모양)을 한 사자 네 마리가 탑의 기단부를 이뤄 탑신석을 떼메고 있는 있는 형태를 이루는데, 석탑의 구조에 사자가 나타나는 것은 사자후(獅子吼)라는 말에서 보듯이 사자가 곧잘 부처의 화신으로 간주되고 있는 탓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사자는 불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상징물인데, 그러한 만큼 어느 절간에 가나 보편적인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석탑의 경우에는 그것을 표현양식으로 담아내기에는 조각기법상 그리 단촐한 문제가 아니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용례는 그다지 흔치 않다.

 

국보나 보물, 그리고 지방 유형문화재까지 모두 합쳐야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요즈음 몇몇 사찰을 구경다니다 보면, 의외로 몇군데서 이러한 사사자석탑 모양의 석탑이 자주 눈에 띈다.

 

이것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도대체 미술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는 나름의 기대를 갖고 그러한 석탑이 남아 있다는 곳까지 찾아가보기까지 했으나, 알고 보니까 시시껄렁한 석탑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이제 어디에 무슨 사사자석탑이 있더라는 얘길 듣더라도 솔직히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정말로 웬만한 정도의 조성시기와 내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따로 있다면 모르되, 이러한 것들은 암만 봐도 복제품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이러한 모조석탑이 대량으로 조성된 것은 과연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것들이 어느 시기에, 가령 일제강점기인지 해방 이후인지 가늠하기도 어렵고,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낸 주체가 일본인들(가령, 골동상이나 석물공장 운영자)이었는지 아니면 우리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복제품 석조물을 만들어냈다는 기록이 눈에 띄는 걸로 봐서 복제물의 유통은 아마도 그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싸구려 모조 석탑은 대개 고색처리(古色處理)라 하여 짐짓 오래되고 값나가는 물건인양 행세하도록 제조되어 진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다. 아닌 말로 지금에야 척 보면 안다해도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그것이 악의적인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란 사실을 누가 다 가려낼 것인가 말이다. 훨씬 더 세월에 흐른 뒤에는 혹여 이 모조석탑이 수백년, 수천년 전의 귀한 석탑으로 오해되는 일이 벌어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되면 이러한 석탑의 진위를 가려낼 20세기 모조석탑 전문 감별사를 따로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말이 난 김에, 여기에 사사자석탑의 목록과 관련기록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 경기도 이천의 원경사라는 절에 있는 '사사자 칠층석탑'의 모습이다. 어떤 자료에는 1980년대말 전라도지방에서 옮겨왔다는 이 석탑을 일컬어 '삼국시대의 것'이라고 과감하게 추정한 의견이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그건 매우 과장된 추정이다. 아마도 전국을 뒤져보면 이것과 똑같이 생긴 사사자석탑이 여러 트럭은 나올 것이다. 이 석탑 앞에 놓여 있는 쌍사자석등 역시 사사자석탑의 정체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완전히 종류가 다른 두 석조물의 상륜부는 묘하게도 똑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과연 무얼 말하는 것인가? 

 


 

▲ 여기에 보이는 석조물들은 일본 나고야에 거주하는 이화자 여사가 지난 2001년 11월에 기증반환한 것(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장명등, 석탑 등)의 일부으로 지금은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나마 국내로 돌려진 것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들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제작된 복제품들이라서 그다지 보존가치를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른쪽에 보이는 쌍사자석등은 어지간한 국도변의 석물공장마다, 그리고 웬만한 신흥사찰마다 빠지지 않고 배치되어 있는 기본품목의 하나이기도 하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앞에도 '사사자석탑'의 모습이 보인다. 이것도 보아하니 그다지 보존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복제품 석탑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왜 하필 이러한 유치스런 물건을 대학박물관 앞에다 버젓이 세워놓은 것인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말고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청호리 LG전자 구내에 '사사자 칠층석탑'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바 있고, 몇해 전에 문화재행정모니터의 보고를 통해서도 이 석탑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이 석탑의 사진자료를 살펴보니까 위에서 소개한 '이천 원경사 사사자 석탑'과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 이후에 제작된 싸구려 모조석탑일 가능성이 99.99%라고 본다.

 

(이 석탑에 대해서는 향후 현지 답사를 할 기회가 있으면, 사진자료를 확보한 뒤에 이곳에 다시 소개할 작정이다. 기존의 사진자료는 저작권 문제로 함부로 인용할 수 없기에 도리없이 지금은 공란으로 비워둔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사사자석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35호, 전남 구례)

2. 화엄사원통전전사자탑 (보물 제300호, 전남 구례)

3. 사자빈신사지석탑 (보물 제94호, 충북 제천)

4. 홍천괘석리사사자석탑 (보물 제540호, 강원 홍천)

5.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제8호, 경남 함안)

6. (금강산)금장암지사사자삼층석탑 (북한 국보급문화재 제45호, 강원 회양)

7. 선암사 화산대사사리탑 (전남 순천)

[참고] 백양사 석가사리탑

 

이밖에 석탑의 기단상층에 석사자상이 배치된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불국사 다보탑 (국보 제20호, 경북 경주)

2. 중흥산성삼층석탑 (보물 제112호, 전남 광양)

3. 의성관덕동삼층석탑 (보물 제188호, 의성관덕동석사자 (보물 제202호), 경북 의성)

 

분황사탑과 구례논곡리삼층석탑도 사자상이 배치된 석탑이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사자석탑의 유형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여기서는 제외한다.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왼쪽)과 화엄사원통전앞사자석탑(오른쪽)의 모습이다. 이 석탑들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진 것이라서 새삼 설명을 달 필요은 없을 듯하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30년말경에 일본 이왕가저택에 배치하려는 목적으로 이 석사자의 모형을 동일크기로 모조하여 배치한 사실이 있음을 따로 적어둔다. 이때 만들어진 모조석사자에 대해서는 예전 <고고미술> 시절에 황수영 선생이 정리한 몇 가지 자료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이 글의 말미에 따로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왼쪽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의 모습으로 1912년에 세키노 타다시가 고적조사를 할 당시에 촬영한 모습이고, 오른쪽은 <국보도록>에 수록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의 모습으로 탑신석 이상은 도굴을 당한 탓인지 옥개석 등 부재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곳의 석사자는 화엄사의 석사자와 더불어 입모양의 크기변화를 뚜렷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석탑은 명문이 남아 있어 원래 9층석탑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조성시기(태평 2년, 고려 현종 13년, 즉 서기 1022년)와 조성경위가 확실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 강원 홍천의 홍천읍사무소 안에 배치되어 있는 홍천괘석리사사자석탑(보물 제540호)의 모습이다. 바로 옆에는 홍천희망리삼층석탑(보물 제79호)이 자리하고 있다. 두 석탑 모두 이곳이 원위치는 아니다.

 


▲ 이 석탑을 이루는 석사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거의 사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흡사 개와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을 뿐더러 각각의 사자마다 뚜렷한 차이는 없이 한결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사자석탑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이건 도리없이 '사자'이다. 이 석탑의 원위치는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라고 하는데, 1969년 12월 30일에 보존상의 문제로 이 자리에 옮겨둔 것이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석탑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탓인지 그 시절의 관련기록이나 사진자료가 따로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지금껏 한번도 없다.

 


▲ 왼쪽은 <대정육년 고적조사보고>에 수록된 주리사지사사자석탑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경남 함안의 함성중학교 구내에 남아 있던 시절에 촬영한 석탑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석탑은 현재 이 자리에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999년 7월 18에 문화재도굴꾼에 의해 석사자 두 구가 도난을 당하자 추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잔여 석사자를 인근 함안면사무소 안에 별도 보관하였고, 몇달 후 도굴범이 검거되어 석사자가 회수되긴 하였으나 도난재발을 우려하여 함안면사무소 창고에 계속 격납보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이곳을 답사하는 길에 함안면사무소에 들어 해당 석사자를 구경할 수 있는지를 문의하여 보았으나, 직접 볼 기회는 끝내 얻지 못하였다. 

 

 


▲ 1999년 여름에 발생한 석사자 도난사건 이후 함안주리사지석탑의 모습은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 잔여 석사자 2구, 회수 석사자 2구를 합쳐 석사자 4구는 모두 가까운 함안면사무소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다. 지금은 어떠한 방식으로 보관하고 있는지 최근의 소식은 잘 알지 못한다.

 


▲ 부도치고는 매우 특이한 형태로 간주되고 있는 순천 선암사의 '화산대사 사리탑'이다. 석사자는 인근 화엄사의 것을 본따 만든 흔적이 역력하며, 사리탑에는 '華山大師舍利塔'과 '京石工 黃大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리탑을 떠받드는 석사자 두 구는 도난을 당하여 현재 그 자리는 다른 석물로 대체해놓은 상태라고 전한다.

 

 


▲ '화산대사사리탑'의 정체와 조성시기에 대해 관련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후기의 것으로 막연히 짐작하는 의견도 없지 않으나, 그건 잘못된 고증이다. 화산대사 사리의 수습과 사리탑 조성경위에 대해서는 <조선불교총보> 제6호 (1917년 9월 20일)에 관련내용이 남아 있으므로, 이는 명백히 일제강점기의 작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사리탑의 조각장 '경석공 황대인'이라는 인물은 동일한 장소에 놓여 있으며, 1928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 '벽파당대선사비'를 만든 데에도 이름이 등장한다 하였으니, 화산대사사리탑이 그 언저리에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화산대사사리탑에 관한 것은 별도의 글로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 좋은 듯하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 정도로 소개하는 것에 그친다.

 


▲ 금강산 금장암지에 남아 있는 사사자석탑과 그 앞에 놓여 있는 공양상의 모습으로 왼쪽은 <조선고적행각>에 수록된 것이고, 오른쪽은 <조선의 석탑>에 수록된 것이다. 사사자석탑 앞에 이러한 모양의 공양상이 놓여 있는 건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의 사례와 더불어 이 둘이 전부다. 이 석탑의 존재는 <조선과 건축> 1926년 6월호에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가 소개한 것("내금강 장안사 경역 폐금장암 유허에 있어서 석조건조물에 대한 소감")도 있거니와 <매일신보> 1928년 10월 12일자에는 이곳이 '무학대사의 종언지(終焉地)'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또 <중앙일보> 1932년 12월 13일자에는 이 석탑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도 있으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당시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구는 총독부박물관으로 수습된 탓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은 흔히 "금가안 이성계 발원 은제 도금 사리구"라는 명칭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원출토지는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월출봉이라고 적고 있다. 어쨌든 특이한 모양과 내력을 지닌 석탑으로 주목할 만한 것인데, 현재는 북한에서도 주요 국보로 지정관리되고 있다고 전한다.

 

(*) 추가 : 추후에 검토해보니, 금장암지 출토 사리구와 월출봉 출토 이성계발원 사리구가 동일한 것이 아니고 별개의 것인듯 하다. 이에 관해서는 관련자료를 재검토해보고나서, 이 부분을 바로 잡을 작정이므로 이에 대한 오해 및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 (2006.1.22) 

 


▲ 이것은 사사자석탑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모양이 사사자석탑의 그것에서 취한 것이 확실하고, 조성시기 역시 일제강점기의 것이라서 여기에서 개략적인 모습만 소개해두려고 한다. 왼쪽은 <조선불교> 1926년 12월호에 수록된 백양사 석탑의 모습이며, 오른쪽은 흔히 '백양사 석가사리탑'으로 알려진 요즘의 모습이다.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정리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한다.

 

 

▲ <조선학보>에 소개된 중흥산성삼층석탑과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의 원래 모습이다. 그다지 온전한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완전히 파괴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1930년 이전에 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석탑의 기단상층부에 놓여 있어야 할 석사자의 모습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것인지 여기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 여기에 보이는 것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중흥산성삼층석탑과 석사자의 모습이다. 이는 중흥산성쌍사자석등 밀매사건이 표출되어 이를 위해 현지조사차 내려갔던 총독부박물관의 기수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가 찍은 것으로 촬영일자는 1931년 3월 21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사건 직후 쌍사자석등은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삼층석탑은 현지에 복구되었으나 여기에 보이는 석사자의 잔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 <건축잡지> 1934년 2월호에 소개된 의성관덕동삼층석탑과 석사자들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동경제국대 건축과 교수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촬영한 것으로 그는 이 석탑에 대한 실측자료와 여러 장의 사진자료를 남겼다. 관덕동석탑의 석사자는 나중에 석탑과는 별도로 보물로 지정된 바 있었으나 도난사건과 관련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잔여 석사자 2구만 전해져 국립대구박물관에 이관 전시되고 있다.   

 



▲ 왼쪽은 <국보도록>에 수록된 의성관덕동삼층석탑과 석사자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이후의 석사자 모습이다. 왼쪽의 사진은 후지시마가 촬영한 그것과 큰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석사자의 모습들은 비교적 또렷한 편이어서 지금은 사라진 관덕동 석사자의 모습을 이것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조금은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정리 : 2005.11.28, 이순우>

 

 

[추가자료]

 

아래의 내용은 작년에 이미 소개했던 내용이나 사사자석탑과 직접 관련된 것이라서 참고 삼아 이곳에 다시 덧붙여 둔다.

 

 

▲  <매일신보> 1930년 9월 12일자 (왼쪽)               ▲  <고고미술> 1961년 2월호 (오른쪽)

 

서너 해 전에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의 흔적을 따라 이런 저런 자료를 뒤적일 때에, 그래도 자주 펼쳐보던 자료의 하나로 <고고미술>이란 동호회지가 있었다. 이 잡지가 처음 나온 것이 1960년 8월이니까 거의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혁을 지녔다.

 

그렇게 해묵은 잡지니만큼 이를 통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의 편린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더구나 이 잡지에 수록된 글 가운데는 지금은 문화재 계통의 대가가 된 사람들이 청년미술사학자였을 적에 직접 조사하고 정리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들의 고초랄까 열정이랄까 그런 것들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한다.

 

듣기에 초기에는 활자인쇄를 할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 일일이 철필로 긁어 등사를 했다는데, 본문에 첨부된 사진자료도 해당면에다 일일이 풀로 붙여 발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필자도 국회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소장된 몇 권의 <고고미술> 등사본을 본 적이 있는데, 그 후 1979년에 이 잡지의 100호 합본호가 발간된 적이 있어 지금은 그 책을 구해서 줄곧 활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거나 이 잡지에 수록된 글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띄는대로, 그것을 자주 메모해두고 글을 쓰는데에 즐겨 활용하는 편인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황수영 선생이 예전에 일본 도쿄에서 발견했다는 어떤 '석사자'에 관한 짤막한 보고서가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는 정도의 느낌만 있었는데, 그 후 1년 반 정도 지난 뒤에 이 내용을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는 새로운 글이 수록된 것을 보고는, 그 때문인지 이 '석사자'의 존재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더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미술사학자가 스스로의 오류를 흔쾌히 인정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풍조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서둘러 오류를 바로 잡은 황수영 선생의 '태도'가 좀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그의 연구결과나 행적에 대해 다 동의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매일신보>를 뒤적이던 중에 황수영 선생이 감정 오판했던 그 문제의 '화엄사 석사자'에 관한 기사 하나를 우연찮게 발견했다.

 

이왕가 어신저현관에 지리산 사자탑 모형을 비치

<매일신보> 1930년 9월 12일자

 

"동경 국정 이왕가 어신저 현관 전에 전남 지리산 화엄사 사자탑의 석조각을 모형하여 고6척의 사자탑을 석조 우는 청동주물로 제작하여 비치코자 기 준비로 이왕직 말송서무과장은 12일 아침 지리산으로 출발하였다. (사진은 지리산 사자탑)"

 

이것으로 보면 <고고미술>의 보고내용에 나오는 석사자 모조품은 1930년 말에 제작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황수영 선생이 아사카와 노리타카에게서 채록한 증언에 따르면, 원래는 이 화엄사사사자석탑을 원형 그대로 반출하자는 얘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결국 모조품 제작으로 결정되었기 망정이지 까딱했더라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하나가 또 일본땅으로 건너갈 뻔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면 여기에 나오는 '화엄사 사사자석탑'의 석사자뿐만이 아니라 일제시대를 통틀어 우리 문화재를 복제하여 일본으로 옮겨놓은 사례들이 너무도 많이 발견된다. 가령 불국사 다보탑을 본떠 '한일합방기념탑'을 만든 것도 그러하고, 법주사쌍사자석등을 본떤 것인지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을 본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슬픈' 쌍사자석등의 복제품도 일본내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파악된다.

 

몇해전에 이화자라는 재일동포 한분이 일본내에 흩어진 우리 석조문화재를 수집하여 우리나라로 기증반환하여 그것을 충남 부여에 있는 전통문화학교엔가에 옮겨놓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나온 보도자료에도 복제품 쌍사자석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한 싸구려 복제품을 갖고 딱히 우리의 것이다 아니다 라고 단정하기가 참 난감한 문제이고, 또 그러한 것까지 끌어 안아야 하는지는 좀 판단이 애매한 부분이긴 한데, 제 아무리 복제품이라할지라도 우리 문화재의 분신이니만큼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쳐 양산된 우리 문화재의 복제품은 때때로 '진정한' 우리 문화재를 바라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데에 또다른 폐해가 있는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좀 더 세월이 흐른다면 이러한 싸구려 복제품이 마치 우리의 해묵은 문화유산인양 잘못 우대를 받을 가능성도 크게 염려되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식민통치기를 통틀어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일본 내로 무단반출된 사례들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짜' 문화재들이 '진짜' 문화재를 밀어내는 상황까지도 잘 가려내어 판단하는 안목도 함께 갖추어야 하는 '괜한' 추가부담을 안게 된 셈이다.

 

 

 

[첨부자료]

 

재일석사좌상(在日石獅坐像)과 그 방형대좌(方形臺座)

<고고미술> 제2권 제2호 통권7호 (1961년 2월)

 

한일회담에서 문화재반환이 논의되고 있던 1959년 9월에 일본 전 중의원의장이던 호시지마 니로(星島二郞)씨에 의하여 개인소장의 석조물 3점이 자진 반환되어 우리 대표부 정원에 운반된 것은 그 당시 이미 보도된 바이거니와 그 중 2점은 능묘에 배치되었던 이조의 망주석과 향로대인 바 이곳에 소개하려는 석사와 그 대좌는 모두 신라의 우작으로서 그 연대도 서기 8백 년경으로 추정되는 희품이다. 이것이 일본에 반출된 것은 금세기초인 합방 전후인 듯한데 (일설에는 이등박문의 반출품이라 함) 이왕은 전하의 동경저택에 보존되어 오다가 전후에 동저택이 매도될 때 호시지마씨가 양수하였던 것이라 한다.

 

원소재지점은 불명인데 원래 쌍구 또는 사구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석사는 전후 4지를 모아서 좌형을 하였는데 하부가 좁아져서 안정감이 부족하다. 두부는 정명하여 눈, 코, 특히 입은 개구하여 매우 큰데 자세나 조법에서 구례 화엄사 사사삼층석탑의 유례와 곧 비교될 것이며 연대 또한 전후할 것이다. 풍만한 두렵이 조각되었고 영락경식이 느리워진 것과 같은 수법인데 체구의 조법이 섬약하고 전지는 원주와 같이 경직하여 연대는 약간 강하되는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고 121cm의 거품으로서 보존도 양호하여 특히 그 대좌가 구존함은 다행이다. 방형을 이루는 대좌는 하부에 일단의 받침을 만들어 하대석을 우의하였고 정상에도 방형일단을 각출하였는데 우각은 '모'를 없애는 유연한 솜씨를 보인다. 사방 면석에는 정상에 안상을 새겨 하부 양우에 이르게 하였고 그 내면에는 천인상 1구씩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 2구는 낙천이며 타 2구는 공양상으로 모두 단판연좌상에 각양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천의는 주위에서 번공하여 유려한 솜씨를 보인다.

 

주악상 중 1구는 횡적을, 타 1구는 비파를, 공양상의 1구는 원반을, 타 1구는 배형기를 가지고 있는데 보관이나 비천의 온화한 안용이나 사실적인 자세 또는 신부의 장엄이 아윤하다. 이 대좌가 석사와 동시작으로 추정됨은 그 신대방식에 있어서 뿐 아니라 양식과 조법에서도 짐작되는 바인데 이같은 양식은 상거한 화엄사 사자탑 하층기단의 천인상에서도 볼 수 있는 바 이다.

 

총고 204cm로서 대좌의 고 83cm 폭 77cm 배치의 방식은 밝힐 수가 없으나 사원내의 당탑 도는 문루 같은 곳에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 망주석은 고 170cm로서 보주형 두식은 당초문이며 향로대는 방형일석으로 사족을 각하였는데 고 55cm이다.

 

 

정정 : 재일석사좌상(在日石獅坐像)과 그 방형대좌(方形臺座)

<고고미술> 제3권 제12호 통권29호 (1962년 12월)

 

본지 2권 2호(1961.2)에 실은 표제의 졸고에서 석사 1구와 그 대좌를 '신라의 우작으로서 그 연대도 서기 8백 년경으로 추정되는 희품이다'라고 한 것은 필자의 오인이었기에 정정하면서 동인제위에게 사과하는 바이다.

 

이들은 1959년 9월에 일인 호시지마 니로(星島二郞)씨가 자진 기증하여 현재 주일대표부 정원에 이치되어 있는 것인데 동씨는 2차대전후 동경의 이왕가저택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라 한다. 이치된 이후 필자는 동경에서 2차 호시지마씨를 만나 직접 문의하였을 때, 동시는 한일합방 전후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며 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고 하였다. 1959년 추(秋) 필자가 처음으로 이 석물을 대하였을 대 그 조형이 화엄사석탑사자와 너무나 흡사함에 놀랬는데그 대좌의 형태와 수법 (사각의 모를 없앤 것과 상면에 일단받침을 한 것)은 매우 특이하여 그 유례를 찾지못하고 고심한 바 있었다. 이 점은 최후까지 석연하지 못하였으나 석사만은 신라작으로서 더 의심하지를 못하였으므로 대석 또는 석사와 동시작으로 추정하였고 그 당시 외무부에 보고한 바도 있었다.

 

1961년 9월에 화엄사를 찾아서 사자탑을 세밀히 조사할 때에 석사의 크기와 대석 사면의 천인상이 전혀 동일함이 새삼스러히 주목되어 그 대좌의 실측을 동행한 정명호 군에게 부탁한 바도 있었다. 동년 추 재차 도일케 되었는데 12월 3일에는 이홍직선생과 같이 지바현으로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씨를 재차 방문하여 일정초의 우리 고미술사정을 문의한 바 있었다. 이때 그는 옛 기억을 더듬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던 차에 구례 화엄사에 3개월이나 있었다는 말이 우연히 나왔기에 필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리하여 석사의 제작이 목적이었다고 하므로 그 내용을 추궁하게 되었다. 동시는 조각이 본업이어서 그의 작품이 1919, 20년 경 제전(帝展)에 입선된 일까지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 의외의 사실에 누구보다 놀란 필자가 이때 동씨로부터 들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연대는 '소화경(昭和頃)'이라 하면서 당시 이왕가박물관장 스에마츠(末松)씨의 부탁을 받아서 석사제작차 화엄사에 1개월, 목포에 2개월 체류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진품을 반출하자는 말도 있었으나 모조키로 하였다. 먼저 절에 있으면서 한지를 사용하여 본을 떴는데 송곳 끝에 연필을 달아서 하나하나 점을 찍어가며서 원품과 일분의 차이가 없도록 준비하였는데 이 방식을 '星取り(호시토리)'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 후 목포석이라고 그가 부르는 연질석재를 목포형무소에서 마련하여 주었기에 그것으로 석사와 대좌를 동시에 제작하였고 그곳에서 일본으로 직송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석재가 전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유사하고 또는 광주 등지에서 산출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처음에 추정한 것만은 아마도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졸문에서 화엄사탑보다 '연대는 약간 강하하는 작품'이라고 한 것은 금세기의 모조품임은 깨닫지 못하였다. 스에마츠씨는 발송 2일전에 목포에 와서 2일간 동숙하였는데 자기와 스에마츠씨만이 이 작품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였으며 비용은 2천 원이 들었고 그 후 이왕전하로부터 좋은 것을 만들어주어서 고맙다는 치하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석사가 졸고의 여러 곳에서 인용 비교한 바 있는 화엄사사자탑의 각부 원촌 그대로의 복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필자의 오판은 말할 것도 없이 반출경위에 대한 소장자 발언의 과신과 특히 미심한 대좌양식의 해명을 소홀히 하고서의 속단과 용의부족에서 자초한 것이다.

 

고대의 유리된 작품판정에 있어서 비록 경미한 세부수법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의문점이 남아 있을 때에는 그 작품에 대한 최종판정은 반드시 보류하여야 마땅하다는 것을 이때보다 통감한 일은 다시 없었다. 더우기 그 조형으로서 화엄사사자탑을 전제하면서도 그와의 세밀한 비교를 거치지 못하고 판정하고 말았다는 것은 신중을 잃엇다고 지적받아야 할 것이다. 이곳에 졸고를 정정함에 있어서 이 잘못이 필자에 커다란 회한과 교훈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동인의 관용을 거듭 부탁하는 바이다. 당국에 대한 보고의 책임 또한 필자가 혼자 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화엄사석탑과의 비교, 8순이 넘은 제작자와의 면회확인, 당국에 대한 해명이 끝났으므로 늦게나마 이곳에 정정의 글을 기록하는 바이다.

 

끝으로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호시지마 니로씨의 후의와 충심이 왜곡되지 않기를 부탁하여 두고자 하는 바이다. (12.9)

 

 

*************************************<정리 : 이순우>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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