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김해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논어 목간`

道雨 2007. 7. 1. 15:33

김해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논어 목간'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논어>의 목간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부산대박물관(관장 박영철)은 6일 “경남 김해시 봉황동 저습지에서 7세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논어> 목간 1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목간은 종이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 나뭇조각에 글을 적어 책이나 문서로 사용하던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목간은 길이 20.9㎝의 나무를 폭 1.5~1.9㎝ 크기의 4각 기둥 형태로 깎은 뒤 먹으로 <논어> 제5편 <공야장>의 구절을 나무의 각 면에 촘촘히 적은 것이다. 목간에는 모두 57자의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한면은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어 나머지 3면의 42자만 해독됐다.

 

적외선 촬영을 통해 목간의 글자를 해독한 국립중앙박물관 보존실은 “일본서기, 임신서기석 등을 통해 삼국시대 초기에 <논어> 등 유교경전이 한반도에 전래됐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으나, 지금까지 삼국시대에 제작된 어떤 형태의 유교경전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발견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쪽은 “김해 일대의 금관가야가 멸망한 직후 신라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논어>와 달리 약자를 사용하거나 누락된 글자가 있어 정확히 어느 시대의 <논어>를 교본삼아 만들었는지는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이 목간은 <공야장> 내용을 2~3문장씩 걸러가며 각 면에 적고 있어 처음에는 목간 여러 개를 엮어 책 형태로 만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목간은 인명, 지명, 숫자 등 행정과 경제에 관련된 내용만 적고 있을 뿐 유교경전은 없었다.

박영철 부산대 박물관장은 “삼국시대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논어> 목간이 발견됨으로써 이미 당시에 한반도 전체에 유교가 고루 퍼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 <한겨레 2001.7.6>

 

 

 

 백제 논어 목간 발견-인천 계양산성

 

 

 인천시 계양구 소재 삼국시대 고대성곽인  계양산성(桂陽山城)에서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목간(木簡) 중 시대가 가장 오래된 서기 3-4세기 한성도읍기(BC 18-AD 475) 백제 목간이 발굴됐다고 선문대 고고연구소(소장 이형구)가 27일 발표했다.

    이 목간은 특이하게도 나무를 다섯 면을 깎고는 각 면에다 묵 글씨를 쓴 소위 '오각목간'(五角木簡)으로, 거기에 적힌 글은 유교의 대표 경전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로 밝혀졌다.

    이로써 한성시대 백제인들이 서기 300년 무렵에는 이미 도읍지  혹은  중심지로 거론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논어를  학습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선문대 고고연구소는 이날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조사단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인천 계양구청이 추진하는 사적 공원  조성  계획 일환으로 계양산성 중에서도 동문지(옛 주민체육시설)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성백제 시대에 조성됐음이 분명한 집수정(集水井. 우물)을 찾아내는 한편 그 아래층에서 문제의 목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조사단은 이 목간이 우물 바닥면에서 대형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를 비롯한 전형적인 한성시대 백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점으로 미뤄 같은 시대에 작성된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목간은 위쪽과 아래쪽 일부가 각각 잘려 나갔으며 현존 유물 기준으로  길이는 최대 13.8㎝ 가량 측정되고 있다. 5각 모든 면에는 묵글씨가 확인되고 있으나  4면은 글자 일부만이 극히 희미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4면 목간은 신라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5각 목간은 이번이 국내 처음이라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2면의 경우 '君子者 斯焉取斯'라는 묵글씨가 드러났다.

    이형구 교수는 이 문구가 '논어' 제5편 공야장(公冶長)에 보이는 '子謂 子賤 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공자가 자천(子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같은 사람은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했겠는가?"라고 했다)의 일부라고 말했다.

    또 3면에서 확인된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라는 묵글씨는 같은  논어  공야장의 제8장 "孟武伯問...,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맹무백이 공자에게..."구(求)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구는 천호(千號)의 큰 읍이나 백승의 경대부 집에서 읍장(邑長)이나  가신(家臣)  노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가 인자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라고 했다)의 일부로 밝혀졌다.

    계양산성 출토품과 성격이 비슷한 논어 목간은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으나, 김해의 경우 불안정한 층위에서 출토되는 바람에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기 힘든 실정이다.

    또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主夫吐'(주부토)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삼국사기에서 이 일대를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기록과 상통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 확인된 우물에서는 이와 함께 많은 기와류, 목재류, 패각류 등이 출토됐다. 이 중 길이 24㎝나 되는 대형 거북이가 포함돼 있다.

    이번 조사결과 계양산성은 이미 한성백제 시대에 처음 축조됐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한편 이 목간이 제작된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이형구 교수는 "오늘은 조사성과에 대한 보고이며, 향후  유적의 성격이라든가 목간의 연대 등에 대한 세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 동석한 목재조직학자 박원규 충북대 교수는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이라든가, 나이테 연대 측정 등을 통한 정확한 분석이 실시되면 좀 더  확실한 연대 추정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연합뉴스. 2005. 6. 28>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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