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도 시험공부를... 그런데 과목이...
제 2편 : 한의대생활(시험과 유급)과 국가고시
앞에 1편에서 얘기한 이러저러한 사연 끝에 동의대학교 한의예과에 입학을 하였다. 내가 3기인데, 선배인 1기와 2기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계셨고, 우리 3기에서는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학년 초의 이야기는 ‘道雨의 辯’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주로 시험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에 대하여 얘기하는 중이므로 다른 얘기들은 접어두겠다.
한의대(의대)는 유급제가 있어서 시험 때만 되면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도 우리 때는 학과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창기인지라, 유급이 많지 않았다. 또한 시험을 잘 못 보게 되면 재시, 삼시, 심지어 사시, 오시까지도 주어졌다. 유급 자체보다 실력을 갖추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교수님들도 학생들과 친분이 많아 재시, 삼시를 치루는 귀찮음을 감내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은 재시도 없이 유급을 시키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우리기에 예비역이라고는 3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3수, 재수(제일 많았다), 현역(재수하지 않고 바로 들어온 학생을 지칭함)이 약간...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적은 홍**씨는 1학년을 마치고는, 결혼을 위해 휴학했다(다음 해에 우리 밑의 기로 복학할 때는, 휴학 중에 결혼을 하여 가장이 되어 있었다).
나보다 5살이 적은 진**씨는, 처음에는 나와 같은 동아리(침맥)에서 공부를 했는데, 중간에 동아리를 그만두었다. 한의대에서는 동아리별로 그룹을 지어 공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자연히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 진**씨도 동아리 활동을 그만 둔 뒤로는 거의 혼자서 보내게 되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다른 학생들과는 나이차가 많으니 잘 어울리지를 못하였다. 내가 함께 어울려주어야 하는데 나도 내 앞가림하기에 바빠 챙겨주지를 못했다. 그는 예과 2학년 해부학 실습 중에 정신적인 문제로 휴학을 하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학교공부와 시험에 대한 압박감 때문인지 정신병적 소견이 나타나 휴학을 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아 결국 제적처리 되었다(나중에 휴학 기간 중 다른 사람과 함께 집에 찾아가 보기도 했는데 아쉽기가 그지없다). 그리하여 우리기에서 예비역은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예과 2학년 때 웃기(2기)에서 두 명이 유급되어 내려왔는데, 화교로서 정원 외로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이 두 명은 우리기에 내려와서도 유급(2년 연속 유급은 제적됨)되어, 결국은 제적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기에 우**라는 학생은 ‘증산도’에 심취되어 수업을 많이 빼먹는 바람에 유급하고 말았다. 교수님께 면담하여 재시, 삼시의 기회를 부여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수업을 너무 많이 빠져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본과에 진입했다. 본과에 올라갔다고, 동아리에서는 본과진입식까지 챙겨준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한의대의 방학은 동아리별 학습의 기회이다. 학교수업에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분야를 동아리의 특성에 맞게 보완하는 기간인 것이다. 내가 속한 침맥2기 멤버들은 이번 여름에 모두 함께 진천으로 ‘사암침법 40일 강좌’를 들으러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기말고사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었다. 재시를 보고, 삼시, 사시까지 보았는데도 통과하지 못하였다. 사암침법 강좌를 들으러 가야하는데, 출발일자가 가까워 오는데도 통과를 하지 못해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담당 교수님을 찾았다. 사정을 설명드리고 선처를 부탁했다. 오시를 봐야 할 사람이 우리 동아리 멤버인 김**을 제외하고 또 한명(최**)이 더 있었다. 교수님은 일단 시험을 한 번 더 보게 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오시까지 치루었다.
시험을 치루고 난 후 나는 다시 걱정이 되어 교수님을 면담하였다. 다행히 우리 동아리 멤버인 김**는 통과시킬 점수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는 도저히 통과시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성적의 학생을 통과시키면 다른 사람들을 유급시킬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다시 한 번 고려해 주기를 부탁했지만, 교수님의 다른 의견을 내셨다. 도저히 그냥은 올려줄 수가 없으니, 정 원한다면 휴학을 하고 군대에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조건이면 학점을 주겠다고 했다. 결국 그리해서 김**는 위기를 넘겼고, 최**는 휴학을 하는 조건으로 겨우 학점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침맥 2기(6명이었음)는 모두 충청도 진천으로 ‘사암침법 40일강좌’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사암침법 40일 강좌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의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기로 하겠다. 어쨌든 내가 본과 1학년여름방학 때 받은 ‘사암침법 40일강좌(의료봉사 포함)’는 내 인생에 많은 변화와 계기를 부여해준 의미가 깊은 나날이되었다.
본과 1학년 2학기 개강을 하니 웃기에서 휴학을 했던 이**씨가 복학을 해서 우리와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이**씨는 나와 동갑이고 출생월도 같은 8월이다. 내가 한의대 입학하기 전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을 경주에서 선배들이 해주었는데, 그 곳에서 처음 만났다. 참 열심히 공부하고 한의학에 애정이 각별한 동료이다. 나와 같은 검정고시 출신이라고도 했다.
나 외에 예비역이 아무도 없었는데, 이**씨가 같은 학년이 되다 보니 더 없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 외에도 동갑이 되는 사람이 한 명 더 웃기에서 내려왔는데(박**), 이 분과는 그리 친하게 지내질 못하고, 그저 같은 학년의 동년배로서 지냈다.
본과 2학년부터는 유급자는 없었고, 휴학하고 군대 가는 학생들과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져, 우리 학년의 구성원이 많이 변동되었다.
본과 3학년 2학기에는 임상실습이 시작된다. 임상실습은 수업을 할 때 보다 더 일찍 학교병원으로 가야 한다. 아내가하는 문방구가 아침 학생들 등교시간에 제일 바쁘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 혼자서 감당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아침에 가게에서 아내를 도와 장사를 하고 등교해야 하는데,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늦어서 궁여지책으로 오토바이를 샀다. 본과 3학년 1학기 마칠 무렵에 오토바이를 샀는데, 운전이 미숙하여 상당히 위험하였다. 여름방학 동안에 오토바이 운전을 숙달시키고자 하였다. 그 오토바이로(운전도 미숙한 상태에서) 여름방학 때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까지 4박 5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덕분에 위험한 경우도 몇 번 겪었지만 오토바이 운전은 많이 숙달되었다. 나중에는 이 오토바이로 가게 물건을 하러 진시장까지 다니기도 하였다.
이 오토바이 여행에 대해서도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3학년 2학기 말경에는 우리 학년으로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약칭으로 ‘졸준위’라 한다)가 꾸려져, 4학년(졸업반)의 졸준위와 긴밀한 협조체제에 들어가며, 선배들의 국시대비 보조활동을 한다.
본과 4학년 1학기까지로 임상실습은 끝나고, 이제는 국가고시(‘국시’라고 보통 약칭한다) 준비에 전면적으로 돌입하게 된다. 임상실습 기간에도 수업시간은 적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국시 준비를 하기는 하지만, 1학기 까지는 여유롭게 지내는 편이고, 여름방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졸준위도 이 때 부터는 매우 바쁘게 돌아간다. 국시에 대비한 모의고사 출제도 하고, 다른 학교의 졸준위와 정보도 주고 받으며,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자기 개인공부에 돌입하는데, 보통은 본과 4학년들만을 위한 독서실(정독실 : 개인 별로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다)에서 공부를 하고, 가끔씩 국시조(몇 명씩 조를 나누어 함께 공부한다)끼리 모여서, 함께 토론할 과목이나 진도를 설정하고, 요약집이나 문제풀이에 대해 토론이나 의견교환을 한다.
우리 국시조에는 소위 문제성(국시에서 낙방할 가능성이 높은, 성적이 위태로운)학생이 두 명이나 배치되었는데,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모두 무난히 통과하였다.
수시로 모의고사를 치루고, 그 문제풀이로 조별로 모여 토론하고 하는 등으로 2학기가 지나간다. 국시는 거의 대부분이(90% 이상) 통과하는 것이 보통이고, 우리 학교에서는 아직까지 한 명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별로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늘 시험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시험을 보는 해부터는 몇 과목씩 묶이게 되어 있어서 더욱 부담이 없었다. 혹시 어느 과목을 못 보더라도, 함께 묶여있는 다른 과목들을 잘 보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모의고사를 치루는 내내 주관식 문제풀이나, 객관식 (OMR 용지에 싸인펜으로 칠하여 표시하는 것) 문제 등 거의 실수 없이 해 내곤 하였기에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의사 국시는 서울에서 치러진다. 전국의 한의대 졸업반 학생들과, 졸업은 했지만 국시에 떨어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시험을 본다. 우리는 시험 이틀 전에 상경을 했다. 하루 정도는 적응이나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는 국시 준비로 정신이 없어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후배 졸준위(졸업준비위원회) 위원들이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숙소(보통은 시험장에서 가까운 호텔로 정하며, 한 방에 두 명씩 짝을 지어 배정한다)나 식사문제, 시험장으로의 이동수단, 따뜻한 음료나 커피 제공 등 거의 모든 문제를 사전에 준비한다.
나는 같은 국시조이자 침맥동아리 멤버인 이**과 둘이서 한 방을 쓰기로 되었다. 둘 다 코골이가 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수면에 방해받을 수 있을까 염려되어, 정한 조치였다. 물론 나는 미리 귀마개를 준비했다...ㅋㅋㅋ
나랑 같은 방을 쓴 이**은 내가 먼저 잠이 들고 코를 고는 바람에 잠자는데 지장이 있었다고 불평했지만(국시 끝나고 맘 편할 때 얘기), 시험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제 드디어 국가고시 시험이다. 앞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학교에서 실시한 수 많은 모의고사에서 OMR 카드 작성하는 것에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본 시험장에서 실수를 했다.
나는 보통 문제지에 먼저 답을 체크해놓고, 문제를 다 푼 뒤에 답지(OMR카드)에 옮겨서 표시를 한다. 이 날도 늘 평소에 하던 식으로 해 나갔다.
그런데 본초학 시험(다른 과목과 함께 엮어 있다) 문제(본초학은 총 10문제임) 중 3번 문항이 생소한 문제였다. 의련(요약집)이나 의맥(예상문제집)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에 시간 절약 상 나머지 문제를 다 푼 뒤 나중에 생각해보려니 하고 건너뛰었다.
문제를 다 풀고(아까 생소했던 문제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두 체크를 했는데, 풀지 않은 문제의 답 칸 하나를 남겨 놓고(건너뛰고) 체크해야 하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그냥 꽉 채운 채로 밀려서 체크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본초학 답 칸이 맨 뒤에 하나가 남는 것이었다. ‘아차!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과목은 이미 이상 없이 모두 체크를 마친 뒤였다. 본초학만이 문제인 것이다. 시간은 그래도 약 20여분 남아있는 상태라 OMR카드를 다시 달라고 해서 체크할 시간은 충분하였다. 본초학 밀려서 체크한 것 것들을 살펴보니 우연히라도 맞는 것이 없었다. 앞의 두 문제만 빼고 본초학 8문제는 모두 틀린 것이었다. 난감했다.
시험 보기 전부터 감독관은 OMR카드(예비)가 몇 장 없으니까, 실수하지 말라고 당부(경고?)를 한 터였다. 체크를 잘 못 했다고 한 장 더 달라면 줄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속된 말로 너무 쪽 팔리는 일이다. 나이 40이 다 되어서,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머리를 굴렸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매 과목마다 과락이 있어서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 되면 탈락이 된다. 내 본초학 점수는 20점이니 당연히 탈락이지만, 올해 국시부터는 몇 과목이 묶여있어서(본초학 같은 경우 세 과목이 합쳐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 과목을 설사 못 쳤다 하더라도, 함께 묶여 있는 다른 과목에서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이번의 나 같은 경우 본초학은 20점 밖에 못 받지만 다른 과목들로써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상태였다.
그래, 뭐 성적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합격만 하면 되는데, 이 나이에 쪽팔리게 카드를 바꿔달라고 하겠나?
그래서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도 그냥 앉아 있다가 틀린(밀려서 체크한) 그대로 제출했다.
이런 해프닝 속에서도 나머지 시험은 잘 봐서 합격을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올 때는 마치 하늘이 우리를 축복하는 듯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국시의 종료와 함께 우리의 실질적인 학교생활은 끝났다. 이제 다시 부산에 내려가 간단한 서류준비만 하면 되는 것인데...
시험을 마치고 형님 집으로 갔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누워계셨는데, 형수님 말이 얼마 못 갈 것 같다고 하신다.
나는 한의사 시험을 잘 마쳤다고 인사드리고, 서류 준비 차 부산에 내려갔는데, 내가 내려온 지 1주일 만에 어머니께서 운명하셨다.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했지만, 나는 안다. 어머니께서 간곡한 치성을 드린 덕에 내가 한의대에 들어가고, 또한 내가 시험을 잘 마치길 기다리신 연후에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라고...
서류도 모두 제출했고, 합격자 발표도 모두 끝났다. 동의대는 전원이 다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는데,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의 면허증이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
왜 이러지? 또 괜히 걱정이 된다. 내가 본초학 시험을 못 봐서 그러나? 나이가 있어 바로 개원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면허증이 나오지 않아 속을 썩인다. 개원준비는 다 끝났는데도 면허증이 나오지 않더니, 늦게야 나온다. 면허증이 늦게 나오니 면허번호도 늦다.
이제 한의원을 열고 한의사로서 진료를 시작한지도 12년이 넘었다.
나와 함께 입학해서 공부하다가, 유급되거나 휴학했던 사람들도, 또 학교성적이 아래에서 밑돌아 쩔쩔매던 사람들도 모두 훌륭하게 한의사로서 진료를 열심히 하고 있다. 어렵게 학교생활을 보낸 사람들이 더 많이 이루고, 더욱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다만, 진**씨같이 질병(정신질환)으로 인해 휴학했다가 복학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제적된 화교 2명(정원 외 학생)은 지금은 또 어떻게 지내는지...
지금은 그 횟수가 많이 줄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국시(한의사 국가고시) 시험 준비를 위해 공부하는 꿈을 빈번하게 꾸었다. 시험 중에서는 별로 부담이 없는 시험이었다고 생각하는데도, 꿈에서 자꾸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과목공부를 하는가 하면...... 수학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다. 꿈속에서 조차 시간이 부족하다며 애를 태우고 있다. 국시를 본지가 12년이 넘었고, 대학입시를 본 지는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국시 시험 공부하는 꿈에다, 과목조차 ‘수학’이라니...
내가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한의대 생활(주로 시험과 유급 따위)에 대해 늘어놓은 것은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니라 작은 아들 범진이가 동의한의대 예과 2학년인데, 이번 1학기를 넘기지 못하고 기어이 유급되고 만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충격이기도 하겠지만, 달리 해석하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복(福)은 고난과 역경이라는 단단한 껍질에 쌓여서 함께 찾아온다고 한다. 그 고난과 역경의 껍질을 힘써 까야만 복(福)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보왕삼매론의 말을 빌면,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셨느니라...”
내 아들 범진이에게 미친 지금의 고난과 역경이, 내일의 복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고, 그 뒤에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자세로 나날이 임하길 바라면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글을 맺는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듯이, 달리고 또 달린다. 달리다가 지치면 걸어서라도 결승선까지 들어온다. 우리에게 포기란 없다. 다만 좀 늦을 뿐이다.
“ 범진이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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