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꿈 속에서도 시험공부를...(제1편) 어느 늦깎이 학생의 학원생활

道雨 2007. 7. 6. 20:31

 

1609

 

           꿈 속에서도 시험공부를... 그런데 과목이...

 

                   제 1편 : 어느 늦깎이 학생의 대학입시학원 종합반 생활

 

  1988년 2월, 약 13년(정확히는 12년 6개월) 동안 입었던 푸른 수의(군복을 지칭함)를 벗고, 32세의 나이에 새로운 길을 찾고자 대학입시학원(종합반)에 다니게 되었다.


  1973년도에 고교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졸업학력 검정고시(그 당시에 '대검'이라고 불리웠다) 준비를 하기 위해  검정고시학원에 몇 개월 다닌 것이 고교과정의 전부였으니, 실로 15년 만에 다시 고교(학습)과정을 밟는 것이었다. 물론 3사관학교에 다닐 때 군사학 뿐만 아니라 교양과목을 일부 하기는 했었다. 


  2월 15일 부터 개강하는 과정에 들어갔는데, 학원에 입학한 지 1개월도 안되어 내 나름대로 세운 계획(수학 50%, 영어 30%, 국어와 기타 20%의 시간 배정)과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내 나름대로는 수학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수학 90%, 영어 5%, 국어와 나머지 과목(국사, 지리, 화학, 생물, 윤리, 상업) 5%의 비율로 바뀌게 된 것이다.


  목표로 하는 대학이 동의대 한의예과(자연계에 속함)였던 관계로, 자연계 수학(당시 용어로 공통수학, 수학1, 수학2)을 해야 하는 것이 제일 큰 부담이었다. 짧은 기간에 검정고시로 인문계 수학(그것도 미분까지만 했던 것으로 기억됨)을 대충 때웠던 터라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


  학원에서 정규수업을 마치고 난 이후에도 늦게까지 자습을 했는데, 오로지 수학과목에만 매달렸다. 수학문제를 풀다 보면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려서, 하루가 30시간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3월에 있었던 첫번째 모의고사에서는 190점(당시 예상으로 한의예과는 250점 정도가 되어야 했다), 4월의 두번째 모의고사에서는 194점이 나오더니, 5월의 세번째 모의고사에서는 180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6월 중에 지금까지 약 3년간 살던 송도에서 해운대로 이사를 했다. 내가 공부 중이라 집사람이 벌어야 했기 때문에, 벼룩시장에 나온 가게(문방구)를 찾아 이사하게 된 것이다. 이사 때문에 학원생활 중 유일하게 하루 결석을 했다. 6월에 모의고사를 봤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보지 않은 듯하다.


  학원의 종합반에서는 6월말까지로 해서 한 타임이 끝나게 된다. 다시 말해 고교 3년 과정을 한 번 훑어봤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수학은 예외여서 여전히 진도가 나가고 있었다. 워낙 분량이 많기 때문에 4개월 반(2월 15일부터 6월 말 까지)으로는 끝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맘때가 되면 학생들이 일부 바뀌게 된다. 새로운 학원으로 옮기는 학생들도 있고, 또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도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학원의 분위기도 약간 어수선하게 된다. 더우기 날씨도 덥고, 대학들도 방학을 하는지라, 대학에 다니는 고교동창들도 만나보게 되고 하면 마음이 심란해지기도 한다. 학원 입학 초창기에 다짐했던 강한 의지도 무디어지게 되며, 방학(물론 재수생의 방학은 없다)과 여름휴가철이라는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들떠서 공부에 소홀하게 되기도 한다. 이때가 재수생(학원생 통 털어서) 들에게는 첫번째 맞는 위기의 계절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암기과목이 한 타임 끝나고 나니 모의고사 보는 데는 한결 수월해졌다. 7월의 모의고사에서는 전 번 모의고사 점수에 비해 무려 30점 이상이나 올라서 211점을 기록했고, 8월에는 228점을 기록했다. 그래도 수학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하루가 30시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길지 않은 내 인생(그렇다고 아주 짧지도 않은 50년이다)이지만, 이때처럼 시간이 아깝고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이 때 시간적으로나 마음으로나 너무나 여유가 없어서, 장인어른 환갑에도 찾아뵙질 못했고(지금도 장인어른, 장모님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장인어른, 장모님! 죄송합니다), 추석 때 서울(아버지, 어머니가 계신)에도 가질 못했다(부모님이 추석 며칠 전까지 우리 집에 계시다가 추석 쇤다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내가 제대하고 학원에 다니던 중, 해운대도서관 옆으로 이사 와서 집사람이 문방구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건 값도 잘 모르려니와, 장사라는 것을 처음으로 하니 모든 것이 미숙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다른 곳으로 옮겨볼까 생각하고, 이곳저곳(때로는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가기도 했다고 한다) 비슷한 문방구를 찾아 살피러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게를 옮길 형편도 아니려니와, 시간이 금 같은 시기였기에 그냥 참고 견디고 이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나는 아침 일찍 가게를 열기도 전에 학원으로 나가고, 또 학원에서 거의 막차(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어서, 가게 일을 도울 수가 없었다. 일요일에는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보냈지만, 가게일은 거의 하지 않았고(일요일은 가게도 특히 더 한가하다), 목욕을 하고, 영어나 국어, 그리고 암기과목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내가 제대한 뒤에 우리가 제대로 살기나 할까 걱정이 되어, 조금이라도 우리를 도울 게 없을까 하고 우리 집에 내려와 계셨었는데, 나중에 어머니 말로는 이렇게 장사를 못해서는 도저히 (경제적으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매일 걱정이셨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집사람이 물건 하러(구입하러) 다니거나 가게를 비울 때 아버지께서는 짬짬이 가게를 봐 주셨고, 어머니께서는 가까운 절(우리가 사는 동네에 대자선원이라는 작은 비구니절이 있었다)에 다니시면서 치성을 드리곤 하셨다. 가끔 어머니에게서 외할아버지(한의사이셨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어렸을 때라서 뵌 기억이 없다) 얘기도 듣곤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내가 지원하고자 하는 한의학에 대한 명분 아닌 명분(인연이라고 해도 좋을)으로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인연이 닿기를 빌었다.

  이렇게 지내시면서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종종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시곤 하셨다는데, 나중에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나는 그 때 그것이 원인이 되었는가 보다 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자책을 하곤 했다(아버님께서는 내가 한의예과에 입학하고 나서, 예과 1학년을 마치고 난 겨울방학 중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학원의 스케줄은 8월 말에 두 번째 타임이 끝나게 된다. 7월과 8월의 두 달 동안에 수학을 제외한 전 과목이 또 한 번 끝나게 되는 것이다. 학원수강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7, 8월이 아주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다. 자칫 마음이 흐트러지기 쉬운 시기인데 이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성적이 많이 좌우된다. 

  이 시기를 무사히(?) 잘 넘긴 사람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성적이 오르고, 이 때 방황을 하거나(학원을 옮기거나, 놀러 다니거나) 느슨하게 보낸 학생들은 이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9월이 되면 학원의 스케줄은 일부과목(수학)을 제외하고는 문제풀이로 들어간다. 수학은 여전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다행히 나는 우리 반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어서(마음씨도 좋으셨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따로 지도해 주신 것은 없지만 심적으로 많이 의지가 되었다.

  9월 모의고사에서도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종합반 수업이 끝난 후에 중요과목(영어, 수학, 국어)이나 암기과목 단과반을 들으려고 하는 등 또 갈등을 겪게 된다. 사실 이 시기는 이제 자기 스스로 암기과목을 정리해 나가는 시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합반 수업이 끝나면 자기의 취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공부가 되어야 하는데, 강의(단과반)를 듣다 보면 정리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초반에 수학 단과반(4개월짜리 코스인데 한 달 듣고 그만두었다)을 딱 한 번 들었는데 거의 도움이 되질 않았다. 시간이 아까와서, 오히려 그 시간에 내가 문제를 푸는 것이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과목들은 한 번도 단과반 수업을 듣지 않고 내 스스로 교재를 보면서 정리하였다. 그것도 9월이 지난 후에 일요일에만 집에서 정리하는 것으로... 학원에서는 여전히 수학에만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도 수학을 제외하면 이제 두번째 타임이 끝난 셈이라, 다른 과목들은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모의고사를 봐도 전혀 생소한 것들은 아니고 내가 미처 못 봤거나 실수해서 틀리는 것이다. 영어나 국어는 물론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수학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암기과목들은 대하기가 훨씬 편해진 것이다.

  9월 모의고사에서의 내 성적은 244점이었다. 많이 올랐다. 이때까지 모의고사를 보면서 나는 제1지망에 모두 ‘동의대 한의예과’를 썼다. 초기에는 보통 성적과 관련 없이 소위 명문대(서울대 등) 중에서 자기가 관심을 둔 학과를 지원해본다. 떨어져도 상관이 없으니까...자기가 상위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7월까지)는 동의대 한의예과를 지원하는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그걸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9월쯤부터는 현실적으로 돌아와서 자기 수준에 맞는 곳에 지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9월 모의고사에서 획득한 내 점수(244점)는, 모의고사 성적으로 동의대 한의예과에 처음으로 합격권에 들 수도 있다는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모의고사 성적상(지원자 중에서) 실제로 합격권에 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기까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수학이었다. 75점 만점인 수학에서 나는 통상 30점을 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40점대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이것은 제 실력이 아니었다. 이때까지 나는 모의고사 때마다 내가 모르는 문제는 아예 답을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9월 모의고사부터는 모르는 문제도 대강 답을 적었다. 소위 ‘찍기’라는 것이다. 이 찍기로 인해 몇 점이 더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실제 학력고사 시험에서는 찍기도 할 것이니까 이 때 부터는 찍기도 해서 성적을 가늠해 보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10월 모의고사에서는 251점을 얻었고, 수학도 처음으로 50점대에 돌입하였으며(물론 찍기 점수도 포함해서), 동의대한의예과 지원자 중에서 또 합격권에 들었다.


  한편 당시에는 체력장 점수(20점 만점)가 대학입시에 반영되었다.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학교에서의 체력장 점수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나는 검정고시 출신이라 체력장을 받아야만 되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체력 측정을 했는데, 고등학교 입시에 반영되는 줄도 모르고, 대충 하다 보니 특급이 아닌 A급을 받아, 막상 고입에 결정적인 손해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당시 지원했던 고등학교 커트라인이 195-196점(200점 만점)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체력장에서 2점(특급은 20점, A급은 18점)이나 깎이는 바람에 결국 고입에 낙방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거의 쓰라린 기억 때문에 체력장에도 미리부터 준비하고자 하였다.

  나는 대체로 발로 뛰는 것은 그런대로 하는데, 상체(팔)로 하는 것이 취약하다. 특히 턱걸이를 못한다. 예전에 3사관학교 체력검정에도 입학 때는 7번인가 했는데, 입학하고 나서 학교 내에서 기운을 다 빼고(각종 기합을 준 뒤에 측정했음) 측정 받을 때는 한 번도 못 한 기억이 있다. 그만큼 내가 팔 힘이 없다. 그래서 체력 측정하기 몇 달 전부터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해서 저녁을 먹은 뒤(학원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먹는다), 학원 옥상에 올라가 턱걸이 연습을 하였다. 처음에는 한 번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한 개씩만 올려보리라 하였다. 그래서 월요일에 한 개 , 화요일에는 두 개, 수요일에는 세 개, ...

  또 다음 주 월요일에는 두 개, 화요일에는 세 개, 수요일에는 네 개,...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다 보니 열 개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 이상은 죽어라고 해도 올라가지를 못했다.

  체력장 측정을 한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여름인지 가을이었는지...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턱걸이를 7번 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종목들은 거의 잘 받아서, 마지막 종목인 오래달리기(1,500m이었는지 1.000m 인지 잘 기억되지가 않음)를 하지 않아도 만점이 되게 되었다.


  나는 현역으로 근무하던 1985년에 기흉이란 질병으로 폐수술(수술이라고 해도 가슴을 약간 절개해서 호스를 꼽아 농을 빼내는 비교적 간단한 시술이었음)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부산통합병원에서 2주일간 입원해 있었는데, 그 때의 인연으로 내가 한의학에 관심을 갖고, 제대 후의 진로를 이쪽으로 잡게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이는 ‘道雨의 辯’을 읽어 보시면 알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군의관이 말하길, “흔하지는 않지만 혹 재수가 없으면 재발할 수도 있다”고 하여, 그동안 가급적 무리한 운동이나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 물론 수술 후에도 사병들 체력 측정을 할 때 1,500m를 함께 달려본 적이 한 번 있기는 했다. 그러나 최근 1년 동안은 전혀 달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혹시나 재수 없게 기흉이 재발한다면...

  그러나 망설임도 잠시, 나는 오래달리기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언제까지나  기흉이 재발할까 두려워하며 살 것인가? 한 번 뛰어봐서 그러한 걱정이 없이 자신있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만점을 받아놓았으니, 뛰다가 불편하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그리해서 오래달리기도 뛰었는데 20여 명의 무리 중에서 2등인가 3등인가로 우수하게 들어왔고, 지금도 기흉 걱정을 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작년에 다리를 다쳐 지금은 못하지만, 작년까지 축구도 열심히 하고, 마라톤도 풀코스를 두 번 뛰었다. 비록 5시간도 더 걸렸지만...

  나는 지금도 그 때 오래달리기를 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곤 한다. 만약 그 때 달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마라톤풀코스를 달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마라톤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완주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가?

  아무튼 11월 이후로는 모의고사를 봐도 성적이 나오지는 않는다. 채점해서 분석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체적으로 배포된 답을 가지고 채점해 볼 수는 있고, 또 그렇게 해서 틀린 것들을 분석하고, 보완해나가는 시간이 된다.

  이 때 쯤에는 수학도 이젠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고(물론 끝까지 다 마치지도 못한 상태가 된다), 중요부분의 예상문제를 풀어주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나도 일요일에 집에서 정리한 암기과목들도 조금씩 보면서 정리에 돌입한다. 그러나 여전히 수학에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있다. 수학이 나의 취약점이기 때문이다. 국어나 영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별로 표가 나지 않고, 암기과목은 정리하면서 대충 이루어진 상태이니까.

  수학, 수학, 수학,...

  이제는 1년 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도 수학 만점에 도전해 볼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니 한 달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이...


  학력고사를 약 2주일 정도 앞두고 학원은 종강을 하게 된다. 이 당시에는 ‘선지원 후시험’이었다. 그래서 지원서, 증명서 등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되고, 또 예비소집에도 가야 되고, 시험 보는 장소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원 종료를 며칠 앞두고, 아내와 난 가게에서 엿을 포장했다. 가게에서 팔기도 하고, 우리 반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다. 어린 아들들도 거들었다.

  종강을 앞두고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반 학생들에게 한마디 하라고 했다. 내가 우리 반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배려한 듯하였다. 또한 내가 장교출신이라서 학생들에게 뭔가 좋은 말이나 용기를 북돋아줄 것이라고 기대했거나, 아니면 그동안 나의 모의고사 성적을 유심히 관찰하고, 뭔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앞에 나가서 집에서 가져온 (나와 아내와 아들들이 합격을 기원하며 밤늦도록 열심히 포장한) 엿을 우리 반 학생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반 학생들에게 그동안 고생했고, 남은 기간 마무리를 잘 해서 모두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이 되길 기원한다고 하였다. 나와 아내와 아들들의 정성을 담아서...

  그리고 그 때 내가 칠판에 썼던 말은 지금도 내가 좌우명의 하나로 삼고 있는 말이었다.

   

“ 待有餘以後濟人 必無濟人之日

   待有暇以後讀書 必無讀書之時 ”


(여유가 있기를 기다려 남을 돕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을 도울 날이 없을 것이요, 한가하기를 기다려 책을 읽고자 한다면 반드시 책을 읽을 때가 없을 것이다)


  비록 아직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글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간직하고 싶은 구절이다. 이것은 내가 기흉으로 입원해 있을 당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읽은 글귀이다.


  종강하기 전에 동의대학교에 지원서를 내러 갔다. 나는 진작부터 목표를 동의대한의예과로 정해두었기 때문에, 눈치고 자시고 볼 것도 없어서, 원서 접수 첫날 아침 일찍 갔더니, 아직 원서 접수할 준비도 되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나는 동의대 전체에서 1번으로 접수하였다. 빨리 접수를 하면 공부할 시간을 아끼고, 가외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서 좋다.

  접수 마지막 날, 마감을 앞두고는 심한 눈치작전이 벌어지는데,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동점자 우선규정에 소신지원을 포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접수한 날짜에 따라 동점자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혼란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또한 소신지원자도 많아질 것 아닌가?


  12월이 되었고, 지금까지의 모의고사가 아닌 실전의 학력고사를 보았다. 모의고사를 숱하게 많이 보고, 시간을 체크해 가며 마지막 준비를 해온 터라 그리 많이 긴장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수학시험에서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모의고사보다 어렵게 출제된 것이다. 30점도 맞기 어려울 듯싶었다. 그래도 다른 과목들은 그런대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국어 문제풀이를 보고는 맥이 탁 풀렸다. 나는 국어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엄청나게 많이 틀렸던 것이다. 모의고사에서도 대체로 국어는 상위권이었는데, 다음날 문제풀이집을 풀어보고는 절망에 빠졌다. 늘 자신했던 국어가 엉망이었고, 수학은 역시나였다. 수학이야 원래 못하는데다 워낙 어렵게 출제되었으니 그렇다지만, 국어는 정말 시험을 보고나서도 못 친 줄을 몰랐으니 얼마나 참담한 심정인가?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첫 시간인 국어를 잘 쳤다고 생각했기에 그 뒤의 다른 과목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첫 시간부터 망쳤다고 생각이 들면 그 다음의 시험들도 영향을 받았거나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불행 중의 다행이었는가?

  그러나 어쨌든 채점을 해보니 235점 정도 나올 것 같아, 이 점수로는 도저히 어려울 것 같았다. 모의고사 때 보다 훨씬 못 나왔으니 실망이 컸다.


  전전긍긍하며 지내는 속에 합격자 발표날이 되었다. 아, 가보긴 가봐야 할텐데 어쩌나. 혹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창피해서 어쩌나 하고 근심이 되었다. 합격자발표 시간이 10시인가 싶었는데, 나는 느지막히 나갔다. 그러고도 학교에 바로 올라가지 않고, 정문 앞의 중국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사람들이 이제는 많이 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즈음에 천천히 합격자 명단 발표장인 당시의 자연대 앞마당으로 갔다.

  합격자 수험번호를 살피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내 수험번호가 거기에 적혀 있었다. 눈이 흐려지며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아내와 부모님들,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종교 생활을 하지 않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3사관학교에 다닐 때는 의무적이라 불교로 수계도 받고, 휴일에 법당에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교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날 나는 처음으로 신(神)에게 감사하였다.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이 아닌 그냥 “신(神)이여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어머니의 치성드리는 모습도 눈에 어른거렸다.

  발표장에 오기까지 나는 한의예과에 두 번만 도전해 보리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떨어졌을 것인 바, 한 번만 더 도전해 보고, 그 때도 안 되면 하늘이 시키지 않는 것이니 체념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정말 의외로 합격이 된 것이다.

  

  나중에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결과, 나야 워낙 수학을 못했으니까 수학 점수가 떨어져도 타격이 크지 않은데 비해, 평소 수학을 만점 가까이 받아왔던 학생들은 정말 너무나 어려운 탓에 크게 타격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즉 수학을 잘하는 학생들의 하락폭이 나보다 더 컸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년 동안 목표로 해 왔던 동의대 한의예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한의대에 입학한 그 해가 1989년이었고, 그 때의 내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나의 큰 아들 공진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 동기인 공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도 한의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아들은 입학 동기이자 졸업 동기가 되었다.

  큰 아들 공진이는 부산의대에 진학하여 지금은 졸업반이 되어 있고, 작은 아들 범진이는 동의대한의대에 입학하여 부자간에 동의한의대 동문이자 선후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셋 모두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두 아들(공진, 범진)은 같은 고교(해운대고) 동문이면서, 같은 축구클럽(슈팅)멤버이기도 하다.


--- 다음에 꿈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 전국의 수험생들 시련의 극복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