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공주 공산성 답사 사진 (2007. 11. 25)

道雨 2007. 11. 29. 12:34

 

 

          공주 공산성 답사 사진

 

* 공산성은 백제의 옛 도읍지인 공주에 있는데, 여러모로 진주성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 조치원에서 살 때 공산성을 가 보긴 했지만,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무령왕릉의 유물이 워낙 훌륭하고 많아서, 답사처로서 지금은 공주박물관(무령왕릉의 유물이 전시된)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이 있는)에 밀리는 느낌이 있지만, 분위기만은 여전히 공주의 제일이다. 마치 진주에서 진주성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듯이, 공주에서 공산성을 빠트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해발 110m의 공산성은, 강 건너 북쪽에서 보면 마치 漢字의 '귀인 공(公)' 字와 같다하여 공산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며, 백제시대의 토성 일부(약 400m)와 조선시대의 석성(약 2,000여m)이 아울러 이루어진 산성이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진주성과는 반대로 강을 북쪽에 두고 있다.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의 한산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마저 전사하고, 쫓겨 내려온 곳이 공주였으니, 가장 무서운 적이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 공산성 매표소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모아져 있는 비석들 

 

 

* 비석들이 있는길에서 올려다 본 금서루(錦西樓). 공산성의 서쪽 문루에 해당된다. 

 

 

* 금서루에서 북쪽 방향의 성벽 위에 거대한 고목나무가 운치있게 서 있다.

 

 

* 공산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본 금강과 금강교. 금강의 둔치가 매우 넓으며, 백제문화제 등 공주지역의 각종행사는 이 둔치에서 열리는 듯 하다.

  전에 '박찾사'팀과 함께 왔을 때 백제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으며,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강의 중간까지 길게 뻗어나온 것은 옛다리 유적이다.  

 

 

* 공산성 북쪽 성벽의 모습. 왼편이 금강이고 오른편이 성 안쪽이다. 

 

 

 

* 공산성의 북쪽 문루인 공북루에서 한 컷... 

 

 

 

* 잠종 보호고(蠶種保護庫). 누에씨를 보관하는 곳이다.

 

 

 

 

 

 

 

* 만하루와 연지.

  이중으로 된 성벽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안쪽의 성벽에서 이 연못으로 내려가는 암문(暗門)(水路인 것 같기도 함)이 있다.

 

 

 

* 만하루와 연지. 매우 깊게 파서 석축으로 쌓은 인공 연못(?)이다. 철책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이 연못은 백제 동성왕 22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연못으로 보기에는 너무 깊어, 아마도 산성의 특성상 비상시 급수에 대비한 물저장고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만하루에서 내려다 본 금강과 금강교. 가운데로 돌출된 부분이 옛 다리 유적이다. 

 

 

 

 

* 조선 세조 때 세워졌다고 하는 절 영은사.

  임진왜란 때는이곳에서 승병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곳에서 훈련된 승병이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 발굴되었으며, 백제시대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백제 시대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 왕궁터 앞에는 깊은 연지(?)가 있고, 뒤쪽으로는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 왕궁터 앞에 있는 연못(?).

  백제 웅진성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도 비상시(전시 또는 화재)에 대비한 물 저장고 역할을 하기 위해 이렇게 깊이 파고 석축을 쌓은 듯 하다.  

 

 

* 쌍수정(雙樹亭).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 때, 난을 피해 이곳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이 때 나무 두 그루가 서있던 곳에 자주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무 두 그루에 정삼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 인절미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임진왜란과 선조 임금의 도루묵, 그리고 이괄의 난과 인조의 인절미라...

 

 

* 공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비석군 앞에서 한 컷... 

 

 

**  공산성의 동북쪽 답사는 생략하였다. 훗날에 다시 돌아볼 날을 기다리며...

 

 

 

***  '이괄의 난'에 대하여

 

글쓴이 : 지초꽃부리 
 

 <이괄의 난(李适ㆍ亂)>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관서(關西) 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고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兵營)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順川)ㆍ자산(慈山)ㆍ중화(中和), 황해도의 수안(遂安)ㆍ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ㆍ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ㆍ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ㆍ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않게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한 뒤에 군사조련, 성책(城柵) 보수, 진(鎭)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렵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하였으나, 군중(軍中)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의 사자(使者)들을 목베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즉, 난의 원인은 이괄 자신 못지않게 집권층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서 이 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월 22일 이괄은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였다.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당시 장만은 이괄의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휘하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괄의 반란군은 개천ㆍ자산 등지를 거쳐 26일에는 강동의 신창(新倉)에 주둔하고, 28일에는 삼등(三登)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괄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薪橋)에서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朴永緖)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遯)을 능지처참하였다.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측에서는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시켜 마탄(馬灘: 예성강 상류, 지금의 猪灘)에서 또 한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던 관군을 기습 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하였다. 2월 11일 이괄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쳤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날 밤 이괄ㆍ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지금의 光熙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ㆍ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