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공주시내 답사사진(송산리고분,대통사터,우금치)(2007. 11. 25)

道雨 2007. 11. 28. 13:13

 

 

   공주시내 답사사진(송산리고분,대통사터,우금치)

 

* 처가 쪽 당질녀의 결혼식이 공주에서 있었는데, 오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공주 시내 몇 곳을 돌아보았다.

 

  얼마전에 다녀온 공주박물관의 야외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형 석조 2개가 있는데, 공주 시내에 있는 대통사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하나의 절터에 있던 두 개의 석조를 중동 석조, 반죽동 석조로 나누어 부르고 있으니, 그만큼 절의 규모가 컸던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다. 

 

  절터는 공주의 옛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근에 법원(지원과 지청)이 있고, 중고교 및 초등학교가 있다. 경주의 황룡사나 분황사 처럼 평지절이었던 듯, 동네 안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의 민가를 정비하여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 대통사터 당간지주(반죽동 당간지주 : 보물 제150호).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이다. 테두리에 단순한 돋을새김을 해놓았으며, 깨진 기단부에는 안상이 있다. 간결하지만 늠름한 기상이 있다.

 

 

 

 

 

* 당간지주의 옆에 있는 초석들. 마름모꼴의 홈을 새긴 석재는 공주교육청 옆 개울가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듯한데, 아마도 대통사로 들어가던 교각의 초석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 대통사터 정비된 모습. 일부 민가가 들어서 있던 공간을 정비하여 동네 안의 휴식공간처럼 가꾸어져 있다.  

 

 

* 공주박물관의 야외전시물 대형 석조.

  원래 대통사터에 있던 원형의 대형 석조이다. 두 개가 모두 대통사터에 있던 것으로서, 하나는 금당터에, 또 하나는 강당터에 있던 것인데, 이름을 달리 붙여 중동 석조는 보물 제148호, 반죽동 석조는 보물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있던 자리(대통사터)에 다시 되돌려 놓으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당간지주와 어울려 좋은 관광상품이 될것 같다.

 

 

 

* 송산리 고분군 안내판 그림. 7번이 무령왕릉인데, 원래 봉토가 없었던 것을, 무령왕릉 발굴 이후 새로 올려 쌓았다고 한다. 6번과 7번이 전축분(벽돌로 쌓은 무덤)으로 되어 있다. 

 

 

* 송산리 고분군 모형관.  꼭 들어가 보시라!  발굴 당시의 무령왕 현실과 유물의 흩어진 모습을 확인하시길... 

  5호분, 6호분, 무령왕릉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 6호분과 7호분(무령왕릉)은 모두 같은 구조의 전축분으로 되어 있지만, 세부적으로 약간 다른 점들이 있어, 비교 설명해 놓았다. 다른 것은 이해가 가는데, 축조방법의 '평, 수' 용어를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 주세요...

 

 

 

* 일본의 왕족이 무령왕릉을 참배하고 기증한 침향목.

  우리가 갔을 때도 추운 날씨에 비교적 이른 시간임에도, 한 무리의 일본 관광객들이 무령왕릉을 찾아 왔다.   

 

 

 

 

* 송산리 6호분 앞에서...

  내부 보호를 위해 영구폐쇄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에 우금티 터널이 있다. 이 터널 위가 동학혁명의 전적지(사적 제387호)인 우금치(티)고개이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 오른 편으로 위령탑이 서 있다. 

 

 

* 우금치 전적지 안내판. 이곳 공주에서는 '우금티'와 '우금치'가 혼용되고 있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에 우금치 고개가 있다. 지금은 '우금티 터널'이 만들어져 고개를 넘지 않고 터널을 통해 바로 지나가게 되어 있다.

  이 고개는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다. 1894년에 외세에 밀리는 관리들의 폭정과 수탈에 견디다 못해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떨쳐 일어선 농민군이, 이 우금치전투를 마지막으로 처절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붉은 벽돌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데도 미처 수리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차별받던 동학 농민군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찾는 이도 거의 없는 듯,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동학혁명'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공식 명칭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하던가?

  이 탑은 1973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다고 한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유신정치로 독재를 하던 당시, 자신의 쿠데타를 농민군의 혁명 전통을 잇는 것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탑 뒤편의 새김글에 새겨진 그이름 석자를 뒷날 누군가가 돌로 뭉개놓아 분풀이를 한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우금치 고개

                                                               - 정 희 성 -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에

우금치 고개가 있지요

우리 근대사의 험난한 고빗길답지 않게

부드러운 이 고개

지금은 여기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고

주제넘게 거기다 제 이름 새겨넣은 사람도 있지요

박 아무개 이름은 누가 돌로 쪼아버렸고

최덕신이란 이름은 관에서 지운 듯했지요

누가 뭐래도 이것이 민심이고

이것이 역사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미질만 하면

이름없는 사람들의 뼈가 걸려 나왔다고

누군가 말하며 울었어요

들녁엔 봄풀이 돋아나고 있고

조금만 더 가면

신동엽 시인의 생가가 나오지요

 

 

 

 

 

 

 * 흙과 돌로써 만든 움막 형태의 건조물.

 

 

* 돌기둥에 가시철망을 휘감아 놓았다. 억압의 상징물이런가? 

 

 

* 가냘픈(?) 나무로 만든 장승 

 

 

 

* 다시 살아나는 우금...

  '백성은 하늘이다' 로 시작되는 시목(詩木)

 

 

 

***              갑오농민전쟁과 우금치전투

 

  고부봉기로 불이 붙은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전주 입성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나라의 약속을 믿고 화약을 맺어, 고향으로 흩어져 집강소를 통한 평화로운 지방자치를 실시하던 농민군은, 그러나 2차봉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농민군이 해산한 틈을 타,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친일 개화 내각을 세우는 한편,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나라 안은 두 나라 군대의 싸움판이 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를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농민군은 다시 떨쳐 일어섰다. 10월 9일에 호남 농민군과 호서 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여, 서울을 향해 꼭 거쳐야 하는 길목인 공주로 진격했다. 우금치와 공주로 들어가는 다른 길목인 금학동, 곰티, 봉수대에 진을 친 농민군은 관군, 일본군과 무려 사오십 차례의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처절히 패하고 말았다. 그로써 농민군의 기세도 다시는 일어설 수없게 되었다.

  그때 관군의 좌선봉장은 다음과 같이 농민군의 처절한 전투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 수만이나 되는 비도가 사오십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한 뒤,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에서 밀려들고, 좌에서 번쩍 우에서 번쩍 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의리, 무슨 담략을 지녔기에 저리할 수 있는 것일까?"

  공주 부근에는 이 우금치말고도 농민군이 군진을 설치했던 괘등산과 발양, 도장대 등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효포(성화산), 시화산, 곰티, 남월, 새재 등이 있고, 전투가 너무 치열하여 마을이 온통 파괴되는 통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못했다는 승주골, 은골, 어은동 등이 있으며, 패배한 농민군이 넘었다는 아리고개, 11월 9일 곰나루 마지막 격전지였으며 결국 참패한 농민군의 시신이 골을 메운 바람에 이름이 붙게 된 송장배미 등의 전적지가 있다.